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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Aug 27. 2022

05 파도의 의도


그날 내 안에는 온통 슬픔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연거푸 잃었고

슬픔을 다스리려 떠난 여행지에서  

둘도 없는 친구의 부음까지 들었다.      


밤새 울다가 새벽녘 바닷가에 앉았는데   

파도가 거세게 들이닥쳐서  

여러 번 뒤로 물러나 앉았다.       


파도는 마치 날 쓰러뜨리려고 작정한 듯

무섭게 달려 들었다. 

‘이래도 버틸래? 이래도?’ 

마치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내가 파도를 피해 일어날 때마다 

저만치 앉아 있던 노인이 날 보며 웃었다. 

그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깊이 들이치는 파도도 닿지 않는 

가장 안전한 자리에 

처음부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파도가 어디까지 들이치는지 

왜 찬찬히 살피지 않았을까. 

나는 왜 늘 허둥댈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저 파도처럼 기어이 날 쓰러뜨리려는 

이 우주의 담합인 것 같아서

늘 준비 없이 허둥대는 내가 

그 담합에 결국은 무너질 것 같아서 

깊은 슬픔에 자책과 수치심마저 더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파도를 바라보다 

문득 깨닫게 된 사실, 

파도는 날 쓰러뜨리려고 달려드는 게 아니었다!      


설령 내가 저 앞에 앉아 있다 물벼락을 맞는다 해도  

그것은 파도의 의도가 아니었다. 

내가 파도의 의도를 잘못 읽었다.      


파도는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는데,  

그것이 파도의 의도였는데,

내 슬픔이 그 의도를 왜곡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파도가 파도의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큰 슬픔 속에서도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게 되리란 것을.      


생각 없이 저 앞에 앉았다가 파도에 흠뻑 젖더라도 

나의 삶은 그 파도에 녹아내리지 않으리란 것을.      


파도가 나에게 무심하고 스스로 견고하듯이, 

나의 삶도 나의 슬픔에 무심하고 스스로 견고하리란 것을.      


새벽 바닷가에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연이라는 원문의 진실과 대면한 순간, 

자연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천천히 나의 눈물이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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