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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모 Sep 21. 2022

본능과 버릇 사이 1

어떤 것이 태어날 때는 단단한 무언가를 뚫고 나온다. 단단한 것이 껍질이든 좁은 통로이든 오래된 생각이든. 어쨌든 그 과정을 거쳐야만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단지 그 자리에 가만히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온 세상을 발기발기 찢어놓을 듯 휘몰아치던 거센 비바람을 버틴 하늘은 또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밝고 투명한 하늘색을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한눈에 봐도 생전 처음 보는 듯한 그런 깨끗하고 연한 하늘색을...

그 하늘 아래, 잘 포장된 산책로를 여자가 걷고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한편에 심어진 나무들은 하늘과는 전혀 다르게 여름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수백 번 수천 번 흔들렸다.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이 산책로 여기저기에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것은 세상을 끝장낼 듯 불어오는 강한 바람과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풍은 지나가는 길에 약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사정없이 할퀴고 부수고 지나갔다. 태풍의 잔해가 잔뜩 깔린 산책로를 쳐다보던 여자의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졌다. 느릿느릿 걷는 여자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그러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우러 여자가 쭈그리고 앉자 근처 풀밭에서 풀씨를 쪼아 먹던 참새 떼가 갑자기 후드득 날아올랐다.

참새들의 움직임에 화들짝 놀란 여자는 엉거주춤 서서 그것들을 눈으로 좇는다. 참새 떼는 있던 곳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나뭇가지에 일제히 내려앉았다. 무리 지어 걸터앉는 새들의 무게에 나뭇가지가 아래로 휘청거렸다. 그런데 흔들거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양손에 지팡이를 잡고 걸어오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지만 그 노인 특유의 걸음걸이로 한눈에 바로 그 노인임을 여자는 알아차렸다. 노인은 여전히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노인은 챙이 넓은 노란 모자를 쓰고 모자보다 더 샛노란 웃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 조그맣게 보이던 노인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여자의 표정은 점점 차갑게 굳어졌다. 여자는 굽혔던 몸을 바로 세우고 노인을 향해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노인을 처음 만난 날은 햇살이 따뜻한 봄날이었고 이 근처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산책길 양옆으로는 어른 키 높이만큼 자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봄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노란 유채꽃 사이에 그 노인은 그림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오직 지팡이를 잡은 가느다란 양손만이 가볍게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옆으로 걸어가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노인은 말했다.  
“예쁘네. 참말 예쁘네.”
유채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가? 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자는 앞서가던 아주머니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노인이 상습적으로 여자들만 보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여자는 그 노인을 산책길에서 몇 번 더 만났다. 두 번째 만남에서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며 볼록 솟은 젖이 예쁘다며 희롱하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여자는 당황하지 않고 노인에게 나이부터 물어보았다. 귀가 잘 안 들려 대답할 수 없다는 노인에게 80세가 넘었다는 것을 알아낸 여자는 친정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인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짧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의 후회되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했었다.

길 가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면 성추행에 해당한다. 경찰서에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그런 말은 부디 그만하시라고. 그러자 노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여자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세 번째 만남에서 노인은 반갑게 인사하는 여자에게 느닷없이 자신의 성생활과 은밀한 사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길거리 한가운데서 젊은 여자를 붙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노인의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여자의 눈썹이 당황과 분노로 찌그러지는 것도 눈치채지도 못한 채 노인의 자기 이야기에 스스로가 빠져들고 있었다.
여자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만하세요! 구역질 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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