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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르 왕자 Sep 03. 2023

지방대 블루스 1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지방대 교수의 고민  

빛 좋은 개살구란 표현은 현재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에서 몸담고 있는 교수들의 삶을 포착하는 비유다. 나름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치열한 취업시장을 뚫고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뿌듯한 마음으로 출근한 것도 잠시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는 것이 없는 학생들과 한 학기를 보내고 나면 수도권에 가는 학생들과 지방에 남은 학생들의 그 차이가 실감 나게 느껴진다. 그들의 천진난만함은 그들이 아직 고등학생의 자아에 머물러 있음을 나타내고 그들의 무지함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누군가의 무관심의 그림자처럼 느껴지며 그들의 무능력함은 마치 말기 암환자들만 치료해야 하는  의사의 가혹한 운명을 상기시킨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 담임이 신경 쓰지 않은 학생들이라고 해서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 소중한 존재들이며 일상적 행복을 꿈꾸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망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꽃을 피우기 위해 심는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본시 척박한 환경에서 싹을 틔우지 못함도 있겠으나  GDP 기준 세게 10위안에 드는 부자나라에서 척박한 환경 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아예 싹을 틔우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잊혀 나와 조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서로를 책망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어설프게 자란 쭉정이들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쭉정이를 모아 단으로 만들어 태워버렸다면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누군가는 알곡들을 모아놓기 위해 대학을 만들었겠으나 곡간은 텅텅 비어 쭉정이를 알곡이라 기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청춘들을 애달파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북돋우는 누군가의 기도와 간절함을 내가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서글퍼하지 않으리라. 책상에 앉아 나의 강의를 들으며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인 양 스스로를 속이는 학생들의 허무한 시간들과 명료한 세계에 대한 열망이 없이 교수가 묻는 질문에 속절없이 눈만 동그랗게 뜬 체 꿀 먹은 벙어리 행세라도 해야 하는 그들을 보고 어찌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햄릿처럼 삶과 죽음이란 커다란 삶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라면 어쩌랴! 고뇌와 번민 속에 슬퍼하는 이들이라면 어쩌랴! 이들이 앎과 무지사이에서 갈등이라도 했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마트에서 사는 한우고기도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사람이나 대학에 등급이 매겨지지 않기를 기대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그러나 고기에 매기는 등급과 달리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일이 가지는 위험성은 등급이 그들의 마음을 위축시키는 점이다. 패배에 익숙해지는 팀은 늘 패배를 당연시하게 되고 패배라는 충격을 견디기 위해 팀원들의 마음은 스스로 패배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바꾸어 패배에 대한 감수성을 마비시킨다. 아는 문제를 틀려서 억울해서 눈물을 흘리는 학생을 이 대학에 온 이후로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이 자신에게 고통이 되지 않는 학생들이 과연 공부라는 것을 해낼 수 있을까? 지방대에서 볼 수 있는 희망이란 너무나 드물기에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타버린 성냥개비처럼 허무하다. 



'이 수업은 여러분의 지적변화를 위한 것'이라고 학기 초에 외칠 수 있는 팔자 좋은 교수들이 있는 반면에  '이 수업은 보기와 달리 어렵지 않습니다'라는 감언이설을 외칠 수밖에 없는, 폐강이란 곤란한 일을 모면하기 위해 학생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이도 있다.  수도권 대학이 아닌 지방대학은 이미 수도권 대학에 비해 교육 수준을 한참이나 낮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격미달인  이들에게 모두 F를 주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은 수강인원 미달과 함께 찾아오는 폐강공지다.  자격미달의 학생들을 모두 자퇴시키고 나면 대학은 등록하는 학생들이 없어 학교를 운영하는 자금을 마련하지 못할 것이고 교수와 직원은 월급을 받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는 자격미달의 죽쟁이 들을 예수처럼 불에 태워버릴 수 없다.  


차라리 알곡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모든 대학이 어느 정도 알곡을 채워 이러한 알곡들이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고 스스로를 죽정이로 여기던 이들의 마음에 각성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도 팔자 좋은 교수처럼 지적변화를 위한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도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이란 알곡을 채우는 곳간이 아니라 죽정 이를 모아서 거름이라도 만드는 곳으로 대학을 바꾸는 일이다.  누구나 멋진 경기장에서 상대와 승부를 겨루고 싶어 하지만 부실한 기초로 승부를 겨루어도 늘 패배하게 되고 패배는 육체와 정신을 모두 쇠잔하게 만든다. 기초체력이 부실한 이들에게 승부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  억세게 운 좋은 소수의 성공신화에 기생하는 기만적인 시스템을 내려놓는 일이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시작의 첫 단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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