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말 중에 어떤 말들은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는 파편처럼 남는 것들이 있다.
비록 거창한 말은 아니었을지라도 나에게는 인생의 가이드와 같이 오랫동안 남게 된 그런 말들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수학선생님이었다. 덩치가 꽤 큰 분으로 목소리도 걸걸해서 별명이 조깡이었다. 그렇다! 그분 성이 조 씨였는데, 깡패 같다고 해서 그런 별명으로 불리었다. 별명은 그랬지만 실제로는 매주 수요일 오후마다 교도소에 가셔서, 재소자들에게 수학을 가르치시던 그런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훌륭한 분이었던 거다.
언젠가 그분이 우리가 나태하다고 생각하셨었는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란 건 말이야,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이다."
뭐 엄청 거룩하거나 멋진 말은 아니었음에도 중2였던 나에게 꽤나 와닿았던지, 지금까지 내 삶의 참고집에 남아있는 말들 중 하나로 있다. 살아오다 보면 나를 포함해서 실제 사람이 그렇게 되기 십상인 게, 각 단계의 유혹을 뿌리치는 게 쉽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이 둘은 한 끗 차이로, 더 나은 삶을 찾고 노력하는 것과 자신이 더 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도 한 끗 차이다. 다수에 의해 보편적으로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길은 둘 중 하나가 된다. 그게 보편적 양식이 되는 길 또는 금지된다던가, 있던 혜택이 사라지는 그런 길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몇 년 전부터 여름복장의 자율화가 있었는데, 남자의 경우 여름에 반바지와 뒷끈이 있는 샌들을 신고 다녀도 된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DJ DOC의 노래처럼 되었다)
긍정적 변화이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의 경우는 반바지를 입고 출근해 본 적은 없는데, 좀 더 젊은 세대들에서는 반바지, 샌들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순간 극 소수의 인원이지만 운동복에 슬리퍼도 보기기 시작했다. 이건 아닌데... 싶었는데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반바지/샌들과 무슨 차이냐고? 또 여성은 슬리퍼 비슷한 신발도 허용하는데 왜 안되냐고.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회사 아침 식사가 유료에서. 1인당 1식에 한하여 무료화 되었는데, 아침 식사 후, 점심까지 커버하기 위해 하나를 더 챙겨가는 그런 일이 종종 생겼다. 사내 게시판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는데, 이게 왜 갑론을박이 되어야 하는지도 나는 의아했다.
앉으라고 해줬더니 누운 격인데, 이러다가 자는 사람도 나올 추세다. 그리고는 자는 사람이 말하겠지. 눕는 것도 허용했으면 자는 것도 암묵적인 허용 아니냐고...
사람에게 있어서 자유라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이 누리는 혜택이 되어야 한다. 그 미묘한 경계의 선을 넘지 않고, 지킬 줄 알아야 방종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되는데, 경계의 선을 넘는 것에 매우 당당함이 묻어있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때로는 그것에 제재가 생길라치면, 모든 경우에 대해 세세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에서 경우의 수가 천문학적이거늘 어떻게 세세하게 모두 선을 그을 수 있단 말인가 싶지만, 여러 명이 당당하게 외치면 뭐라 할 말을 잃게 될 것 같다.
삶에서 미묘한 그 선은 수학에서 미분을 거듭해서 최적의 해를 찾아내듯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 판단의 자유에 맡기되, 타인과 다수에 대한 배려심에서 결정되는 것일 것이다. 때로는 시대가 변하여 지난날의 그 선이 조금씩 변경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타인과 다수에 대한 배려심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변치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선을 지킨다는 것! 전투에서도 Line이 무너지면 위험하듯,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암묵적인 교리가 아닌가 싶다. 내가 편하다고 선이 무너지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누려왔던 혜택이 사라지면, 언젠가 그 선이 다시 그리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