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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르 왕자 May 01. 2024

간절함만으로는 되지 않는 공부

공부는 운동이 아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학창 시절을 부산에서 보낸 덕에 박정태라는 선수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는 야구선수이고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으며 독특한 타격폼을 가진 선수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가 악바리로 불렸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승부근성이 뛰어난 선수라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시커멓게 그슬린 얼굴에 이미 땀방울이 흥건해도 배팅케이지에서 배트를 휘둘렀던 선수. 그는 그의 전성기 시절에 그렇게 악바리로 불리었다. 크지 않은 체구로 프로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가진 무기는 오기와 악바리 정신이었다.


그러나 승부를 펼치는 야구와 달리 상대를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되지 않는 일들 중에 공부가 있다. 일타강사 정승제는  "97%의 학생은 걱정만 할 뿐 (수학) 공부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책을 펴놓지만 책의 글귀가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누군가의 강의를 틀어놓았지만 내 귀에 들어와서 뇌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가거나, 초점 잃은 눈동자로 먼산을 응시하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뿐 누군가를 위해 쏟아낸 선생님의 열변은 게으른 자들이 만들어낸 만리장성을 넘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사실 일타강사를 가르치는 일타강사가 온 다 한들 게으른 자들이 쌓아 올린  만리장성을 넘기란 불가능하다. 공부란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어야 한다. 만약 타인이 내 마음을 조정하고 내 정신을 조정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누군가는 운동도 그러하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운동은 자신이 자신의 을 단련하는 일이다. 물론 당연히 이겨야 하는 상대가 있고, 단체전이라면 이겨야 하는 팀이 있다. 그 상대를 이겨야만 내가 원하는 시상대 맨 위에 올라갈 수 있기에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그 보다 더한 단련과 반복 훈련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몸이란 것은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눈으로 보이는 발전이 있다. 야구 방망이를 계속 휘두르면 손의 살이 벗겨지면서 피가 흐른다. 붕대를 감아도 마찰로 인해 피부가 벗겨지고 살이 쓰라린다. 이러한 고통은 너무나 실질적이어서 고통을 감내하면 할수록 자신의 몸도 단련되기 때문에 즉각적인 보상이 이루어진다. 반면 공부는 이겨야 할 상대가 없다. 내 옆자리, 혹은 내 학교의 누군가를 이기는 시험이 있으나 늘 시험은 다른 내용을 묻고 있고 그 끝은 알 수 없다. 하나의 시험을 치렀다고 늘 같은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다. 시험 치는 기술을 늘린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겠으나 하나의 시험 치는 기술을 다른 시험에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도 어렵다.

 


공부라는 것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다.  시험을 위주로 사람을 선발하는 사회에 살다 보니 이렇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러한 우리 사회를 '시험능력주의' 사회라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하고,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입사를 위해 공부를 하고, 졸업학점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을 위한 공부는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써 기능하기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단련의 과정만 있고 넘어야 하는 경계치가 존재하는 운동과 같은 일들이 되어 버린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시합이나 게임처럼 변해버린 우리 교육의 현장은 행복하지 못한 학생들과 늘 상대적 비교에 시달리는 스트레스에 지친 '선수'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운동과 공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불 켜진 스터디 카페에서 그들이 기대하고자 하는 바가 오로지 시험점수를 올리는 일에만 있다면 체육관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 땀 흘리는 운동선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공부,  이것은 마음을 일으켜 자신의 지식을 늘리는 일이고 모르던 것을 알고 깨달아 이로 인해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며 우리의 눈을 밝게 하는 일이다. 또한 어떤 하나의 분야에서 축적된 지식을 낱낱이 알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발견을 추가하는 일을 위한 기본기를 닦는 일이다. 광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고 목표지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사실 반복훈련은 아니다. 즉 시험을 잘 치기 위해 비슷한 유형의 문제들을 끝없이 풀어대는 단련은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는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시험이 우리의 중요한 삶의 순간들을 결정짓는 사회에서 당장 눈앞에 닥친 시험공부를 팽개치고 오늘 누군가에게서 소개받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통해 평범한 시민들이 나치주의에 동조한 독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자발적 '공부'를 행할 수 있는 간 큰 고등학생이 있다면 그는 비로소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모범생'이 말은 공부를 하는 데 있어 사실 필요 없는 겉치레다.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따라 끝없는 지적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유혹이다. 이러한 몰입의 경지에서 어떤 이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교양을 갖추지 못할 수도 있다. 수학계에서 매우 젊은 나이에 그 탁월한 수학적 탐구정신을 인정받아 필즈메달을 받은 UCLA 대학의 테렌스 타오는 운전면허가 없다. 그래서 늘 한국인 와이프가 그를 라이드 해준다. 운동에서 강조하는 삶의 루틴과 반복적인 훈련은 지식을 발견하는 데 있어 동반되는 자유분방한 탐구행위와 극단적으로 배치된다.  어린 시절 술래잡기를 하다 보면 때로는 아파트 전체동을 샅샅이 뒤지면서 숨은 아이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러다가 그들만의 아지트를 발견하기도 하고 새끼 고양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위험한 장면의 목격자가 되기도 한다. 과학에서도 발견이란 형식은 다를지언정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여러 어려운 시험들을 통과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쏟아붓는 노력을 한 이들이 가지는 자존감은 어떤 주어진 과업을 완성하는 데 있어 필요한 성실성과 인내력을 통해 드러남을 무시할 수 없다. 나의 대학선배와 동기, 후배들 중에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들이 많고 이들 중에는 분명 그들이 보유한 뛰어난 자질을 잘 살려 학문분야에서도 성공한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 해석의 오류일 수도 있다. 이들이 가진 스펙에 가려 이들이 가진 탐구정신과 지적 호기심을 발현시키는 자유로운 기질을 보지 못한다면 왜 많은 이들이 행정과 강의의 규범적 틀을 태생적으로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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