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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Ch Kim 김현철 Aug 01. 2022

캐번디시-빈 전쟁 2

빈 라듐 연구소 

요아힘슈탈의 피치블렌드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유럽에서 방사선 연구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을 꼽으라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체코의 땅이 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보헤미아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작은 도시 요하힘슈탈(St. Jachimsthal)에는 큰 은광이 있었다. 은광은 아주 오래전에 개발되었다. 1516년, 독일 파사우의 백작이었던 슈테판 쉴릭은 이곳에 있는 은광을 찾아냈다. 여기서 나오는 은은 순도가 무척 높았다. 그래서 이 은으로 은화를 주조해서 화폐로 썼는데, 순도 높은 은화로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다. 이 은화는 처음에 요아힘슈탈러라고 불리다가 줄여서 탈러로 불렸다. 그리고 이 탈러는 오늘날 여러 국가에서 쓰는 화폐의 단위인 달러로 굳어졌다.      

이 요아힘슈탈 은광에는 은 외에도 거무튀튀한 바위도 있었다. 광부들은 이 거무튀튀한 바위를 몹시 싫어했다. 이 바위가 보이기 시작하면, 산출되는 은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이 바위가 뭔지 몰라 광부들은 이걸 캐서 광산 밖에 버렸다. 처음에 이 바위는 페히블렌트(Pechblend)라고 불렸는데, 이 말에는 검다는 뜻도 있었지만, “재수 없는 불순물”이라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이 바위가 바로 피치블렌드 또는 역청 우란광이라고 불리는 광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역청 우란광의 절반은 산화우라늄이었고 나머지 절반에는 구리, 비스무트나 바륨이 함유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마리 퀴리가 발견하게 될 라듐도 아주 미량 들어있었다.      

이 역청 우란광에서 우라늄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독일 화학자 마르틴 클라프로트(Martin Heinrich Klaproth)였다. 그는 1789년에 이 새롭게 발견한 물질에 우라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우라늄은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원소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물질이었다. 이 우라늄이라는 이름은 1781년, 윌리엄 허셜이 발견한 목성(Uranus)에서 따왔다. 우라노스(Uranus), 고대 그리스 시대에 하늘의 신이었고,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티탄족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니 가장 무거운 원소의 이름으로 우라늄은 안성맞춤이었다. 훗날 버클리 방사 연구소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인 넵투늄과 플루토늄은 각각 해왕성(Neptune)과 명왕성(Pluto)에서 따왔으니, 행성의 이름에서 원소의 이름을 따온 건 화학자 클라프로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요아힘슈탈에 버려진 피치블렌드 덕이었다. 우라늄은 도자기나 유리에 노란색을 입히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므로 피치블렌드도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우라늄을 뽑아낸 뒤에 버려진 피치블렌드는 요하임슈탈에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마리 퀴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가 이 피치블렌드를 프랑스로 가져가겠다고 했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빈의 과학원 원장 에두아르트 쥐스였다. 그리고 피에르 퀴리는 금융업으로 유럽에서도 손꼽는 자산가였던 앙리 드 로쉴드 남작의 도움을 받아 23톤이 넘는 피치블렌드를 당시 돈으로 만 삼천 프랑을 지불하고 마리 퀴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이 안에는 대략 12그램의 라듐이 들어있었는데, 이 라듐의 가격은 칠백만 프랑에 이르렀다. 1898년 말,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뒤에 요아힘슈탈은 더는 은광의 도시가 아니라 라듐의 도시로 거듭났다. 그곳에 있는 호텔과 여관 이름에도 라듐이 들어갔고, 나중에는 라돈을 뜻하는 에마나치온(Emanation: 방사 기체)이라는 이름의 여관도 생겼다. 그러나 이 단어의 뜻을 몰랐던 그 여관 주인은 신문에 광고를 낼 땐 “모방”을 뜻하는 이미타치온(Imitation)이라고 단어를 잘못 썼다.      


슈테판 마이어

사람들은 마리 퀴리가 처음으로 라듐을 발견하였을 때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신기한 물질에 열광했다. 그것으로 옷을 치장하고, 화장품을 만들고, 물에 타 마시는 엽기적인 행동마저 보일 정도로 라듐은 보통 사람들에게 마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에게 이 푸르스름한 빛은 원자 저 깊숙한 곳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 들어있음을 암시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까지 원자는 여전히 생소하고 거부감마저 일으키는 단어였다. 마리 퀴리는 그 원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고, 러더퍼드는 용감하게 원자 안으로 들어가는 길로 뛰어들었다. 이 원자를 두고 논쟁이 가장 뜨겁게 벌어진 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 빈이었다. 빈 대학교에 있던 에른스트 마흐는 원자론을 주장하던 루트비히 볼츠만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는 빈을 중심으로 일어난 논리실증주의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았다. 과학에 스며든 형이상학을 경멸하였다.      

슈테판 마이어

볼츠만의 원자론을 지지한 사람들은 몇 안 되는 젊은 물리학자들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슈테판 마이어도 있었다. 그는 훗날 학문의 친구가 될 어니스트 러더퍼드보다 일 년 늦은 1872년에 빈의 부유한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삼대에 걸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의 주치의였다. 그의 아버지는 법학박사이자 변호사였고, 문학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빈 브람스 학회의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종종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마이어는 이런 집안 분위기 덕에 어려서부터 문학과 음악을 접하며 자랐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에 일 년 동안 포병 장교로 근무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그는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교육받았고, 빈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빈 대학교에서 프란츠 엑스너의 지도를 받으며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1896년에 박사학위를 마친 마이어는 빈 대학교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이끄는 볼츠만의 조수가 되었다. 볼츠만은 물질의 자기적 성질을 연구하려고 당시로서는 자기장의 세기가 무척 큰 전자석을 마련했는데, 마이어도 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다. 1896년에 앙리 베크렐이 방사선을 발견하였지만,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 방사선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은 마리 퀴리가 발견한 라듐과 방사선에 깊은 관심이 있었는데, 독일 화학자 프리드리히 기젤이 그중 한 명이었다.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젤은 좀 더 쉬운 방법으로 라듐을 우라늄 원석에서 추출하였다. 


마이어가 처음부터 이 방사선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1899년 9월, 뮌헨에서 자연과학자와 의사들을 위한 학회가 열렸는데, 볼츠만도 여기서 이론물리학의 발전에 대해 발표했다. 마이어는 볼츠만의 발표를 듣기 위해 이 학회에 참석했는데, 정작 그의 관심을 끈 건, 독일 화학자 기젤의 발표였다. 기젤은 청중들 앞에서 라듐과 폴로늄으로 직접 실험을 시연했다. 마이어에게 이 실험은 마치 계시처럼 다가왔다. 그는 비로소 평생 몰두할 주제를 기젤의 실험에서 찾았다. 그 학회에서 마이어는 기젤에게서 당시로서는 구하기 몹시 어려운 라듐을 소량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빈으로 돌아와 친구였던 에곤 폰 슈바이들러와 라듐과 폴로늄의 자기적 성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물질의 자기적 성질에 관심이 있었으니 라듐의 자기적 성질을 가장 먼저 연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라듐에 자기장을 걸어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작 발견한 건,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이 강한 자기장 아래서 휜다는 사실이었다.      

방사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 이 중에서 알파선은 양의 전하를 띠고 있고, 베타선은 음의 전하를 띠고 있다. 그리고 감마선은 그 이듬해인 1900년에 프랑스 물리학자 폴 빌라르가 발견했는데, 알파선과 베타선과 달리 자기장의 영향을 받지 않고, 투과력이 엄청난 방사선이다. 라듐은 대부분 라듐-226으로 이뤄져 있지만, 거기에는 라듐-228도 미량 들어있었다. 라듐-228에서는 베타선이 나왔다. 전자로 이뤄진 베타선은 자기장을 받으면 쉽게 휘었지만, 전자보다 훨씬 무거운 헬륨 핵인 알파선이 휘는 걸 보려면 아주 강한 자기장을 걸어줘야만 했다. 마이어와 슈바이들러는 베타선이 자기장 아래서 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내었다. 마이어는 이 실험 이후에 방사선 연구에 평생을 바칠 마음을 먹었다. 이후로 마이어는 슈바이들러와 방사선 연구를 계속했고, 약간 늦었지만 마리 퀴리와 러더퍼드에 이어 방사선 연구에서 뛰어난 물리학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마이어는 빈 과학원의 요청을 받아 피치블렌드에서 라듐을 추출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 당시 유럽에서 라듐을 추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요하임슈탈에 버려진 피치블렌드에서 마리 퀴리가 라듐을 추출해냈으니 방법만 안다면 라듐을 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퀴리 부부는 라듐을 추출하는 방법을 특허로 출원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개했다. 두 사람에게는 과학의 발견은 누구나 공평하게 누려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에는 그 일을 정말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화학자이자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던 카를 아우어 폰 벨스바흐는 희귀 금속을 찾는 연구에 독보적인 재주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공로로 1901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주는 남작 작위를 받을 정도였다. 마이어의 부탁을 받은 폰 벨스바흐는 라듐을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해낼 방법을 고안했다. 독일에서는 이미 1899년부터 라듐을 생산해내는 공장이 하노버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1901년에는 기젤의 도움을 받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라듐을 추출하고 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폰 벨스바흐도 빈 근처의 공장을 세워 1904년부터 1907년까지 4 그램의 라듐을 얻을 수 있었다.      

방사선은 볼츠만의 원자론이 옳다는 걸 증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3년 어느 날, 마이어는 볼츠만을 대적했던 마흐를 만나 원자론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마흐가 물었다.

“그래, 원자를 하나라도 보았어요?”

마이어는 곧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마흐 앞에서 라듐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형광판에 가서 닿으며 불꽃을 일으키는 걸 보여주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본 후에 마흐가 한숨지으며 마이어에게 말했다. 

“이제 원자가 존재한다는 걸 믿겠군.”

이제 원자는 그저 믿지 못할 가설이 아니라 실재였다.      

그러나 우울증이 점점 심해진 볼츠만은 1906년 9월 초에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두이노로 휴가를 떠났는데 가족들이 해변으로 놀러 간 사이에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07년, 마이어는 볼츠만의 뒤를 이어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맡았고, 그 이듬해 빈 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다.    

  

빈 라듐 연구소

요아힘슈탈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라듐 연구에서 프랑스와 독일에 늘 한 발 뒤처졌다. 이런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있었다. 라듐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빈에도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정작 과학자가 아니라 변호사였던 카를 쿠펠비저였다. 그는 빈 과학원 원장인 에두아르트 쥐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돈을 기부할 테니 라듐 연구를 위한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저는 오스트리아가 자연에 남아 있는 가장 위대한 보물의 하나인 우라늄 피치블렌드 광물을 과학적으로 사용하는 데 소홀히 할지도 모른다는 게 걱정스럽습니다. 그 산물인 라듐에서 수수께끼 같은 방사선이 나오는 게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로 저는 이미 라듐에 사로잡혔습니다…. (중략)

힘이 닿는 한 우리 조국에 자연이 특권으로 제공한 과학적 탐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부의 절차가 좀 번거롭고 상황이 정말 긴급하니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최소한 그 길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도,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도, 덴마크의 닐스 보어 연구소도 정부에서 지은 연구소가 아니라 모두 개인이나 사업가가 세운 연구소였다. 오스트리아의 빈 라듐 연구소도 한 개인의 기부금으로 세워졌다. 쿠펠비저는 빈 라듐 연구소를 지으라고 그 당시로는 엄청난 액수인 500,000 크로네를 선뜻 내놓았다. 연구소를 짓는 일은 프란츠 엑스너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한 사람은 마이어였다. 연구소는 1910년 10월 28일에 정식으로 개소하였다. 초대 연구소 소장은 프란츠 엑스너가 맡았지만, 소장 역할을 한 사람도 슈테판 마이어였다. 연구소가 세워진 지 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연구소에 버금갈 만큼 방사선 연구에서 널리 이름을 알렸다. 마이어는 1910년부터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날까지 28년 동안 빈 라듐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서 연구소를 이끌었다. 오늘날 이 연구소는 여전히 빈 대학교에 있고 2004년 슈테판 마이어 아원자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러더퍼드와 마이어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슈테판 마이어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러더퍼드는 뉴질랜드 촌구석의 작은 항구 도시인 넬슨 출신이고 마이어는 유럽의 중심지였던 빈 출신이었다. 러더퍼드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마이어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변호사였다. 자라난 배경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학문적 동지 관계를 넘어서 친구가 되었다. 마이어는 1907년에 맨체스터에 있던 연구에 쓰라고 브롬화 라듐 300밀리그램(라듐 175밀리그램)을 러더퍼드에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 라듐은 케임브리지대의 윌리엄 램지와 같이 쓰는 걸로 되어있어서 러더퍼드와 램지 사이에 다툼이 일었다. 그래서 마이어는 그 이듬해에 다시 염화 라듐 400밀리그램(라듐 296밀리그램)을 러더퍼드에게만 따로 보냈다. 마이어가 아니었다면, 러더퍼드는 방사선 연구를 계속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라듐을 이용해서 가이거와 마스덴이 1909년에 핵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실험을 하였으니, 마이어가 보내준 라듐이야말로 핵물리학이라는 학문이 태어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때만 해도 마이어는 이 라듐이 훗날 마이어에게 되돌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망가져 버린 오스트리아에서 연구의 명맥을 이어가던 라듐 연구소의 숨통을 트게 된 것은 옛정을 잊지 않고 러더퍼드가 마이어에게 다시 라듐을 보내줬기 때문이었다. 러더퍼드에게 보냈던 라듐은 전쟁 후 라듐 연구소를 되살릴 불씨가 되어 마이어에게 되돌아왔다.     

러더퍼드와 마이어는 자라난 배경만큼이나 연구소를 이끄는 방식도 달랐다. 러더퍼드는 목표 중심적이었고, 연구 주제마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뉴질랜드 원주민의 하카춤을 떠올릴 만큼 힘이 넘쳤다. 아침 열 시가 되면 찬송가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흥얼거리며 어김없이 연구실에 나타나 동료들과 학생들이 하는 연구를 챙기곤 했다. 연구소의 이름으로 나가는 논문은 반드시 러더퍼드가 읽은 뒤에야 투고할 수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존경받았다.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이 된 뒤에는 “캐번디시 정신”이라고 부를 만큼 독특한 연구 문화를 만들어냈다. 연구에 필요한 장비는 모두 직접 만들어야 했고, 학생들도 당대의 중요한 물리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반면에 마이어가 이끄는 빈 라듐 연구소에는 온화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마이어는 늘 학생들과 동료들을 따뜻하게 대했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커갈 때까지 잘 참아주는 선생이었다. 그는 여학생들이 계속해서 물리학을 연구하도록 격려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라듐 연구소에는 여학생이 많았다. 한때는 여학생의 수가 전체 학생의 40%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건 마리 퀴리가 방사선에서 보인 업적 덕이기도 했지만, 마이어의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동료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그들이 하는 연구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연구 결과를 논문집에 출판하기 전에 빈 과학원에서 발표해야 한다는 조건 외에 빈 라듐 연구소에서 하는 모든 연구는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러더퍼드가 1904년에 <방사능>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방사선물리학의 발전을 이끌었다면, 마이어는 1916년에 친구 폰 슈바이들러와 함께 500쪽이 훌쩍 넘는 책, <방사선(Radioactivität)>을 출간하면서 방사선물리학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로 우뚝 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빈 라듐 연구소도 오스트리아를 덮친 인플레이션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곳 연구원들은 하루하루 끼니 걱정부터 해야 할 정도였으니, 논문이나 책을 사볼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한때는 러더퍼드에게 라듐을 보내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지만, 이제는 실험에 필요한 라듐도 없었다. 마이어는 러더퍼드에게 편지를 보내 라듐을 좀 얻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 정부는 라듐을 한때 적이었던 오스트리아로 방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러더퍼드는 자신이 오스트리아로 보내야 할 라듐은 몇 년 전에 오스트리아로부터 받은 개인적인 빚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큰돈을 들여 라듐 20 밀리그램을 사서 마이어에게 보냈다. 게다가 러더퍼드는 네이처와 같은 논문도 마이어에게 보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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