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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miverse Oct 06. 2022

[프롤로그] 녹슬어버린 인생을 갱생하기 위해 쓰는 글

길 가다가 만원 한 장 주울 운도 없는 년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광고주가 한 달째 연락을 주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들의 입에서 ‘NO’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 정확히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없었다.

서른한 살을 먹고도 마음이 불안하면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여전히 있다. 요즘 내 손톱은 살갗과 손톱의 경계를 잃어버렸다. 고로 나는 심란하다. 결국 손톱을 물어뜯다가 실수로 찢어진 살갗에서 터져 나오던 피처럼 나의 인내심도 터져버렸다.

밥벌이를 하며 규칙들로 정했던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바로 이것이다.

'일에 감정적인 태도를 내세우지 않은 것'

이유는 간단했다. 프로가 되고 싶어서.

물론 노련함은 시간이 어느 정도 해결해 주겠지만 그렇다고 시간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를 실행했을 때 뚝딱해 내는 천재과가 아닌 걸 한글을 채 알기도 전 알아챘기 때문이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

올해 여름 신점을 보러 갔을 때 무당이 말했다.

길 가다가 만원 한 장 주울 운도 없는 년.

매일 아침 대문을 나서기 전 이 문장을 되새기며 길을 나선다. 하루에 수 십 번씩 괴로울 때 감정보다는 이성을 찾기 위해 이 문장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만약 문장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 그렇다면 나는 이미 나의 이름  자로 인정받는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을 것이고, 섹시한 스포츠카를 몰고 출근을 하겠지. ​헤어진 애인들을 그리워하며 숙성이   와인을 한잔 입에 머금고 창밖 너머로 한강을 내려다보며 우수에  있겠지.

그렇다. 나는 여전히 감정적인 태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다. 거친 욕설과 함께 책상을 탕 두드리며 ‘아니! X 발’이 먼저 나와 버리는 하수다.

그러나 애잔하게도 그런 분노는 잠시다. 이 사회에서 돈도 없고, 애인도 없고, 차도 없고, 혼잣말이 무척이나 많고, 음 그리고 또 뭐더라.

그래. 외롭고 평범한 나에게 ‘기회’라는 걸 준 그분들을 지탄할 수 없다. 자존감? 자존심? 을 떠나서 내가 증명하지 못한 거고, 반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래. 내가 부족한 탓이다.


​라고 생각이 되다가도 다시 책상을 ‘탕’ 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결국 컴퓨터의 하얀 화면에 문장을 썼다가 지우다 보니 어느새 긴 시간이 흘렀는데 한 글자도 채우지 못한 흰 바탕에 얄미운 문장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목을 추가하려면 클릭하십시오.]

분명 저 글자에게 표정이 있다면 하회탈 눈으로 혓바닥을 최대한 길게 내민 채 위아래로 날름 거리는 놈이다. 분노가 치밀었다. 벌떡 일어나 반대편에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동료의 자리를 봤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나 생각이 안 나. 못 하겠어.’

패배를 외치자 동료는 덤덤하게 웃으며 수첩과 펜을 꺼내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회의를 하기 전에 그간 울분을 막 토해냈다. 동료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리광을 받아줬다. 언제가 기점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부족하고, 문제점인지, 무엇을 보충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하며 써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얄미운 ‘제목 어쩌고 혓바닥 놈’을 시원하게 지워버리고 자료들을 끌어오고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동료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카톡을 써 내리다가 문득 숙취에서 깬 다음날 아침처럼 대화의 장면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장면 속에 나는 지속적으로 ‘알죠? 그 느낌’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아 그니까 있잖아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등 느낌적인 느낌의 문장을 싸지르고 있었다.

충격에 빠져 이번에는 깊숙하게 최근의 나를 회상했다 그간 사람을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워 예상되는 활동 반경 안에서 생활하다 보니 사람의 눈을 보며 대화가 줄었고, 나도 팔리는 걸 만들고 싶다며 중독자처럼 동영상만 시청하다 보니 읽는 것을 멀리했다. ‘요즘 애들’이라 칭하며 짧은 것을 소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서 긴 영화를 자꾸 요약본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언어의 퇴화와 함께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인간이 된 걸 직감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읽어 낸 사람들 머리 위로 켜진 물음표가 보이지만 이게 바로 기. 승. 전. 결 없는 글을 쓰게 된 징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건 부끄러운 내 퇴화의 증거다.

집에 돌아와 밥을 쑤셔 넣으며 일에 대한 답답함,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 등 신기루 같은 단어들을 다 제쳐두고 그간 퇴화된 내 삶을 함께 씹어봤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한다면서 나는 정작 귀찮아서, 빠른 소비를 위해 많은 것들을 제쳐두고 살았던 게 아닌가. 그러다 보니 나의 감정조차도 설명하지 못하는 대화를 하고 있었고, 이 글 또한 두서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히 기술로 쉽게 표현할 문제가 아니다. 부끄럽게도 기술보다 더 공포스러운 단어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니까 나는 기능이 점점 퇴화되고 있었다.

‘서른한 살, 나는 무언가 없는 OOO이 아니라, 무언가 없어지고 있는 OOO이었다.’

사랑도, 언어도, 가치관도, 신념도. 쓸 수 있는 희망적인 단어를 모조리 모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단어들이 점점 나에게서 사라지고 있었다.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소멸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저문다는 자연의 섭리는 당연하지만 어떻게 그 속도를 조금씩 늦출 수 있을까.

거리를 걸으며, 변을 보며,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그래. 다시 쓰자.’

문득 위에 했던 올해 여름 봤던 신점이 생각났고 무당의 말이 떠올랐다.

‘길 가다가 만원 한 장 주울 운도 없는 년’

시간의 속도를 늦출 수 없고, 나의 노화를 멈출 수 없다. 무한함을 열망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점쟁이의 ‘운도 없는 년’ 뒤에 붙었던 말이 번뜩 떠올랐다.

‘그래도 뭐든 하면 할 년’

그리고 서둘러 컴퓨터를 켰다. 그간 내 생활 반경만큼 좁은 몇 개의 단어를 조합하여 글을 써 내려가 가기 시작했다. 블로그를 켜고, 정리를 하고 프롤로그라는 장황한 단어를 붙인 글을 탄생시켰다.

그니까 여전히 광고주의 확답을 얻지 못했고,

아마추어이며, 여전히 없는 게 많지만 확실한 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없어지고 있는 것들을 소중히 돌봐주어야 조금은 퇴화의 속도를 역행하고 자라날 수 있다는 것.

귀찮아도 쓰고 보며 찍자. 주변을 기록하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신기루 같은 목표를 좇기보다 나만의 내재율을 찾아보자는 결심을 했다.

언젠가 다시 사람들의 눈을 보고 대화하기 위해.

폐쇄적인 문장만으로 나를 표현하지 않는 그날을 위해

사랑의 언어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하기 위해.

그때까지 연재될 아주 조금 부끄럽고

퇴화된 어느 인간의 이야기.

시작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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