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에 관한 이야기
문예춘추사로부터 가드닝 관련 책 출판에 대한 제안을 받고 계약서를 쓰고 목차를 정하고 아내와의 공동집필 형식으로 원고를 탈고했다.
그 기간 동안에도 정원의 식물은 성장을 거듭했고 덮고 이겨내고 비켜나고 스러지는 다툼과 생멸이 공존했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조화롭게 성장하는 것이 이롭지 않겠는가? 묻는다.
7월 말이었고
허허벌판을 단 1년 만에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정원으로 탈바꿈시킨 지 6개월 만에 황폐화를 넘어 초토화되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의 혼잡함이란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자체로 치열한 생존의 전쟁터이다.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의 아우성처럼......
흔히 잡초라 불리우는 생명력 강한 초록이들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응원이라도 하듯 비는 계속해서 대지를 적셨다.
겨우내 파종으로 싹을 틔워내 이른 봄 노지에 정식한 델피늄은 나고 자라 익숙한 땅을 그리워하며 장맛비와 폭염에 녹아내리고
많은 장미 컴페니언들이-델피니윰, 샐비어, 램즈 이어 등-덮여갔다.
우린 시간이 없었고 책을 쓰느라 골몰했으며 안타까웠지만 돌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미안했다.
가끔 살피는 정원은 전쟁터였다. 빛을 향해, 광합성을 향해 위를 향해 오르는 처절한 다툼!
환삼덩굴, 나팔꽃, 노박, 으름, 댕댕이, 인동덩굴, 강낭콩들
그들은 줄기를 감아 목을 조르고 가지를 감아 아래로 당겨 내리며 잎을 감아 그 위에 자신의 잎을 펼친다
멀리서 보면 같은 초록이고 풍성한 숲으로 싱그럽기까지 하다
단지 멀리서 보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을 모아 놓은 곳도 그러하다.
누가 누구에게 잡초라는 명칭을 붙여 뽑아 버려도 좋을 대상으로 지정하였으며 또한 이름 모를 들풀이라는 꽤 괜찮은 이름을 주어 무심히 지나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 여겨지게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덩굴을 걷어내기가 버거웠다. 하늘을 날으는 장미를 위해 야외 조명을 걸 수 있는 기둥을 세웠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한 목재에 독일 장미가 기세 좋게 오르고 있었다. 24m까지 자라는 이 덩굴장미의 기세를 멈춘 건 덩굴식물들이었다. 줄기를 감고 잎을 피워 장미를 덮어버렸다.
몸을 숙여 뿌리를 찾아 뽑고 당겨낸다. 장미는 상처를 입고 찢겨 나가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덩굴로 인해 받았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식물과 식물 사이의 식재 간격을 애써 넓혔으나 그들이 자라는 속도는 인간의 헤아림과는 달라 무성한 가지를 쳐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란 수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가위는 주저하는 손 위에 걸려 있을 뿐 과감히 대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위로 뻗기만 하는 가지는 튼튼하지 못하고 웃자란 식물은 열매 맺지 못한다. 과감히 가지를 솎아내고 들어내어야 줄기는 튼실해지고 뿌리의 힘은 강해져 내년 봄 다시 새순을 틔우는 나무는 건강해진다. 꽃을 피우는 식물의 꽃은 아름답고 풍성하며 열매를 맺는 식물은 그 열매가 튼실하고 달고 시원하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이 스스로 모인 곳도 역시 그러하다.
자유로운 탐색과 자신의 고유한 빛깔을 지닌 아이들의 성장을 지원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인내와 관찰과 노련한 안내가 필요하다.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단호하고 엄격한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가지를 쳐내고 아이의 성장을 뒤덮고 있는 불필요한 환경을 걷어내는 과정은 지난하고 상처를 줄 수 있으며 반응이 거칠어 저어되는 것이 사실이다. 안락함이 뒤집어지고 익숙함의 바닥이 일렁이어 어지러우며 괜찮은 상황들이 안괜찮아져 불편하다.
그.래.도
그대로 두어서는 성장할 수 없다. 자람은 멈추고 멀리에서만 보이는 싱그러운 초록은 내 것이 아니라 내 몸을 휘감아 성장해 가고 있는 내가 아닌 그 무엇이다. 나의 존재, 본래의 색과 가치는 없어지고 빠르고 편하고 거친 무엇이 나를 대신한다. 멀리에서는 숲속에 있는 하나의 식물로 존재감은 여전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자라고 있는 아이가 아니다.
과감한 가지치기는 곧 싱그러운 새순과 DNA에 잠재된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과 열매의 탐스러움으로 드러난다. 수형이 아름다워지고 안으로 난 가지를 쳐낸 자리에 알맞은 바람길이 만들어져 나뭇잎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웃자란 가지를 쳐낸 자리엔 빛을 받기 위해 경쟁하듯 줄기를 뻗는 줄기를 대신해 나무는 겨우내 견뎌낼 양분을 저장하는 뿌리로 시선을 돌리고 에너지를 집중하는 지혜를 갖게 된다.
걷혀지는 덩굴이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 나고 찢겨진 잎과 구부러진 줄기와 빛을 받지 못해 핼쑥해진 누런 잎들을 보이지만 그들은 곧 익숙했던 굴종의 삶에서 일어나 위로 솟구쳐 오르고 몸에 감겨있던 버거움을 던지고 줄기를 굵게 만들고 새로운 성장을 준비한다.
스스로 애쓰고 있다고 여겼지만 불필요한 성장이었고 익숙하다고 여겼지만 갇힌 삶이었던 주체들에게 잘리는 고통으로 애써야 할 곳이 어딘가를 알게 하고 할퀴우는 쓰라림으로 온전한 나로 서는 법을 일깨워야 한다.
이것이 성장이고 양육이고 교육이다.
고통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리거나 평온의 삶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 걷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괴이한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