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실밥 같은 것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모니터의 흰 바탕을 쳐다볼 때면 더 선명해진다. 흰 벽에도 있고 흰 천장에도 있다. 언제나 11시 방향에 떠 있는 미확인 비행물체는 수시로 나의 집중을 흐트러뜨리고 주의를 분산시킨다. 모니터 위에 떠 있는 실밥에 마우스를 갖다 대면, 마치 유령인 듯 마우스가 그것을 관통한다. 분명히 있는데 없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 옷에 붙은 실밥도 떼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인데, 보는 곳마다 유령 실밥이 있는데도 떼어낼 수가 없으니 갑갑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안과에 가서 열 가지 남짓한 검사를 받고 나서야 실밥을 닮은 티끌이 내 몸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 순간 나의 갑갑함은 열 배로 증폭되었다. 병명은 비문증. 내 몸 안에, 정확히 말하면 내 눈의 유리체 안에 떠다니는 부유물이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란다. 눈곱처럼 떼어낼 수도 없고 집게로 집어낼 수도 없으니 그저 적응하고 사는 수밖에 없단다. 나이가 들며 시력이 나빠지고 자주 건조해지고 흐릿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항상 눈앞에 떠다니는 실밥을 데리고 번역을 해야 한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게 적응이 된다고요?”
내가 물었더니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다들 적응하던데요?”
적응 안 하면 어쩔 거냐는 말로 들렸다.
의사의 장황한 설명 중에 유독 내 귀에 꽂힌 단어는 ‘유리체’와 ‘혼탁’이었다. 투명해야 할 유리체가 혼탁해져서 부유물이 생긴 거라는데, 과장하기 좋아하는 나의 우뇌가 나라는 인간의 영혼이 혼탁해졌다는 말로 그 말을 확대 해석한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비문증은 세 가지 측면에서 나를 불편하게 한다. 첫째, 50년 가까이 나의 유리체가 투명했는데 정작 투명했던 시간에는 내가 투명한 유리체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 둘째,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내 바깥세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셋째, 이렇게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병이라 그저 ‘내가’ 적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내 몸의 무언가가 사라지거나 혼탁해져서 무심한 나에게 존재를 부각할 수도 있다는 소린가. 내 밖에 있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이 사실은 내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건가. 이런 식으로 내가 ‘적응’해야만 하는 일들이 또 얼마나 있으려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유리체가 투명해서 참 좋다고 생각했던 적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 이상 투명하지 않으니 그게 참 좋은 거였다는 걸 알겠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말해주어야 할까.
“얘들아. 너희들 지금 눈앞에 실밥 같은 거 어른거리지 않지? 아주 깨끗하지? 그거 참 좋은 거야.”
아마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야만 아는 지혜는 나이가 들어야만 아는 것이고, 세월을, 나이를 월반할 순 없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내가 진단받은 가장 심각한 병이 아닌데도, 사실 이건 병 축에도 안 드는 병인데도, 비문증이 이토록 신경 쓰이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건, 나이 듦으로 인해 탁해지는 것이 비단 내 눈의 유리체 만은 아니라서일까. 내 몸의 일부인데도 나의 유리체를 맑고 깨끗하게 가꿀 수 없다면, 적어도 나의 유리체가 티 한 점 없이 투명하지 않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이게 남의 티끌이 아닌 '나의 티끌'이라는 의식정도는 하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내 유리체 안에 떠다니는 티끌이 남의 옷에 붙은 건 줄 알고 떼어주려 애쓰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