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르미 Oct 28. 2022

4화. 우리는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우울증과 성인 ADHD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날까지 - [정신독립일기]

4화.  성인 ADHD, "우리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할 뿐,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23살 때, 처음으로 성인 ADHD와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나는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부족했을 수도 산만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나에 대해 유독 가혹했다.


ADHD는 실패와 좌절에 익숙하다. 조금은 느릴 수밖에 없고,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는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경쟁과 평가 사이에서 실패감과 열등감에 익숙한 편이다. 유치원에서도 <누가 제일 먼저 밥을 빨리 먹을래>의 경쟁 속에서 늦게 먹는 아이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 카드에 그려진 빈 사과 10개를 채우기 위한 평가에서 '저는 3개의 사과만 채우면 안 될까요?'라는 질문 자체는 불가능해진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건, 곡을 10번 쳐서 10개의 빈 사과를 채우는 거였으니까. 나는 보통의 10번도 못 하는 아이, 밥을 천천히 먹거나 콩 반찬을 남겨서 손 들고 벌을 서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자라면서 겪었던 '성장을 위한 경쟁과 평가'는 우리의 것에 비하면 느슨한 편이었다. 경쟁과 평가보단 '책임과 희생'을 더 많이 요구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에겐 유치원의 존재도, 학원의 존재도, 도서관의 존재도, 피아노의 존재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할머니가 나뭇일(불을 때기 위해 산에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등등을 가져오는 일)을 하고 마을 앞까지 오면 빈수레를 끌고 나가는 일이나 빈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는 일 정도였다. 성인이 되었을 때도 우리 엄마는 삼촌들과 도시에서 자취하며 밥하고 청소하고 일하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큰 딸이라는 위치로 짊어진 책임과 희생에 집중하며 살았다.


도시에 살았던 나와 비슷한 대부분의 우리 세대는 유치원을 다녔다. 심지어 나와 오빠는 어린이집도 다녔고, 그다음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끝나면 학원을 갔다. 수학, 영어, 한문, 피아노, 미술 등.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또래 아이들과 집단을 형성하며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압도당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를 '일반'의 기준에 맞춰가겠다며 시험을 봤고 평가를 받았고 매번 숙제를 해내야만 했다. 매일매일이 우리에겐 테스트였다.


심지어 우리 세대에는 더 많은 자극과 놀이가 가능해졌다. 오락실, 문방구, 컴퓨터와 PC방, 핸드폰과 스마트폰, 페이스북과 유튜브.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좋은 영향만 끼쳤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탓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많은 자극이 일반적인 일상을 살게 됐다는 점이다. '성장을 위한 경쟁과 평가'로 인해 어쩔 수 없게 겪게 되는 실패와 좌절감, 외로움, 고립감과 '수많은 자극의 일상화'가 만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어쩌면 ADHD를 가진, 아니 주의력이 부족하고 산만하고 모든 변화에 예민한 아이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경우에도 굉장히 예민한 편이었고 아직도 어둠을 일부러 찾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모든 자극이 사라지는 어둠이 무섭지 않고 편안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어둠을 멀리했지만, 그 전에는 일부러 어둠을 찾았다. 누군가의 한숨에도 쉽게 불안해하고,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생기는 좌절감과 열등감에 치이는 사람이 됐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욕심이 많았고, 그걸 다 이기고자 했다. 하지만 나보다 욕심이 없고 순진한 아이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콘서타 약을 복용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남기는 여러 후기글을 보고서 '과연 이 사람들이 약을 복용해야만 하는 사람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됐다. 당연히 반복되는 실수에 치이는 사람들의 감정을 누구보다 이해해서 당사자들은 약을 복용해야만 할 정도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나의 실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소모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내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렸을 때, 책 하나를 다 읽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고 고등학교 때 필요에 의해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힘들었다. 다른 친구는 하루에 읽는 책을 일주일 동안 시달리는 날 보며 '나는 도대체 얼마나 바보인 걸까?' 나를 미워했다. 그래도 나는 그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책을 다 읽은 사람보다 더 책을 열심히 읽은 사람처럼 티 내는 법을 익혔다. 쉽게 말해 꾀를 부렸다. 나는 꾀순이였다. 그래서 성공했다. 책을 다 읽지 않았음에도 토론대회에서 누구보다 더 말을 많이 하고, 논리적으로 말했다. 우리 팀이 3등 했을 때, 1등 할 줄 알았다며 놀랐던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의 문제를 감추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게 일반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책 한 권 다 끝마치지 못하는 아이라면 토론대회에 나가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꽤나 모험심도 욕심도 강했다. 공부를 못 하는 아이였지만 학생회장 선거에 나갔다. 공부를 못 하는 아이였다면 애초에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눈치도 없었고 멍청한 만큼 내 한계에 부딪히는 것에 있어서 무식했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이 어쩌면 나에겐 천천히 쌓여갔고 그게 가능성이 되었다. 지금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도전기가 아니다. 나처럼 눈치가 없거나 멍청할 만큼 무식하지 않으면 이런 경험은 ADHD를 가진 아이들에게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실패와 좌절, 두려움, 외로움, 고립감, 열등감들은 우리의 문제를 더 공고히 하고 스스로를 탓하게 한다. 남들은 쉽게 해내는 숙제를 끝마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사가 지시한 업무를 제 시간 안에 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러나 그건 사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성인 ADHD를 다루는 정신과 의사들의 여러 유튜브 영상을 보면, 하나같이 다 똑같은 말을 한다. '집중을 못 하는 당신, 성인 ADHD 일 수 있습니다' 등. 우리가 평범하게 하는 실수들을 나열하며, 치료할 것을 권한다. 모든 사람들이 집중을 잘하고, 산만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업무를 잘 해내는 사람이라면 그건 현대의 로봇형 인간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 척척척 다 잘 해낼 수는 없다. 분명 지능의 차이, 기질의 차이, 능력의 차이는 있다. 모든 사람이 1시간 안에 구구단을 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시간 안에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고 해서 '너는 학습 속도가 느린 거야'라고 말하는 사회가 잘 못 된 거다. 왜냐면, 그 사회의 인내심이 1시간밖에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 셈이니까. 최소 시간에 최대 효율을 뽑아내는 근대식 공장과 뭐가 다를까? 사람은 공장이 아니다. 기계처럼 일정한 속도로 최상의 결과를 낼 수는 없다. 우리는 가끔 흔들리고 불완전하다.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속도를 지녔다. 그걸 기다려주는 사회가 없기 때문에 도태하는 자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도태된 자이다. 20살에 대학에 입학하지도 않았고, 27살인 지금도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다. 난 내가 느리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걸 문제라고 말하는 사회가 이상한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ADHD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기에 학습의 가능성이 있다. 나의 경우에도 어렸을 때는 책 학권을 끝내본 경험이 없지만, 지금은 끝까지 읽은 책들이 적지 않다. 지금은 활자가 정말 좋다. 물론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나의 우울과 감정을 푸는 용도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내가 쓴 글을 읽는 연습을 하며 남의 글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여전히 읽는 속도가 느리지만, 활자 앞에선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좀 더 걸리는 시간을 잘 감내한다. 글을 좋아하면서도 읽는 속도가 느리다는 점은 '글을 감상하고 내 생각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으로 바뀌었다. 나는 글 앞에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건 당연한 거라며 부족한 사람들을 문제화한다. 더군다나 성인이 되면 돈을 벌어야 한다. 청소년의 시기부터 가정환경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할 수도 있고, 대학생이 되면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 안에서 사장님, 점장님이 시키는 일들을 잘 해내지 못해서 혼이 날 수도 있다. 나도 20살 때 처음으로 했던 카페 아르바이트에서 '얘는 화장실 청소하는 게 좀 걸리는 것 같다', '화장실 청소할 때 뿌리는 세제를 많이 쓴다'며 혼이 난 건 아니었지만 뭐라 들었다. 또 그때 아르바이트하면서 컵을 두 번이나 깼다. 혼이 나진 않았지만, 나의 실수에 이골이 났던 나는 모든 상황이 지옥 같았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수에 더욱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중에 어떤 회사에 들어간다면, 나는 일을 잘하는 직원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업무처리시간이 오래 걸려서 퇴근 시간이 밥 먹듯 길어지는 직원이 될 미래가 오히려 더 설득력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뒤에서 동료나 상사가 내 뒷담을 하더라도 나는 잠깐의 흔들림 후에 다시 제 자리를 찾고 나를 사랑할 자신이 있다. 나를 평가하는 수많은 잣대가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잣대들을 미약한 내가 어찌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휘둘리지는 않도록 내 멘털만큼은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시간이 충분히 필요할 뿐, 우리도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작가의 이전글 3화. 콘서타 18mg 부작용은 '졸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