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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석빈 Jun 03. 2024

미나리

영화 "미나리"에 숨겨진 이야기들

몇 번씩 몇 번씩 반복해서 보는 영화가 2개가 있다.

하나는 한석규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이고 또 하나는 한석규 주연의  이중간첩이다. 하나 요즘 반복해서 보는 영화가 하나 더 생겼으니 바로 2020년작  미나리이다.


  이미 국제대회에서 상까지 받은 명작이기에 많은 분들이 시놉시스 줄거리평을 많이 작성을 하여서 그분들의 주옥같은 글들 속에  나도 숟가락을 올려보려 한다. 난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가장 주관적이고  잡학적인 이슈를 적어보려 한다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1980년대 미국에 정착한 한인들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 모니카(한예리 )의  경우  아버지가  전쟁통에 죽었다고 하니 월남전은 아닐 것 같고  1950년 6.25 동란 때 사망 시  모니카 나이는 30대 초중반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  제이콥 모니카  결혼사진이 나오는데 1972년이라는 각인이 나온다. 참고로 한국의 1970년대 남자는 26세 여자는 23세 평균 결혼 나이였다고 한다.


 또한 1980년대 미국 한국 이민자 수는 대략 미국 인구 조사국 통계로 35만 명 정도 추정했다고 한다.

아칸소주(arkansas)의 경우 한인들이  800여 명 정도 주 전체 분포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제이콥 (스티븐 연 )이 가족이 이끌고  아칸소 주에 이주하여 자신만의 팜(farm)을 만들기 위해 이사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등장하는 트레일러 하우스 (Mobile home)에 들어서면서  모니카 (한예리 분)가 일그러지는 표정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당시 알칸소주 같은 남부지역 특히 북부에 비해 경제발전이 더 딘 아칸소주의  모빌홈의 보급율은  10퍼센트가  이 모빌홈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그 달리 이야기하면 모빌홈에 산다는 것이 모니카에게만 충격으로 다가올 뿐 그 당시 아칸소주 농민들에게는 일상이었던 것이다.


모니카의 경우 아들 데이비드 (앨런 김 扮)의 심장질환으로 인해  기존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아칸소주까지 넘어온 결정을  한 남편 제이콥과의 갈등이 영화 초반부터 보인다. 결국에는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 (윤여정 扮)이  알칸소로 오시는 것으로 부부간의 불화는 일단락이 된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 당시 한국에 있는 부모를 초청이 가능했는지 자료를 찾았으나 그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여기서 미국 그 당시 미국 비자법까지 자세히 논하기 그러하니 다음에 기회를 보겠다.


초청과 동시에  친정어머니는  알밤 그리고  미나리 씨앗 그리고 딸아이한테 줄 용돈 그리고 손자에게 줄 한약까지 챙겨 오셨다. 오시자마자  손녀 손자들과 신경전, 그리고 미나리를 심어보자는 제안에도 시큰둥한 사위 반응에 실망을 한다. 참고로 미나리는 1960년대부터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캘리포니아 알대에서 알음알음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데이비드에게서 오줌(pipi)을 먹어보는 시련까지 있지만  순자에게는 미국 생활에서 낙이 있었으니 바로 tv로 프로레슬링을 보는 낙이 있었다. 근육질들의 사나이에게 있는 피 튀기는 열연에 순자의 가슴은 오무락 조물락 뛰었다. 처음에는 영화상 설정인 줄 알았으나 그 당시 알칸소주 지역민방에서는  Mid South Wrestling이라는 지역 레슬링 리그가  빈번히 방송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 상에서는 제이콥의 자신만의 농장을 갖기 위해서 왔다고는 하지만 1980년 한인에게 닥친 시대 변화 중에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생활비 및 주택비용의 급등한 관계로 생활환경에 경쟁력이 있는 남부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제이콥의 경우 한국인들의 위한 채소 공급을 위한 팜(farm)이 꿈이기에 해당이 없지만  그 당시 한인들의 주업 리테일 샵 그리고 라운드리 샵 등의 경쟁에 치여 새로운 지역으로 이 이주가 필연적인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80년대  86 아시안게임 그리고 88 올림픽으로 인해 모국인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상승함에 따라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대형화 정치화 복잡성 등으로 인해 염증을 느끼고 남부 및 기타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도 증가했다고 한다


영화 상에서 병아리감별소에서 일하게 된 제이콥 모니카부부에게 말벗이 돼준 오여사(에스더 문 扮) 이 한 말 중에 "15명 가지고 무슨 교회를 만들어. 여기 사람들 거기 교회가 싫어서  이주한 사람들이야"라는 대사가 있다. 특정 종교에 비유한 사례보다는 그 당시 로스에인절레스 같은 도시의 한인 커뮤니티상에서 인적관계 피로도가 있다는 것을 누적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생뚱맞지만  이중간첩에서 천호진이 "사람들이 왜 교회를 다니는 줄 아나? 거기에는 그들만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인색할 수 에 없는 거지" 대사가 갑자기 회자된다)


1980년대  미국 이주 한인사회에서  한국 내에 있는 출신지별 갈등  이주시기에  따른  갈등  그리고 80년대 미국 한인 네트워크의 기초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 간의  갈등 등 여러 이슈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제이콥 모니카 가족은  미국 지역 교회에 참석하게 되고  아칸소주  교회 네트워크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 당시 아칸소 주를 위시한 남부지역에서는 남침례교 (Southern Baptist Convention)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남침례교 같은 경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환영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아칸소주의 경우 외부 이주민들이 지속적인 이주로 그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신앙생활을 통해 지역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그럼 이 한인 부부에게 기초적인 생활비의 베이스가 되었던  병아리 성별 감별사란 직업은 한인사회에서 어떤 존재이었을까? 아칸소주의 경우 1980년대 경우 가금류 사업 비중이 미국 내에서 상위에 위치하였으며  육계와 계란생산이  주요 비즈니스였다고 한다. 타이슨 푸드 (Tyson foods)와 같은 메이저 업체도 아칸소주에 분포되어 있었고  고기와 계란 생산을 위해 암수를 구별해야 하는 병아리 암수 감별사 인력에 대한 수요 및  중요도가 커진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제이콥 모니카 부부의 경우  어떤 경우일까? 제이콥은 숙련공 그리고 모니카의 경우 비전문가가 봐도 돈을 공장에 내고 배워야 할 수준인데  그 당시  한국인의 경우 손크기가 서구인에 비해 작아 병아리 잡기가 용이했고  강한 등불 밑에서 생식기 돌기 색깔을 통해 구별을 했다고 한다. 좀 더 들어가면 1920년대 일본인에 의해 감별술이 개발이 되고 자연스럽게  식량생산 기지의 역할을 했던 조선지역의 많은 젊은이들이 병아리 감별에 대한 기술을 습득했다고 한다. 전후 1960년대 박정희 정권하에 병아리 감별기술을 교육하여 많은 인력들이 해외로 파견되어  병아리 성별 감별사 = 한국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 당시 숙련된 감별사가 하루에 2만 마리 정도 감별을 해야 했고 숙련된 감별사 기준 연봉이 15,000-25,000불 사이에 형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병아리 감별기술이 있는데도 제이콥이  자신만의 농장을 갖는데  집중했을지 약간 의구심이 든다.  여기서 데이비드의 심장병 이슈를 돌아보면  아칸소에서  둘째 아들 병원까지 운전하여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고  친청 어머니 순자가 고춧가루를 가져왔을 때  모니카가 달라스에서 구하지도 못하는데 라는 대사를 한다. 기록을 보면 1980년대 달라스에도 children, s medical center dallas라는 유명한 클리닉이 존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 내에서도 의료보험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그 당시 제이콥 모니카 부부가 일하는 가금류 가공공장에서 민간 의료보험 혜택이 없을 거라 가정되고  제이콥이  농장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생계의 직면된 해결책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제이콥의 농장 경영은  작물한테 줄 농업용수를 구하지 못해 난관을 겪는다. 1980년 기록에 보면 아칸소주 연평균 강수량이 40인치에서 50인치 사이라고 했다. 그리고 토네이도도 적지 않은 횟수가 발생했다고 한다. 하나  봄과 가을에 집중된 강수는 한국 고추와 같은 농작물의 작황시기와 겹치치 않아 용수난을 묘사한 게 아닌지 생각된다. 제이콥의 강력한 팔뚝으로  수제 드릴 같은 것으로 수맥을 찾는 데는 성공했으나 같이 일을 하는 미국인 농부의  dowsing rod (다우징로드 :나뭇가지로 수맥 찾는 법)을 권유했으나 제이콥이 거절한다. 영화에서 200불 정도 부른 거 같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용수난에 농사는 큰 난관에 봉착한다.

결국에는 수돗물을  끌어다 농사를 하게 되고  결국 수도세를 못 내고 집에서 가정용수도 단수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 당시 아칸소주 평균 가정 한달수도 요금이 20-30불 정도 되었다고 하니 가정용수도로 농사를 지었으니  병아리 감별에서 번 돈은 대부분  농사짓는데 들어가고  제이콥은 절망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농산물을 구매하겠다는 대도시의 한인 파트너는 갑자기 매입처를 바꾸어버리고  힘들게 재배한 농작물의 판로는 불투명해진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할머니와 손자와 같이 자면서  데이비드는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할머니는 손자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가져가려는 듯 손자를 안아준다. 하지만 손자의 두려움은 할머니에게 뇌졸중이라는 고통을 주게 된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뇌졸중은  온 가족에게 특히 모니카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제이콥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어려워진 경제 형편에  말이 없어진다. 의학적으로도 노인의 갑작스러운 이주환경 변화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으로 뇌졸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말이 안 통하는 스트레스성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아픔으로 인해 모니카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려는 결심과 절실한 크리스천 자신도 무속신앙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제이콥의 농장에서 일을 도와주는 폴(윌 패튼扮)은 평소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행동을  영화상에서 보여주는데  그 당시 아칸소 주는 성경 벨트(Bible Belt) 지역 중의 하나였고 신앙심이 깊은  신도들 사이에  미국 특유 남부 지역에서의 당시 모습을 영화로 표현한 거 같다.


이런 신앙심이 깊은 조력자가 순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을 때 모니카와 퇴마의식을 순자의 방에서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 아칸소주 일대 교세가 남침례교라고 가정할 경우 남침례교인 경우 교리 특성상 퇴마의식을  하기에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다만  그 당시 1980년대 미국 전역에서 사타니즘이 만연했고 이러한 상황을 영화로 풀어낸 듯하다.


영화 후반부에 들어  순자만  집에 홀로 두고 데이비드 심장병에 대한 질환에 대해서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진료로 보러 간다. 데이비드의 심장음을 모니카가 빈번히 체크하고  병원에서 심실  사이의 벽에서 흐르는 혈액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심실중격결손(Ventricular Septal Defect, VSD)이란 진단명이 아닐지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상에는 정확한 진단명은 나오진 않는다.


하나 제이콥 입장에서는 데이비드의 병원과 함께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제이콥이 열심히 키운 작물을  도시에 한인마트에 영업차 방문이었다.  당시 방문했을 도시를 달라스(Dallas)라고 가정했을 때  달라스는  1980년 미주 한인 35만 명  여 중 만여 명 정도 거주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할에서 몇 개 안 되는 한인마트는 그 당시 한인 네트워크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제이콥은  한인마트 오너에게  자기는 4시간 이내에 싱싱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채소를 공급할 수 있다고 어필을 한다. 마트 오너의 긍정적인 메시지에  제이콥은 오래간만에 웃음을 뛴다.


하지만  어머니의 뇌졸중에 마음이 무거운 모니카는 원래 있던 샌프란시스코에 제이콥과 돌아가서 어머니 병간호와 가정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제이콥은 병아리감별사로 평생을 보낼 것을 두려워 하는 마음 그리고  힘들게 일군 농장을 포기를 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를 못 하는 모니카와 제이콥 그들은 그들의 입장차이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장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집안일을 도우다 불이 나 제이콥의 농작물이 있는 창고를 다 전소시키고 만다.


이러한 전소를 맡기 위해 제이콥과 모니카로 화마로 뛰어들고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다 사라져 갔다. 순자는 이 상황에 대한  막막함을 해결하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가고  그 할머니를 부르기 위해 심장이 아픈 손자는 자신의 능력을 다 끌어 얼리듯 아픈 심장을 뒤로하고 할머니를 애타게 부른다. 한바탕 소동은 뒤로 가고 온 가족이 마루에 다 자면서 영화를 끝으로 다가가고 있다. 한국인 가정이라고 표현하기 위해 일부로 마루에서 다 같이 자는 장면을 연출했는지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농사를 짓기 위해 전문적인  dowsing rod 전문가를 고용해 다시 수맥을 찾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한다.


 이 영화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은 1978년 생으로 미나리라는 영화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서술했다고 한다. 농장이 꿈인 아버지 따라 아칸소주에 정착한 정이삭 감독은 아칸소 주 특유의 백인농업 공동체에서의 삶이 이 미나리 영화의 제작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상에는 화개애애한 이웃으로  표현되었고  손자의 친구아버지가 제이콥의 농장경영을 약간 회의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실제로 백인농업공동체 특히 실제 존재했던 CSA 같은 조직은 백인우월주의 특징은 강했고  타인들에게는 배타적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정이삭 감독은 트위스터스라는 토네이도 관련 영화로 2024년 여름 한국관객을  만난다. 미나리에서도 토네이도도 언급되지만  차기작을 위해서 아껴둔 느낌이 난다. 시간이 날 때 미나리 영화를 다시 한번 보는 것을 강력 추천 한다.



상기 사용된 이미지는 마이크로소프트 Copilot AI로 이미지가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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