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살이 벽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바람은 레이스 커튼을 살짝 흔들며 세상의 일부분을 살며시 내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 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나는 한동안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것’이 삶의 방식이라고 믿었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졌고,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지는 듯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무엇처럼.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힘을 쏟아도 세상은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꼭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미래를 강제로 끌어당기려는 대신, 내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며 기다리는 것. 그것이 삶의 리듬에 맞춰가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내 방 한구석에 방치된 물감 세트를 꺼냈다. 먼지가 쌓인 뚜껑을 열고, 붓을 물에 적셨다. 한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물감이었다. 마음 한편에는 ‘더 중요한’ 일들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만큼 내가 원하는 것들은 늘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첫 붓질은 서툴렀다. 물감이 번지고, 선이 삐뚤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붓질이 이어질수록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색이 종이에 스며드는 과정을 즐겼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내가 하는 일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깨달았다. 기다림이란 단순히 멈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소소하게 해 나가는 시간이었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놓아주는 일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은 완벽하지 않았다. 색은 얼룩졌고, 구도는 엉성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손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여 손에 쥐었다. 기다림의 기술이란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시간을 믿는 것.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