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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물맨 Mar 08. 2024

그때


몇 년간 세상과 나 사이에는 어렴풋이 얇고 투명한 비닐 막이 있었다. 작게 일렁이는 막 안쪽에서 보는 일상의 풍경은 크게 비현실적이다. 얄궂은 막은 투과하는 모든 것들에게 중요한 것을 빼거나 더한 채 나에게 보내어, 햇빛은 온도를 빼앗긴 채 미간에 닿고 비는 콘크리트가 되어 어깨에 쏟아지며 꽃들은 채도를 잃고 친구의 말은 메아리로 흩어진다. 웃는 이들은 마치 게임 npc처럼 생기가 없다.


분명 같은 것을 같이 보면서도 알 수 없는 이질감에 두 발이 물속에 있는 듯 무겁고 느리게 묶인 그 기분은, 때론 또 지나치게 가벼워 하늘을 걷는 듯 몽롱해 나를 지상과 멀리 동떨어져 있게도 한다. 그렇게 영영 날아가버려 다신 땅을 밟지 못할 것 같아 침대에 누우면 어느새 이불이 내 팔다리를 묶어 침몰시킨다. 하늘과 심해는 이렇게나 가까웠나 보다.


젖은 수건 같은 몸뚱이를 가누지 못해 눈만 겨우 뜨니, 곧 어둠 속 가구들의 새파랗고 희미한 모서리들만 나를 노려보며 영겁의 새벽이 시작된다. 새벽은 끔찍하게 영원 같지만 하루하루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듯 무심히 도 달력을 넘긴다. 시간을 감지하는 센서가 박살 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중 문득 턱밑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에 또 열흘 넘게 씻지 않았단 걸 깨닫는다. 창피해서 동네 친구들도 만날 수 없고 담배를 사러 갈 수 조차 없다. 내 냄새를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비로소 샤워기를 든다.


근육이 다 빠져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 몸을 마주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씻으니 기분이 한결 낫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저게 책상이었단 걸 겨우 기억해 낼 만큼 그 위에 방치된 6개월치 쓰레기를 치우는 것만 빼고. 저것들만 치우면 정말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휴지조각이 쇳덩이 같다. 결국 다시 비닐 속 아침 혹은 끝없는 새벽이다.  5년이 갔다.


우울증은 그렇게 천천히 오랫동안 숙주를 적셔 죽인다. 수정체 위에 각막 대신 비닐막을 씌우고 고요한 새벽의 공포를 알려주며 내 몸뚱이의 진짜 무게를 체감케 한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여전히 살아있더라. 무거운 몸을 이끌어 뉘엿뉘엿 막을 걷어내고 무수한 새벽을 건너 살아있더라. 강한 자가 살아남든 살아남는 자가 강하든 중요치 않다. 생각보다 나는 꽤 강했고 내 속도를 지키며 기어이 기어 올라왔다. 아직 멀었지만 그때를 회상할 수 있을 만큼은 단단해졌다.


삶은 계란을 까다보면 가끔 속껍질이 흰자에 질기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때가 있다. 끝내 읽지 못한 데미안 표지에 쓰여있는, 책 제목보다 유명한 문장이 떠올랐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들에게 알을 깨고 나오라 채근할 때 헤르만 헤세는 혹시 속껍질도 고려를 했을까. 그는 역시 세계와 나 사이의 투명 막의 존재도 알고 있었던 걸까. 여전히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뭐 중요할까. 어차피 둘 다 깨고 나가기로 했으니.

다만 속껍질에 딱 붙어 손가락에 파여 떨어지는 흰자의 찌꺼기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증오, 후회, 조바심 뭐가 됐든. 모조리 버리기로 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당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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