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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랑 Aug 01. 2023

방콕에서 처음 겪는 충격과 공포의 벽간소음 (마지막)

참을 만큼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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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현타를 느끼다


옆집에 두 명의 여행객이 연속으로 며칠째 머무르던 토요일 밤이었다. 그들은 종종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아마도 그들의 모국어일)가 흘러나오는 영상을 크게 트는 것 외에는 전반적으로  잠잠한 이웃이었다. 다만, 한 두 번 밤늦게까지 영상 소리가 시끄러워 조용히 해달라는 의미로 노크를 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독특했다. 방음이 취약하다는 걸 눈치채고 곧 조용해지는 보통 여행객들과 달리, 내 노크에 벽을 쾅쾅 치는 것으로 응답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밤늦은 시간까지 옆집에서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아 완전히 안심한 채로 일찍부터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귀신도 잠들어있을 것 같은 새벽 세시, 알 수 없는 소음에 눈이 떠졌다. 막 잠에서 깨 비몽사몽 시간을 확인하고 상황파악을 하는 내 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곧 분명해졌다. 이건 꽹과리를 들고 상모 돌리기를 하며 들어도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였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깨면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거대한 현타가 휘몰아쳤다.

내가.. 내가 정말 이런 소리까지 들으며 여기서 살아야 하나? 아무리 내일이 일요일이라지만,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간에 대체 이게 무슨..


당장 내 애착 요가링을 벽에 집어던져 산통을 다 깨버리고 싶은 마음과 '벽간소음은 안중에도 없을 그들의 사적인 시간을 방해할 권리가 나에게 있나?'라는 근본적인 질문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결국 나는 그들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이 지나, 그들이 일을 끝마치자마자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잠을 청해보려 애썼다. (그것이 언제 끝났는지 네가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도 진심으로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옆집 빌런들의 선명한 말소리는 도저히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조용해지길 기다리다 지친 나는 결국 가링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큰 심호흡과 함께, 최대한 정중하게 리듬을 타며 "제-발-잠-좀-잡-시-다."라는 의미의 노크를 했다. 혹시나 그들이 방금 전 낸 모든 소음이 타인에게 들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망해하지는 않을까 아주 잠시나마 망설였던 내 마음이 무색하게, 그들은 이번에도 벽을 쾅쾅 치는 것으로 화답해 주었다.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랩탑을 열어 지난번에 초안까지만 대충 작성해 두었던 편지를 단숨에 완성했다. 더 이상 망설일 틈이 없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영어를 포함해  세 가지 언어로 쓴 편지가 A4 용지 한 장에 딱 맞게 들어가도록 편집한 뒤, 그 길로 집 근처 인쇄소로 달려가 넉넉히 열 장을 인쇄했다. 그리고 곧장 슈퍼마켓에 들러 편지와 함께 건넬 간식을 사서 가했다.


편지 내용은 이 전 글에 적은 틀을 그대로 따랐다. 시작과 끝에 그들의 즐거운 방콕 여행을 바란다는 나의 진심을 전하며, 건물의 취약한 방음 탓에 서로의 음악, TV, 대화소리, 문 닫는 소리를 포함한 생활소음이 생생히 들린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어와 중국어로 번역한 편지는 일부러 감수를 거치지 않고 번역기 결과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굳이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릴만한 단서를 편지에 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 글을 읽으신 독자분께서 이 편지를 받으신다면, 기꺼이 모른 척해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름 간식을 고른 나만의 기준도 있었다.

1. 태국스러운 간식일 것 (그들이 즐거운 여행을 하기를 바라는 내 바람을 담아)
2. 전달하는 동안 상하거나 오염될 염려가 없는 밀봉된 공산품일 것
3. 알러지 우려가 있으니 견과류는 제외
4. 간식이 집에 있으면 있는 족족 먹어치우는 습성이 있는 이 집주인 (나)의 성향을 고려해, 너무 유혹적이지 않은 간식일 것
5. 한 달에 대략 10-12 번 제공해야 하는 것을 감안해 부담이 없는 가격일 것
6. 포장을 해야 하니 사이즈가 손바닥보다 작을 것
말린 바나나와 망고 캐러멜을 포장하는 가내수공업의 현장
약 1-2개월치 간식을 미리 포장해 두었다.


인쇄해 온 편지를 반으로 접어 그 위에 "읽어주세요 :)"라고 삐뚤빼뚤 휘갈겨 적었다. 편지를 받아 든 옆집 여행객들이 말린 바나나를 까먹으며 '이 사람 정중하긴 한데, 글씨체를 보니 어쩌면 미친 사람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상상을 했다. 너무 착하고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어쩌면 광인일 수도 있는 사람'이 준 편지와 간식이 옆집 방문에 붙어있다.


그렇게 완성한 편지와 간식을 옆방 문에 붙여두고 후다닥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복도를 지나쳤다. 몇 시간 뒤, 편지와 간식이 문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과연 내 진심이 통할 것인가?






최후의 방법 개시,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처음 몇 번은 여행객들이 편지를 받고 나서 불편해하면 어쩌나, 기분이 상해 오히려 더 시끄럽게 굴면 어쩌나, 별의별 걱정을 다 하며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내 우려와 달리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내가 편지에서 부탁한 대로 딱 밤 열 시가 넘으면 약속한 듯 조용해졌다.


간혹 밤늦게까지 소음을 내는 이들이 있더라도 편지로 미리 상황을 설명해 놓고 노크를 해서인지, 확실히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조용해졌다. 이전에 비해 예측할 수 없는 소음으로 인한 고충이 대략 70% 정도는 줄어든 느낌이었다. 진즉 이 방법을 시도해 볼 걸 싶기까지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노크를 하려 노력한 것과 편지를 써보자는 아이디어 모두 '내가 저 여행객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때 조용히 하고 싶어 질까?'라고 접근한 것에서 시작했다.


여행을 할 때 에어비앤비 숙소에 머무는 것은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일이다. 체크인한 에어비앤비 옆집에 내 모든 생활소음이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도 자연스레 한껏 흥이 오른 여행객답게 신나게 떠들고 큰 소리를 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옆방에서 조용히 하라고 빽 소리를 치거나 벽을 쾅쾅 두드려 온다면 나는 아마도 아무런 맥락도 모른 채 이 에어비앤비 옆집에 미친 사람이 나 보다 하고 감정만 상할 것이다. 절대로 조용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이고 뜬금없는 공격 대신, 만약 옆집에서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온다면 여행자로서 기꺼이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내 프라이버시도 중요하니 말이다.


그 생각이 맞았다. 나의 진심을 담은 편지와 간식이, 먹혔다.






그리고 남겨진 숙제


이제 큰 산은 해결되었지만, 아직 나에겐 마지막 숙제가 하나 남아있다. 여전히 들쑥날쑥 롤러코스터를 타는 나의 마음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다. 벽간소음으로 인한 고통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이전엔 분명 '잠만 좀 편히 잘 수 있어도 감지덕지할 텐데'했던 마음이, 이제는 낮에 들리는 소음까지 싹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랄수록 내 마음 안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디도 나가고 싶지 않고, 혼자 집에서 가만히 쉬고 싶은 주말. 조용히 앉아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평화로운 낮 시간. 옆집에서 여러 사람이 크게 떠드는 소리가 벽을 타고 웅웅 울려댄다. 큰 음악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그럼 이기적 이게도 '여행을 왔으면 날씨도 좋은데 밖에 나가서 좀 돌아다니지. 왜 방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걸까?'라는 원망스러운 생각이 불쑥 든다. 그게 내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피해의식으로 이어지며 나의 기분을 망친다.


그럴 때마다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오로지 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이 모든 자극으로부터 초연해져야 한다는 것. '마음껏 떠드세요, 전 제 음악을 틀겠습니다. 여행하느라 피곤하시죠? 집에서 쉬세요, 전 밖에 나가서 햇살을 즐기면서 에너지 충전을 하겠습니다.'하고 말이다. 가끔은 옆집에 내 가족이나 친구들이 놀러 와있다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짜증스럽게 들리던 소음이 잠시나마 익숙하고 반가운 소리처럼 느껴진다.


확실한 것은 편지를 건네는 것으로 벽간소음 자체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이 이상으로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내가 이 집에서 당장 이사 나가지 않고 지내기로 한 이상, 남은 계약 기간 동안 나의 정신 건강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제 나의 통제 밖에 있는 벽간소음의 유무가 아닌, 들려오는 소음을 내적으로 어떻게 처리하고 받아들이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세상만사는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이고, 느끼고자 하는 대로 느껴지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문을 외듯이 되뇐다.


나의 마음은 평화롭다. 그 어떤 자극도 나의 내적 평온을 방해하지 않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를 웃게 만든,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간식 껍질.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는 멀쩡한 쓰레기통을 옆에 두고 바닥에다 버렸을까? "어쩌면 광인일 수도 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듯하다.



@sorang.diaries 인스타그램에도 종종 방콕생활 소식을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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