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좋아하는 내게 방콕에 살면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하나씩 꼽으라면 도심에 큰 공원이 여러 개 있어 좋지만 가볍게 오를만한 산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다.
방콕에서 약 두 시간 비행이면 닿을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이런 나의 등산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에 완벽한 도시다. 태국의 중부 평야 지대에 위치한 방콕과 달리 쿠알라룸푸르는 언덕과 계곡이 많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Bukit(부킷=언덕), Lembah (렘바=골짜기) 등 도시 곳곳 지명에 자주 쓰이는 단어들에서 이러한 쿠알라룸푸르의 지형을 엿볼 수 있다. 덕분에 쿠알라룸푸르는 도시 전체에서 초록초록 푸르고 무성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데, 그만큼 등산을 할 곳도 차고 넘쳐난다.
재택근무를 하며 종종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낼 때마다 방콕에는 없는 산을 찾아다니는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가볍게 한두 시간이면 하산까지 마칠 수 있는 동네 뒷동산들이 쿠알라룸푸르 도시 곳곳에서 시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게다가 방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울창한 열대 우림 속에 펼쳐진 경치가 마치 정글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쿠알라룸푸르 시내 (KLCC)에서 차로 2-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등산 코스 목록을 가져왔다.
이런 여행자들에게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등산을 추천한다.
• 여행 중 호텔에서 깨작깨작 하는 유산소 운동으로는 성에 안 찬다.
• 열대 우림 정글 속에서 자연의 정기를 한 껏 흡수하고 싶다.
• 맑고 달달한 숲 속 공기를 마시며 몸과 정신을 정화하고 싶다.
• 말레이시아의 동네 뒷산은 어떻게 생겼는지, 등산문화는 어떤지 궁금하다.
• 우선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다음 뿌듯한 마음으로 로컬 코피티암 (kopitiam)에서 시원한 밀크티를 한잔 때리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등산하기 전에 주의할 점
• 비가 오고 난 뒤에는 진흙길이 미끄러워지니 위험할 수 있다. 튼튼하고 발이 편한 신발을 제대로 챙겨 신을 것.
• 대부분 등산로 입구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니, 생수, 모기약, 땀 닦을 수건, 등은 미리 챙길 것.
• 벌레가 많고 수풀에 다리를 긁힐 수도 있으니 긴팔, 긴바지 입는 것 추천.
• 비가 오면 산에서 발이 묶이거나 진흙길이 미끄러워 위험할 수 있으니 일기예보를 꼭 체크하고 갈 것.
1. 투구 공원 등산로 (Taman Tugu Hike Trails, 타만 투구 하이크 트레일스)
등산로가 구불구불 아주 복잡하게 나있는데, 의외로 길을 찾기 가장 쉬운 등산로 중 하나다. 왜냐하면 모든 갈림길마다 순서대로 하나하나 숫자가 매겨져 있어 아무리 초보자라도 길을 헤맬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GPS를 켜둔 채로 등산을 마치면 마지막엔 내가 이렇게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왔다고? 싶을 정도로 산행이 순조롭다. 등산로도 색깔별로 구분되어 있어 작은 둘레길을 한 바퀴 돌 수도, 아니면 모든 색의 등산로를 전부 이어서 길게 도는 것도 가능하다. 덕분에 잠깐 마실 가듯 걷고 싶은 사람과 좀 길게 한 바퀴 다 돌아보고 싶은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곳.
총 소요시간: 고르는 루트에 따라 30분 - 2시간
길이 구불구불해 복잡해 보이지만 이정표가 감탄스러울 정도로 꼼꼼히 잘 되어 있어 안심해도 된다. 주말 아침에는 등산객들이 많아 함께 으쌰으쌰 하며 산행을 마치는 즐거움도 있다. 게다가 지나는 구역마다 경치가 계속해서 바뀌어서 지루할 틈이 없는 산행이었다. 하산 후에는 근처 Kenny Hills Bakers에 들러 커피와 디저트를 뿌쉈다. 이 복숭아와 크림이 켜켜이 올라간 페이스트리가 정말 멋졌다. 쿠알라룸푸르에 지점이 여러 군데 있는 카페인데, 디저트의 비주얼이 엄청나게 먹음직스럽다.
2. 스리 빈탕 언덕 (Bukit Sri Bintang, 부킷 스리 빈탕)
구글맵에는 오르는 길이 직선으로 짧게 찍 하고 간단히 그어져 있어서 만만하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린 곳이다. 위에 소개한 타만 투구에 비해 이정표도 뭣도 없는 야산 수준이라 짧은 산행임에도 꽤 난이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 바라본 도시 뷰가 정말이지 숨 막히게 멋졌다. 처음 오른 정상에서 옆 동산 정상으로 옮겨가는 길이 꽤나 가파르고 그늘도 없이 쨍한 햇살 아래 한참을 걸어야 하지만,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을 거니는 듯 해 더운 줄도 모르고 황홀하기만 했다. 정상에 올라 볼 수 있는 경치 하나로 모든 고생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 느껴지는 곳. 햇살 좋은 날 꼭 가보기를 추천한다.
총 소요시간: 약 1시간 20분
첫 번째 피크에서 두 번째 피크로 옮겨가는 길. 사람이 개미처럼 보일 정도로 광활하고 푸른 길로 두 정상이 이어져 있다. 꽃구경도 놓칠 수 없다. 햇살이 너무 뜨거운데,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게 하는 황홀한 뷰. 정상에 오르면 저 멀리 쿠알라룸푸르 시내가 보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우리 분명히 저기 있었는데! 하면서 자꾸만 손가락질하게 되는 쿠알라룸푸르 시내 정상에 올라 쉬는 시간 포함 총 1시간 20분 정도 걸린 짧은 산행이었다.
3. 가싱 언덕(Bukit Gasing, 부킷 가싱)
외나무다리와 현수교가 놓아져 있어 색다른 등산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곳. 하지만 여기도 등산로 이정표가 그다지 잘 되어있지 않다. 중간중간 지도가 있기는 하지만,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건지에 대한 표시가 없어 길을 헤매기 쉽다. 갈림길에 닿으면 무조건 구글맵 GPS를 딱 켜놓고 잘 보면서 가야 한다. 나는 휴대폰을 넣어두고 주변 등산객들의 조언에만 의존하다가 낭패 봤다. (!)
이건 의외로 주의할 점인데, 등산객들은 언제나 친절하다. 모두들 눈을 마주치면 굿모닝, 조우산 (광둥어로 좋은 아침) 하며 미소 짓고, 길을 물어보면 성심성의껏 알려주신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말 것. 일단 입구와 길이 너무 많아 당최 내가 어디로 가고 싶다는 건지 설명을 잘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그걸 상대방이 찰떡같이 알아들을 확률은 더 낮다. 나처럼 거의 다 내려가서는 길을 뱅뱅 돌아 다시 등산하러 오르는 수가 있으니, GPS에 의존하는 것을 추천한다.
총 소요시간: 루트를 크게 한 바퀴 도는 것을 기준으로 약 1시간 반
산행길에 이렇게 방치된 폐가가 하나 있었다. 쫄보는 흘깃 쳐다보고 지나쳤다. 중간에 길을 헤매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신 모녀 등산객분들. 하지만 저 외나무 다리 길을 건너고 나서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기껏 받은 도움이 도로 물거품이 되었다. 곧 얼마나 헤맬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산행의 시작. 지도가 있기는 있는데 또 있는게 아닌 그런..
4. 키아라 언덕 (Bukit Kiara, 부킷 키아라)
콘크리트 산악자전거도로, 흙길, 자갈길, 모래길, 돌길 - 우리가 등산에서 상상하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올인원 패키지 같은 곳이다. 여러 번 다시 갈 곳을 하나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선택할 곳. 등산로도 정말 여러 길로 나있어 매번 새로운 느낌일 것 같다.
우선 등산로 입구가 여러 군데에 있는데, 구글맵에 Bukit Kiara Hill Walk라고 적힌 곳에서 시작하면 편편하고 널찍한 콘크리트 산책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가벼운 산책 같은 등산을 원하는 이들은 이 메인 길을 계속 따라가면 되고, 말레이시아의 정글숲을 즐기고 싶은 이들은 메인길 중간중간 나있는 산 입구로 들어가면 스펙터클한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정글길에서 나는 수풀 향기가 정말 황홀하니 꼭 경험해 보기를.
하산 후에는 출구에서 300m 정도만 걸으면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동네가 나온다.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뜨끈한 쌀국수 한 사발로 등산 마무리 가능.
총 소요시간: 약 2시간
상상했던 입구가 아니어서 1차 당황했으나, 등산 고수처럼 보이는 우리 앞팀 여성 세분을 따라 쭉쭉 올라갔다. 힘들다 불평할 틈 없이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정글 뷰 진흙길이 나왔다가, 자갈길이 나왔다가 한다. 정말이지 지루할 틈이 없다. 대나무가 우거진 구간도 있었다. 축축하고 달달하고 향긋한, 형용할 수 없는 자연의 공기. 등산을 거의 마친 시점에 메인 길로 들어왔다. 정글에서 튀어나온 나는 이런 문명화된 길이 있었다니? 하며 감격했다. 저 멀리 도시 풍경도 보인다. 귀엽지만 무서워서 가까이는 갈 수 없는 원숭이들도 있다. 아주 많은 등산로가 있다. 다음에 다시 가게 되면 또 어떤길을 고를지 벌써 설렌다. 등산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도 아주 달달하다 이거예요. 쌀국수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구글 리뷰가 너-무 좋은 해장국 집에 택시를 타고 갔다. 여기가 한국인지 말레이시아인지 헷갈리게 하는 국물과 김치맛이었다. 강력추천.
5. 와와산 언덕 등산로 (Wawasan Hill Trail, 와와산 힐 트레일)
구글맵에서 계곡 사진을 보고 반해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오른 등산길. 하지만 트레일을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계곡은 보지 못했다. 몇 군데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경사가 완만해서 큰 힘이 들지 않는 등산로다. 갈림길이 거의 없고 막힌 길 표시가 테이프로 확실히 되어있어 GPS 없이도 길을 잃을 걱정이 없는 것도 장점이다. 분위기는 정말 정글 그 자체다. 정글~숲을~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노래가 절로 나오는 뷰다. 하산한 뒤에는 근처 딤섬집이나 IOI 몰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을 추천한다.
총 소요시간: 약 1시간 반
천천히 자기 페이스대로 갑시다. 너무 무리해 서두르지 말라구! 정글~~ 숲을~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갑자기 급경사로가 나와서 당황하면 찍은 사진. 사진에는 그 막막함이 잘 담기지 않아 아쉽다. 한 바퀴를 빙 돌아, 계곡은 보지 못하고 등산을 마무리했다.
등산 후에는 근처 IOI몰에서 Cham C Kosong (커피와 밀크티를 섞은 음료에 단맛을 뺀 버전)을 마시며 열을 식혔다. 점심은 낙낙 (NAKNAK)에서. 말레이시아 출신 한국식 버거 체인점이다. 의외의 혼종이다 싶은데, 의외로 아주 맛있었다. 내가 이 버거 먹으러 와와산에 다시 가겠다 싶을 정도. 불고기와 치즈소스가 올라간 감튀. "I want to have some joy (낙)!"라고 외친 대가로 받은 쿠키 역시 맛있었다. 근데 사실 등산 이후에 안 맛있는 게 있으려나? 근본적인 질문이 불쑥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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