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 안에는 온통 슬픔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연거푸 잃었고
슬픔을 다스리려 떠난 여행지에서
둘도 없는 친구의 부음까지 들었다.
밤새 울다가 새벽녘 바닷가에 앉았는데
파도가 거세게 들이닥쳐서
여러 번 뒤로 물러나 앉았다.
파도는 마치 날 쓰러뜨리려고 작정한 듯
무섭게 달려 들었다.
‘이래도 버틸래? 이래도?’
마치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내가 파도를 피해 일어날 때마다
저만치 앉아 있던 노인이 날 보며 웃었다.
그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깊이 들이치는 파도도 닿지 않는
가장 안전한 자리에
처음부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파도가 어디까지 들이치는지
왜 찬찬히 살피지 않았을까.
나는 왜 늘 허둥댈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저 파도처럼 기어이 날 쓰러뜨리려는
이 우주의 담합인 것 같아서
늘 준비 없이 허둥대는 내가
그 담합에 결국은 무너질 것 같아서
깊은 슬픔에 자책과 수치심마저 더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파도를 바라보다
문득 깨닫게 된 사실,
파도는 날 쓰러뜨리려고 달려드는 게 아니었다!
설령 내가 저 앞에 앉아 있다 물벼락을 맞는다 해도
그것은 파도의 의도가 아니었다.
내가 파도의 의도를 잘못 읽었다.
파도는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는데,
그것이 파도의 의도였는데,
내 슬픔이 그 의도를 왜곡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파도가 파도의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큰 슬픔 속에서도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게 되리란 것을.
생각 없이 저 앞에 앉았다가 파도에 흠뻑 젖더라도
나의 삶은 그 파도에 녹아내리지 않으리란 것을.
파도가 나에게 무심하고 스스로 견고하듯이,
나의 삶도 나의 슬픔에 무심하고 스스로 견고하리란 것을.
새벽 바닷가에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연이라는 원문의 진실과 대면한 순간,
자연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천천히 나의 눈물이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