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퇴원할지 모르는 엄마의 병원생활에 우리 셋은 서로 상황을 맞춰가며 병원에 들어와 병간호를 했다.
방학을 한 달 반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나는 집이 병원이랑 가까웠지만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 입출입이 자유롭지 않아 한 번 들어가면 2일, 3일은 병원에 있어야 했다. 지금 휴직을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방학까지 버티면 좀 나아지겠지 연가를 쓰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학교에는 아쉬운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들께 자주 수업 교환을 부탁드려야했고, 수업이 왜 자꾸 바뀌냐는 아이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했으며업무에도 공백이 생기지 않게 미리미리 업무를 처리하느라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관리자들에게 연가를 써야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번 한 번 만이 아니라 다음에 또 언제 연가를 써야할 지 모르니 나도 모르게 자꾸 위축되었다.
우리 아들은 자연스레 뒷전이 되었다. 어린이집 등하원 시간에 맞춰 나가서 잠깐 얼굴을 보러 가고 안아주었다. 가끔 안경을 빼먹거나 삐죽머리를 한 채 등원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어린 마음에 엄마를 이해해주는 아들이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동생은 육아휴직 중이었다.
곧 돌을 앞둔 딸을 두고 나와 교대로 몇 일씩 보호자로 들어와있어야 했다.
조카는 동생의 시부모님이 맡아서 돌봐주셨다.
사업하고 계신 아빠는 지방에 일이 잡혀 지방과 병원을 왔다갔다 하셨다.
은퇴하셔야 할 나이에 장거리 운전, 불규칙한 식사, 안정적이지 못한 잠자리, 흡연...
엄마가 이렇게 되고 보니 아빠도 예기치 못한 사고나 병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었다.
"언니, 이게 말이 돼? 언니 유산하고 나서 우리 여행갔다온게 불과 한 달 전인데... 그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게."
맞다. 나에겐 찰떡이가 있었지.
엄마에게 처음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유산으로 인한 병가중이었다.
시험관 2차까지 해서 힘들게 만난 둘째였다.
임신했을 때부터 심장소리도 늦게 듣게 되고 성장도 더뎌 예후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정말로 잘못됐다는 얘기를 들었을때는 생각보다 마음이 아팠다.
잘못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애가 정말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죄책감도 밀려왔다.
거의 2주일을 등원준비만 겨우 시키고 땅바닥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조금 정신을 차릴 때쯤에 엄마의 병이 시작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때 그 아이가 떠나준게 다행이었다 싶다. (미안해, 찰떡아...)
임신한 몸으로 병간호를 하는게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모든 것이 불안정한 그 때 만삭이 되고 출산을 하고 신생아를 키우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나와 통화를 하면 내 몸은 괜찮은지 물어보셨고, 나는 아빠가 안전운전하고 담배 많이 피우시지 말란 얘기를 꼭 했다.
나는 돌도 안된 조카를 떼어놓고 오는 동생이 안쓰러웠고, 동생도 고군분투하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우리는 서로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