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르미 Oct 28. 2022

영화 에세이,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보고 나서

맹목적인 게 마냥 나쁘진 않는 듯해

처음에는 피터 파커(톰 홀랜드)의 선택이 되게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입장과 같았다. 그들은 이미 악당이 되어 무고한 피해를 입히고 생을 마감한 것이 현실이며 그건 운명일 뿐이라고, 모든 죽음에 동정심을 내세우기보다 불가피하게 다가올 선택의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은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와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는 꼰대인 걸까. 물론 꼰대를 어디까지 정의하냐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꽤나 넓은 범의로 정의를 내리기 때문에, 닥터 스트레인지도 나도 어쩌면 꼰대이다. 현실을 건드리지 않고, 동시에 불가피한 위험에 뛰어들지 않는, 최대한 냉소적인 것처럼 살지만 결국은 겁이 많은 것일 뿐이었던 꼰대 말이다.


고등학교 때 나루토를 동경했던 이유를 어느새 잊어버린 것 같다. 나루토가 페인 하고 싸울 때 했던 말을 가슴속에 항상 새기며 살자고 다짐했었다. 20대 중반을 넘어서 계속 살아가다 보니 내가 지나온 길에 나루토 같은 사람은 정말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려서 그런 걸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망도 이젠 꺾여버린 걸까.


누군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것 자체에 대해 나 스스로 거부감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 누구보다 그런 방면에서는 유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조금 불편했던 걸 보면 실제 내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니,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전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나왔던 악당들이 누군가에게 줬을 피해를 생각하니 그들의 죽음에 동정심보단 평정심을 얻었다. 스파이더맨의 악당들의 죽음은 그저 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영화 <괴물>을 보고 마지막에 괴물이 죽을 때 괴물은 엄마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냥 태어난 것일 뿐일 텐데 괴물이 불쌍하다며 울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젠 점점 옅어져 가는 걸까. 아예 사라져 버린 걸까.


스파이더맨에 등장했던 악당들은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로 "인간의 무구한 가능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사람이다. 악당에게 '희생'이라니 꽤나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악당이 아닌 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편리함을 맹목적으로 쫓다가 그 사이에 끼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본다면 '희생'이란 단어가 그렇게 어색하게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기 장어 수조에 실수로 떨어져 버리고 입자 가속기에 떨어져 버리는 등등. 인간과 세상을 위해서 앞서가는 과학에서 시작된 끝이 없는 실험과 허공의 빛을 좇는 용감한 도전은 결국 누군가에겐 꼭 불운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대의를 위해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겐 곧 희생'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만 받아들여진다. 가장 위대한 가치가 '생명'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메이가 그렇게 말하고자 했던 '도덕'과 '동정심'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생명이 경시되는 그런 상황들을 종종 마주할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썩은 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아무런 저항도, 반대의 목소리도 내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도 결국 같은 배에 탄 인간임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은 이젠 정말 모르겠고, 그냥 피터 파커(톰 홀랜드)의 맹목적인 인류애가 부러웠고 멋있었다. 맹목적인 게 마냥 나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상상과 동시에 사소한 가능성에서도 진실한 눈빛을 찾아내는 능력에 대한 동경심이 일어났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에세이, <네버 렛 미 고>를 보고 나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