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래스에서 근무하기 전까지는 자해하는 학생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오죽하면 일명 ‘자해 놀이’가 청소년들의 트렌드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손목에 상처를 내고는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거나 SNS에 올리기도 하니까요.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경우보다 한번 시작하면 마음이 동(動)할때마다 자꾸만 ‘자해의 동굴’로 대피해 버리는 친구들을 적잖게 만났습니다.
보건선생님이 상처를 치료해 주고 조심스레 위클래스로 의뢰를 하기도 합니다. 본인이 와서 얘기하기도 하고 학생 A가 찾아와서 B가 자해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고, 더운 날씨에 긴팔 옷이나 토시를 하고 있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제가 다가가 물어보기도 했지요. 이런 일들은 빙빙 돌려 알듯 말 듯 모르게 물어보는 게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차근차근 물어보는 게 상책이랍니다.
참고로 자해의 정확한 표현은 비자살적 자해(Non-Suicidal Self-Injury)이며 실제로 죽으려는 의도가 없으면서 자신의 몸을 해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의도가 있든 없든 모두 위험한 신호이므로 우리는 이들을 만났을 때 과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뱀의 눈으로 예의 주시 해야 하지요.
자해하는 방법도 너무 다양해서 커터칼, 눈썹 깎는 칼, 면도칼, 뾰족한 샤프 등으로 손목(혹은 허벅지)을 긋는 제일 흔한 방법, 손톱이나 그 주위를 심하게 물어뜯어서 한눈에 보기에도 살갗이 벗겨지거나 피부가 헐어있는 경우, 벽에 머리를 찧거나 발로 다른 한쪽 다리를 때리는 경우, 상처 부위를 계속 뜯어내는 경우, 신체 부위를 세게 꼬집거나 손톱으로 긁는 경우 등을 접해본 것 같습니다. 안영신과 송현주(2017)의 연구에 의하면 문신이나 머리카락 뽑기 등도 비자살적 자해에 속한다고 하니 그 종류와 방법은 매우 다양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자해뿐만 아니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넘어서 실제 시도(투신, 목매달기, 약물 과다복용 등)를 하는 사례를 만나면 아무리 경력이 오래된 학교상담자라도 두려움과 불안함에 가슴이 조여오기 마련입니다. 그 뒤로는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며 하루하루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냅니다.
- 유영이가 삶을 대하는 자세 -
지금은 성인이 된 유영(가명)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에서 관심군으로 분류되어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는 매년 학기 초에 초등학생은 1, 4학년, 중고등학생은 1학년을 대상으로 학생들의 정서상태를 선별하기 위해 실시하는 검사인데요, 초등학생은 학부모가 체크, 중고등학생은 직접 본인들이 문항에 체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 관심군(일반관리군, 우선관리군, 자살위험군)으로 분류되면 절차상 앞으로 위클래스의 VIP(?) 고객님이 될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경험상 저는 추론하고 있습니다.
이 검사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자살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한 번이라도 심각하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의 문항에 ‘예’라고 응답을 하고, 그것이 실제 근래의 속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우선관리군과 자살위험군에 속하게 됩니다. (기준점수를 초과하는 경우도 관심군으로 분류함)
이렇게 분류된 학생들은 위클래스에서 2차 기관에 심층평가를 연계하여 좀 더 정밀한 심리검사나 경우에 따라 병원 치료를 받도록 돕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부모나 학생의 거부 혹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심층평가를 연계하지 못하면 학교 상담쌤은 관리자나 소속 교육청의 압박을 받게 되고, 일의 절차상 ‘하자’를 만든 장본인이 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기관마다 실적 위주의, 줄 세우기식 평가방식의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로는 위기학생을 선별하는데 한계가 있고, 일반군에 속한 학생들이 관심군에 비해 자살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고 알려져 있어 검사의 실효성에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유영이도 그 모든 조건에 잘 부합(?)하여 만나게 되었습니다. 네 살 터울의 주목받는 오빠로 인해 가정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였지요. 초등학교 때 몇 달간 집을 나가버린 엄마와 그로 인해 온갖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풀던 아버지, 당시 두 아이는 놀이터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이후 다시 돌아온 엄마는 유독 유영이에게 막말 세례와 머리채를 잡으며 화를 풀기 일쑤였습니다. 유영이는 아파트 창문에 걸터앉아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살아서 뭐 해, 내가 죽어도 엄마는 아무렇지 않겠지, 아니야, 내가 죽어서 엄마한테 복수할 거야.’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유영이에게 그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곁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지요.
문제는 첫 회기 이후로 유영이가 저와의 만남도, 2차 심층평가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짐작컨대 엄마에게 혼이 많이 난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 가서 쓸데없는 얘기를 왜 했냐며...).
이러한 고위기 사안의 경우는 앞서 설명드렸듯이 비밀보장의 예외 사유에 해당하는데, 첫 상담 시간에 구조화를 하며 미리 설명을 했지만, 막상 부모님께 알려야 한다고 하니 극구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상담쌤이 집에 연락하면 자신은 정말 죽어버릴 거라면서 그전에 엄마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제게 위협적인 엄포를 놓는 것이었지요...
저는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제가 잘못 대처해서 문책이라도 당할까 봐, 실제로 하자 있는 인간으로 낙인찍힐까 봐, 저의 슈퍼바이저가 말씀하시는 ‘까봐 불안’이 제대로 작동하는 시점이었지요.
그래도 저만 알고 있을 수는 없었지요. 누구보다도 보호자가 알고 같이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첫 상담을 한 그날 오후 유영이 엄마와 통화를 하며 제 마음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아이의 마음 건강 상태에 대한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자르며 짜증 섞인 말투로
“지가 뭐 잘했다고 우울하대요? 그런 거를 정신력으로 마음먹고 이겨내야지, 나도 우울합니다! 심층 평가 그런 거 안 해도 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우리 애 아무 이상 없고요, 내 새끼 내가 잘 챙길 테니 오라 가라 하지 마세요!”라고
쏘아붙이는 통에 저도 얼떨떨해지면서 심장이 두근거리더군요.
참내, 그분이 우리 엄마가 아닌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니까요...
유영이가 얼마나 힘들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유영이는 중학교 때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도 몇 번 다녀오고 집에서 부모님 속을 좀 썩이기도 했던 과거(?)가 있는 친구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모가 어떻게 그런 가혹한 말과 행동을 하는지 저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후로 저는 유영이에게 접근하고자 1학년 교실 복도를 자주 지나다니곤 했습니다. 마주치게 되면 한 번씩 말을 걸고 심층평가에 대해 넌지시 던져보기도 했지만, 걔는 저를 완전 개무시하면서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이제 와서 밝히지만 저 그때 갑질(?)당하면서 정말 마상(마음의 상처) 많이 입었습니다. 안 그래도 자존감 낮은 상담쌤인데, 돕고자 애쓰는 제 마음을 그리 몰라주다니요. 제가 뭐 저 좋자고 그리 들이대었을까요?
사실, 예. 맞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 조금이라도 편하자고, 만일의 일이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제가 이렇게 저렇게 노력했는데도 꿈쩍도 않더라는 근거를 남기기 위해서 그랬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어김없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요...
유영이에게 믿을 만한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유가 어떻든 네가 힘들 때 네 말을 들어주고 너를 걱정해 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1년이 지나고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저의 애정도 식어갈 즈음, 2학년이 된 유영이가 친구와 함께 위클래스에 들르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을 빼먹고 놀고 싶은 욕심으로 방문한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그게 어딘가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저는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상담시간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술에 소질이 있던 유영이는 상담을 하며 스케치북에 만화캐릭터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허허벌판에 사람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섬뜩한 그림을 그려서 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지요.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양쪽 팔에 세찬 비가 내린 듯 자해 상처가 많은 날도 있었습니다. 가끔씩 그 무서운 유영이 엄마와 통화도 했습니다. 어떤 날은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그분도 아픔이 많은 세월을 살았으니 어쩌면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좋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아픈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지요.
고3이 되어서도 유영이는 여전히 방황하고 1, 2주씩 가출을 하며 담임선생님과 저의 애를 태웠습니다. 저는 유영이가 등교했을 때 잠시 들러 쉬어갈 수 있는 등나무 밑 벤치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영이는 무사히 졸업을 했지만 가끔 생각합니다. 어딘가에서 어떤 표정으로 지내고 있을지. 그저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친구가 ‘충분히 애쓰고 있구나’를 우리가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예스터데이』의 한 대목을 빌려 유영이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덴버에서 (혹은 어딘가 또 다른 먼 도시에서) 유영이가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나는 기도한다. 행복하다고까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하루를 부족함 없이, 건강하게 보내기를. 내일 우리가 어떤 꿈을 꿀지, 그건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까.
- 왜 자해일까 -
2023년 청소년 통계자료(여성가족부)에 의하면 2021년 청소년 자살자는 전년 대비 1.3%(24명) 증가한 1,933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망원인으로 고의적 자해(자살)가 2011년부터 줄곧 1위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자해·자살 시도자의 10~20대 비율은 2012년 30.8%였지만, 2022년 46.2%로 15.4% p 증가했습니다(질병관리청 손상유형 및 원인 통계).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무엇 때문에 자해를 할까요?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자해를 하시나요?
자해를 안 하신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예를 좀 들어보겠습니다.
한꺼번에 줄담배를 피울 때...
술이 술을 마신다고 부어라 마셔라 개의치 않으며 들이부을 때...
매운 라면이나 마라탕 맵기 단계를 무조건 3단계 이상으로 주문할 때...
(맛으로 먹는 건지 통각(痛覺)으로 먹는 건지 구분이 어렵습니다^^;;;;)
나의 뇌를 쇼츠 영상에 절일 때...
잠을 자야 하는데 이것저것 하다가 잠 못 이루고 몸을 더 피곤하게 만들 때...
저는 심리적 허기가 찾아오면 폭식을 많이 했습니다.
마음이 힘든 아이들을 만나 분리하지 못하고 정서적 불안정이 저를 덮치게 되는 날에는
퇴근길에 집에 가서 무얼 먹을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먹고 또 먹고 목구멍이 차오를 때까지 먹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스스로를 괴롭힐 때가 있지요.
아무 생각 없이 그러기도 하고
그 방법이 익숙하고 쉬워서도 그렇고, 어떨 때는 하고 나면 기분이 괜찮아지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너무 지치고 무력할 때는 자동적으로 이 방법만 떠오릅니다.
또 다른 날은 하고 나면 ‘내가 왜 그랬지’ 후회되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걸 상대방이 알면 좀 죄책감을 가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그만하라고 말해주고, 나를 좀 챙겨줬으면 싶을 때도 있습니다.
내게 관심을 좀 줬으면 싶은데 그런 말을 직접 하기는 힘드니까요.
힘든 거 표시 내면 옆 사람이 더 힘들어할까 봐 차라리 위와 같은 방법을 선택하기도 하고.
(결국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걱정시키는 것이 피해를 준다는 인식을 못한다는 게 함정)
사람들이 나를 멀리하는 것 같으면 그때는 너무 외롭고 괴로우니까 또 나를 못살게 굴지요.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해서 또 나를 괴롭히고...
이렇게 반복되는 삶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고 뭐고 없어서 그야말로 내 인생은 ‘노답’이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취약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남들이 나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것 싫어합니다.
한 인격체로 존중받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불편한 상황을 선뜻 해결할 만큼 성숙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게 하니?”
“이유를 모르겠어요”
“뭔가... 인생을 왜 살아야 하지? 나는 왜 태어났지?”
“사라지고 싶어요. 조용히 끝내고 싶어요.”
“밤에 잠들면서 이대로...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 누가 올까 생각해요...”
정말로 신기한 것은 자신을 잘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도 한결같이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지금 누가 누구를 돕니, 너부터 좀 챙기고 나서 남을 돌보든지 해야지!’라고 타박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선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소중히 대해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제자가, 지인이, 자해를 하거나 죽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 힘든 마음을 알아주세요.
“그런 생각하면 안 돼, 생각을 바꿔야지!”
“살아가면서 앞으로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힘들다고 이러면 어떡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