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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요 May 18. 2023

강아지 산책

간절함과 귀찮음에 대하여

웰시코기펨브로크 두 아이가 있습니다.

동두천 2단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와서 '단지'라는 이름을 지었
구요

안성 코기빌 농장에서 데려 온 아이는 보자마자 공주 같아서 '밍키'라는 이름을 건네주었습니다.

올망졸망, 사고뭉치, 투닥투닥 거리는 8~9년의 세월이 흘러 이젠 너무나 사랑스러운 가족이 되었지요

하루종일 집에서 잠을 자고 돌아다니며 엄마, 아빠를 기다린 아이들은 저녁이 되면 분주합니다. 화장실만 가면 어디선가 번개같이 나타나 우리의 손에 하네스가 들려있길 기대합니다.

하네스를 꺼내 들면 짖습니다.

'아이 좋아'

'엄마, 아빠 최고'

'와, 나간닷!'

'줄을 매라! 인간!'

'나부터 매라, 나부터'

'조용히 해, 아휴 정신없어, 너 때문에 엄마, 아빠가 산책 안 가면 어쩌려고 그래?'

등등 온갖 언어를 한 가지 소리로 토해냅니다.

너무 급한 성질 탓에 줄을 물고, 줄을 물때 왈가닥 공주는 제 손을 물기도 합니다.

짜증이 확 치밉니다.


300평의 마당을 주었건만

거긴 그냥 자기네 집인가 봅니다.

무조건 나가야 합니다. 줄을 매고 대문을 열고 길을 나서 다른 댕댕이들의 흔적 냄새를 맡고 소변으로 거기에 댓글을 달고, 좋아요을 눌러야 맘이 편안한가 봅니다.

바람결에 따라온 온갖 냄새가 하루종일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지요

'이건 낯선 남자의 향기가 아닌가~'라고 두 자매는 질투 어린 시선으로 눈빛을 교환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술이 거나해서 돌아와도 산책은 가야 합니다.

줄을 잡고 졸면서도 가야 합니다.

시골의 밤길은 무섭고 아내 혼자 다녀오긴엔 무슨 상황이 생길지 몰라 불안합니다.

갑자기 큰 개가 공격할 수도, 낯선 고양이를 쫓느라 힘차게 달려 나가느라 엄마의 손에서 줄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개껌도, 츄르도 산책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개껌을 먹다가도 하네스 줄만 보이면 너무 좋아합니다.

산책은 아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입니다.

산책은 쉬고 싶은 아빠에게 가장 곤혹스럽고 귀찮습니다.

산책은 쉬고 싶고, 귀찮고, 몸이 아픈 아내에겐

남편에게 갖지 않아도 되는 미안함을 갖고 권해서라도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늘 아내가 먼저 말합니다.

"몇 시에 갈까?"

제가 말합니다.

"오늘 마당에서 많이 놀았으니 안 가면 안 될까?"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남기고 싶지 않아, 얼마나 좋아하는데 저 간절한 눈빛 좀 봐" 아내가 아이 타이르듯 제게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한번 더 안아주고 한번 더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그래도 전 일 년 사계절 중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이 가장 좋습니다.

산책 안 가도 되니까요

잠시 멈춘 틈을 놓치지 않고 다녀오는 아내는 억척스러운 천사입니다.

천사 곁에 사는 귀찮은 애니어그램 본능중심 9번 유형은

간절함을 외면할 줄 알아서 귀찮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뭔가가 간절했던 때는 잊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아내 덕에 아이들에게 좀 덜 미안할 것 같습니다.


떠오릅니다. 나의 간절함은 무엇이었는지

내 주변의 어리고 연약하고, 소중한 사람의 간절함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귀찮아하는 것은 단순히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간절함을 외면하는 잔인한 행동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과 직장 이전에 내 가족의 간절함을 소중히 안아야겠어요


엄마 가지 마시라고 엄마 신발을 숨겨야 했던 어린 시절 나의 간절함은

학교를 마치며 집으로 걸어 돌아가며 가능성이 너무 낮아 세상에 없을 '노란색 차 3대가 연속으로 지나가면

엄마가 와 계실 것이야' 믿던 그 간절함은  너무 처연해 눈물이 났어요.


다양한 간절함 속에 있을 상황과 처지를 살피는 일은 엎드리는 일이며

존중하는 일이며 섬기는 일입니다. 그로 인해 잠시 숭고해져 봅니다.

비가 올 것 같은 오늘 같은 날씨에 참 좋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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