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를 읽고
처음 읽었을 때는 느낀 점이 너무 많아서 기록을 미루었다. 그리고 우연히 오늘 다시 책장을 넘기다 오늘의 깨달음은 기록을 하고 싶어 급하게 글을 남긴다.
이 책은 멋진 여행지의 사진들이 많이 포함이 되어 있음에도 그 풍경들 보다 작가의 솔직한 심정에 눈이 더 간다. 그래서 '여행 뽐뿌'를 일으키는 '멋진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써진 책'이 아니라, 어린 날의 경험을 통해 삶의 지혜를 깨달은 일종의 모험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행한 지역을 기준으로 나열된 목차를 본다면 여행지들이 누구나 갈법한 흔한 곳들은 아니어서 '특별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경험'을 말하려는걸까, 하는 의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그곳의 풍경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그가 서술하는 중심은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과 그리면서 발생하는 주변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로 인한 고찰에 있다.
작가는 스케치북에 여행지를,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그린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보고 말을 붙이는 것을 시작으로 작가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고 숙소 주인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벽화를 남긴다. 그의 벽화는 보는 사람들과의 소통의 장이 되기도 한다.
그림이라는 매개가 아니어도 그는 직접 사람들의 삶에 흘러드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여행지의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 나누어 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려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린다. 어떤 때에는 우연히 대화를 나눈 다른 여행자에 의해 여행지에 대한 시선을 바꾸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받은 도움을 떠올리며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것을 나눈다.
물론 이런 경험들은 여행지라서 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사실 어느 곳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이 경험들이 특별해지는 이유는 늘상 머무는 곳이 아닌 낯선 공간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이-푸 투안의 '장소'를 떠올렸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개인이 경험을 함으로써 공간이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작가의 경험으로 적용을 하자면 여행객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던 그저 공간이었던 동네가 어느 아이의 사진을 찍은 경험으로 장소가 되고,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아이에게 사진을 전해주고자 다시 그 곳을 찾아가게 되는 그 특별한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장소애(愛)가 강화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아니어도 장소애는 발생할 수 있다.
이 책의 하노이에서의 에피소드 제목은 "겸손하게 여행하세요"이다. 현지에서 만나 여행에 도움을 준 분이 작가에게 전한 조언이자 응원의 메세지인데, 해당 지역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여행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서 그 순간에 대한 행복함을 잃을 뻔 했던 작가에게 '늘 처음인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여행에 임한다면 그 행복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 소중한 메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작가가 기록하는 하노이의 제목은 "겸손하게 여행하세요"가 되었다. 그 깨달음이 그에게 장소에 의미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겸손한 여행"은 이 책을 관통하는 개념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곳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는 이 마음 가짐은 작가가 다른 장소를 대하는 생각에도 묻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 없이 여행하는 지역을 바라보고, 그의 여행기를 읽는 독자인 나의 삶에도 공감이 되는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낯선 곳에 대한 겸손한 마음은 일상에도 매우 중요하다. 일상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는 간혹 보통의 소중함을 망각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는 하는데, 여행지에서 새로움을 받아들이듯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겸손해진다면 조금 마음이 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은 매 순간이 다른 곳이다. 가시적인 변화가 없을 수는 있지만 시공간의 개념으로 보면 사실 단 1초도 같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가 들면서 공간이 가진 색이 달라지고, 대류현상으로 먼지의 위치가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하는 '나' 자신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고 있다. 신진대사에 의해, 그리고 필연적인 노화에 의해 신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은 새로운 시공간이다. 매 순간을 처음 경험한다고 생각하면 삶이 쉬울 수는 없는 것도 받아들이기가 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데에도 겸손한 여행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 순간의 내가 처음인 만큼 내 공간에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장소애는 꼭 여행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미 몸으로 인지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누구에게나 주요 장소일 것이고, 그저 너무 익숙해서 평소에 장소애를 느끼지 못할 뿐일 것이다.
그럴 때 여행기를 통해 누군가의 장소를 간접경험하면, 특히 이야기 속에서 '특별한 곳에서의 평범한 삶의 단편을 발견할 때' 내가 일상에서 누리는 작고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행복은 내 삶에 머물 힘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소개글에 적힌 "당장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란 구절은 이 책을 다 설명하기에 아쉬운 느낌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사람들은 머물기 위해 떠나는 이야기를 찾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전하는 내용은 떠나려는 사람에게도, 머물러야 하는 사람에게도 유익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덧붙임
대학원에 입학 후 한동안 연구실도 못 정하고 방황할 때 처음 읽었었다. 그리고 이제 졸업 논문 주제를 찾는 두번째 방황에서 다시 책을 열었다. 연구 주제를 정하는 데에 웬 여행책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책의 작가가 나와 같은 나이일때 썼다는 이 책은 가까운 인생 선배가 조언을 전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열어본다.
책 원문을 보면 내가 쓴 글에서 언급한 에피소드 외에도 인상깊은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나 취준생의 마음, 남들과 다르게 흐르는 인생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드러나서 삶의 나침반이 필요할 때 한번씩 꺼내 읽어보고 있다. 의외의 부분에서 깨달음을 주는 책인 만큼 왠지 두번째(혹은 세번째.. 네번째.. n번째..) 사춘기를 겪는 어른이 친구들에게 읽기를 매우 권장한다.
며칠 뒤에 이 글을 다시 읽으면 창피해서 지우고 싶어질 것 같지만, 그렇게 또 차일피일 미루면 서랍에만 있을 것 같다. 마음 먹었을 때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 용기 내어 발행 버튼을 눌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