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혼여성 중 결혼, 임신 및 출산, 자녀 교육, 가족 돌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비취업 여성을 경력단절 여성이라 부른다. 흔히 줄여 ‘경단녀’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커리어를 포기한 여성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비하적 의미도 내포한다. 내가 일과 학업을 쉰다 하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튀어나오는 자동반사 반응이 있다.
아깝다
일은 언제 시작하게?
공부 더 해야지
나도 가끔은 유학까지 다녀와서 주부로 사는 이 삶이 맞나? 불안하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제적, 직업적 성취보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가치 있다 판단해 내린 결정이었다.
심리학자 볼비에 의하면, 유아와 양육자 사이의 초기 관계의 질을 뜻하는 ‘애착 형성’이 가장 중요하며, 생후 1년 동안 양육자와 애착 관계를 형성한 유아는 세상을 탐색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한 방송에서 오은영 박사는 ‘만 12개월부터 3세까지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성인이 되어서도 중요한 대인관계에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이처럼 한 인간의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를 놓쳐버리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다른 전공이었으면 몰라도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심리학 전공생은 엄마의 본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작년만 해도 심리학과 대학원생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목표였다. ‘엄마와 학생’ 그 어떤 것도 내려놓을 줄 몰랐기에 체력은 고갈되었고, 신체적 체력보다 더 힘들었던 건 나의 멘탈이었다. 수업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수많은 풍경이 날 곤란케 했다. 하원차량에서 내리며 짓는 아이의 함박웃음, 엄마가 해준 요리에 엄지 척을 날리는 손가락, 자기 전 나란히 누워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들. 그런 것들을 그리워할수록 아이는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는 주양육자에서 멀어져 갔다. 아이의 교육도 점차 할머니의 선택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책임은 억울하게도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가 왜 아이 숙제를 안 시키냐,” ‘피아노 연습을 안 시키니 진도가 느리다!”
그냥 뱉은 몇 마디 말들이 시퍼런 칼날로 날아와 가슴에 쓰리게 꽂혔다. 파이널 전날 내 공부대신 아이공부를 봐주고 밤을 새웠고, 어린 둘째가 열이라도 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학교에선 조교로 일하며 다른 싱글 학생들처럼 맡은 발표와 업무, 교수님 잡일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엄마의 현실이다. 슈퍼바이저가 감시하는 반쪽자리 엄마의 삶이었지만 급할 때 아이 맡길 어른이라도 있지, 주변 독박 워킹맘들의 삶은 더 치열하고 고달파 보였다.
경기도 외각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 반을 뚫고 출근해 녹초가 되어 아이를 픽업하는 게 일상이다. 아이가 아프면 눈칫밥과 죄책감 등의 온갖 감정이 그녀들을 갉아먹었을 테다. 결국 전업주부로 돌아온 그녀들은 그간 참아왔던 감정을 토해내느라 몇 달을 힘들어하더니 이내 평온을 찾았다. 물론 몇몇 지인의 경험이 일반화될 수 없고, 개인의 사정과 여건은 제각각일 테지만 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엄마 군상(群像)이 있다. 다둥이를 혼자 키우며 일과 박사를 척척 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전업주부가 천직인 이도 있다. 출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전자일 줄 알았는데, 육아를 하고 여러 변수를 만나면서 알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엄마인지. 일과 학업을 내려놓고서야 내 자리를 실감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책임을 지고 살았던 걸까. 사람이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 있음에 놀랐고, 아이들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중에 커리어를 원하면 부딪혀 볼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자리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자는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했다면 앞만 보고 달려가길 바란다. 옷도 직접 입어봐야 내옷임을 알 듯이, 직접 경험해봐야 내 자리를 아알지 않을까? 다만 경단녀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대해, 되려 묻고 싶다.
왜 경단녀를 짠하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는가?
왜 경단녀가 재취업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가?
최근 개인의 우선순위에 따라 자발적 경력단절을 외치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취직은 축하하면서 경력단절(육아를 선택하는 삶)은 축하는커녕 응원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경제적 가치를 거스르는 일이라서? 삶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법.
나는 커리어 대신 육아를 선택한 수많은 여성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자발적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건 하나의 우주를 돌보는 일’이란다. 육아도 하나의 경력으로 인정받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