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쯤 되면 삶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 사건을 몇 가지 꼽을 수 있게 되는데, 룰루가 우리 집에 온 것은 그중에서도 단연 큰 사건이었다. 룰루의 등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룰루 이전의 삶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룰루는 2년 전 우리 집에 온 고양이다. ‘고양이’라고 룰루를 소개할 때마다, 나의 남편과 두 아이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나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든다. 우리 가족은 룰루가 고양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어쩌면 룰루도 그런 것 같다. 생후 두 달 만에 우리 집에 왔고 그 뒤로 다른 고양이 친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우리 가족의 가장 평화로운 풍경 모퉁이에는 언제나 룰루가 조그맣게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룰루는 가족이고, 평화의 사도이며, 우리 집안의 늦둥이 사랑둥이 막내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의 우주가 열리는 것처럼, 룰루를 만나 우리 가족은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었고 룰루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창피한 얘기지만 룰루를 만나기 이전에, 나는 참 무지하고 냉정했다. 적어도 동물들에게만큼은. 반려동물에 대해 함부로 말했고, 말하기 눈치 보일 땐 속으로 무식한 생각들을 했다. 사교성이나 친화력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였지만 대상은 인간 한정이었다. 반려 동물이 있는 집에 가면 불편했고, 길 가다가 만나는 반려 동물이 사랑스럽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환절기에는 어김없이 눈과 코가 말썽을 일으키는 알레르기 비염인으로써, 털이 난 동물과 같이 산다는 건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벌이었다.
어릴 때 단독주택에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강아지는 우리가 꽤 예뻐했는데도 어느 날 뒷산으로 도망쳤고, 고양이는 목에 감긴 줄도 모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당시 그들의 주 보호자는 나의 할머니였기 때문에, 끓인 우유를 가져다주곤 했던 게 나의 유일한 역할이자 교류였다. 마지막이 아름답지 않아서인지, 쫑과 야옹이에 대한 기억은 애틋하기보다는 쓸쓸했다. 나는 내가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래서 나보다 훨씬 더 동물을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반려묘를 데려오자고 얘기했을 때 때 무식하고 용감하게 반대했다.
“엄만 털 달린 동물은 절대 싫어.”
“엄만 인간 가족들을 돌보기도 벅차.”
“엄마의 사랑은 너희들에게 다 썼어. 사람이고 동물이고, 더 이상은 쏟아부을 애정이 남아 있지 않아.”
이게 다 내가 실제로 뱉은 말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가 항복했고 그렇게 해서 룰루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집안에 동물이 돌아다니는 건 싫지만... 집안에서 고양이 털 날리는 것도 싫지만 그건 엄마가 양보할 테니 나머진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해.”
"엄만 고양이 절대 안 만진다.”
“엄마 일 할 땐 방문 닫고 할 거야.”
내가 한 말들은 지금도 나의 굴욕사로 영구 박제되어 집안을 떠돈다. 우리의 희고 작고 보드라운 천사는 내가 확신을 갖고 했던 모든 말들을 단 일주일 만에 헛소리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알지 못했다.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 된 아기 고양이가 인간에게 사랑받기 위한 모든 기술을 알고 있을 줄은.
이 사랑스러운 녀석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린 순간, 나는 숙련된 번역가답게, 난이도 최상의 소설을 번역하는 마음으로, 룰루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야옹’ 한 마디로 모든 걸 해결하는 이 경제적인 녀석은 엄청난 존재감으로 자신의 표정과 소리에 온 가족이 집중하게 만든다.
‘야옹!’
“룰루 배고파?
“야옹!”
“룰루 심심하구나!”
“야옹!”
“룰루 창문 열어줄까?”
“야옹!”
“룰루 밥이 눅눅해져서 맛이 없어?”
“야옹!”
“강아지풀 들고 엄마가 뛰어가면 룰루도 같이 뛰어가다가 점프하는 그 놀이하고 싶구나!"
나는 깨달았다. 사랑할 때 우리는 번역한다는 걸.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대서양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막막하기도 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해도 눈빛 몸짓만으로 마음이 통하기도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껏 말을 알아듣고도 당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사랑하면 침묵이 흘러도 마음이 감응하고 몸이 움직인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열심히 번역한다. 그래서 룰루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은, 하루 종일 룰루의 눈빛과 몸짓과 표정과 소리와 꼬리를 열심히 부지런히, 지칠 줄 모르고 번역한다.
룰루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은 룰루가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림처럼 예쁘게. 가족 중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룰루는 두 사람과 자신을 삼각형으로 연결하는 지점에 앉아 조용히 기다린다. 아이들이 잠들면 창틀에 앉아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과제를 할 때면 침대에 앉아 기다린다.
물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내 키보드 자판 위에 가로로 드러누워 적극적으로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고 한 밤중에 가족을 깨워 자기가 얼마나 예쁘게 밥을 먹는지 봐달라고 하기도 한다. 이유를 막론하고 수면을 방해한 자는 살벌한 응징을 당하는 우리 집에서 룰루는 큰 소리로 야옹거리며 가족들 잠을 깨우고 돌아다녀도 유일하게 미움받지 않는 면책특권 자다.
“엄마, 룰루 젤리가 너무 차가워. 혹시 젤리 냉증 아닐까?”
“엄마, 만약 우리 집에 불이 나면, 난 룰루만 안고 얼른 뛰어나갈 거야.”
“엄마, 혹시 룰루도 산책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아닐까? 그런데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룰루의 제1보호자인 딸아이가 진지하게 하는 말들이다. 그렇다. 우린 좀 심하다. 우리 가족의 유난스러운 룰루 사랑을 보고 나의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니 애들은 곧잘 키우는 것 같더니, 룰루는 아주 베려놨구나.”
인정한다. 그리고 괜찮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너무 사랑받아서 응석받이가 된 아기 고양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어차피 룰루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고, 낯선 사람이 오면 사회생활은 커녕 소파 뒤에 숨기 바쁘다. 설령 우리가 좀 베려놨어도, 룰루가 다른 고양이나 인간에게 해를 끼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룰루에겐 우리 가족이 우주일 텐데, 우리보다 짧은 삶을 살다갈 룰루에게 오직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고 싶다.
룰루는 우리 가족의 가장 여리고 다정한 모습을 끌어내 주었다. 고등학생 아들과 룰루가 침대에 마주 보고 누워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볼 때면, 저 녀석의 저 그윽한 눈빛이 대체 그동안 어디 숨어있었는지 궁금하다. 룰루에게 보여준다며 눈 오는 날 조그만 눈사람을 만들어 룰루 앞에 놓아주는 대학생 딸을 보면 자식 키우는 부모의 심정을 벌써 아는 것 같다. 단톡방에 종일 룰루의 동향이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우리 막내 뭐하냐고 궁금해하는 남편도 영락없이 늦둥이를 보고 한없이 신기해하는 중년 아저씨다. ‘정보’를 공유하던 가족 단톡방은 ‘사랑’을 공유하는 단톡방이 되었다. 우리의 이 지극한 사랑은 룰루가 꺼냈고, 룰루가 오지 않았더라면 이 사랑은 영영 묻혔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니. 가끔은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에게 묻고 싶다. 대체 그런 사랑이 대체 어디 숨어 있었냐고.
날씨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창밖으로 새들이 날아가고 저 어딘가에서 강아지 소리가 들려올 때, 너무도 익숙한 일상인데도 룰루에게 이 모든 변화와 소리가 어떻게 느껴질지, 룰루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이 어떤 곳일지, 룰루에게 우리 집은 어떤 곳일지, 룰루에게 우리 가족이 어떤 사람들 일지, 우리는 늘 생각한다. 우리는 룰루의 눈으로 세상을 새로 본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게 바로 사랑이란 걸.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 내가 그를 몰라서일 것이다. 룰루를 알지 못했을 때 사랑하지 않았고, 룰루를 알고 난 뒤에는 사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사랑하기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 것. 함부로 나를 단정하지 말 것. 절대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 것.
룰루를 통해 배운 것들이다.
때로 나는 내가 평생 이해하지 못했던 그 사람이 되고, 오랜 시간 한치의 의심없이 믿었던 것들이 거짓이 된다.
그리고 그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