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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ice U Dec 17. 2022

세상의 모든 기러기 아빠에게

내 편인 듯, 내 편 아닌, 내 편 같은 내 남편

미국에 오고 나서 별일 아닌 일로 남편과의 다툼이 잦아졌다. 나는 영어 스트레스 속에서 모든 일을 다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남편은 홀로 한국에 남은 외로움과 상실감 때문인지 세세한 부분까지 지적하는 일이 잦았다. 전화로 싸우다 보니 화해도 쉽지 않았다. 같이 있을 때는 싫으나 좋으나 어쨌든 얼굴을 마주쳐야 하니 하루나 이틀이면 풀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크게 느껴졌다. 이래서 기러기 생활하면 부부 사이가 안 좋아진다고 했나 보다. 시간을 좀 두고 찬찬히 생각해 보면 도저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다 보니 날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대방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오늘은 ESL 클래스에서 중간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이번 시험 성적이 무척 중요하다고 매 수업시간마다 강조하셨다. 왜냐하면 첫 레벨테스트보다 향상된 성적을 거둬야 센터의 운영 취지를 인정받아 펜실베이니아 주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좀 있었다. ESL 마지막 레벨이어서 시험 문제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헷갈리는 문제가 많아서 시험을 끝내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특히나 시험 도중 지난번 파트타임 면접을 본 곳에서 합격 통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정규직(Regular)이 아닌 대체인력(Substitute)라고 했다. 이 역시 기쁨보다는 왠지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두 겹의 어정쩡한 마음이 쌓인 채 시험이 끝난 후 ESL 수업에서 사귄 한국인 친구, 일본인 친구와 함께 커피숍으로 가서 푹풍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겨울방학 얘기를 나누다가 근사한 여행 계획을 가진 두 친구에 비해 여행 갈 여유도 없고 같이 갈 남편도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세 겹의 우울한 감정이 쌓여 있는 나에게 그날 저녁 남편과의 통화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 효과를 가져왔다.


저녁 메뉴로 라볶이를 먹는다고 하자 남편은 요즘 매일 면요리만 먹는 것 같으니 밥을 먹으라고 했다. 아침도 쿠키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먹이지 말고 계란 스크램블이나 소시지로 대체했으면 좋겠다는 잔소리가 이어지는 순간 나는 내 평점심에 한계를 느꼈고 결국 큰소리로 싸우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는 나에게 응원은 못해줄지언정 애들까지 못 챙긴다는 식의 말을 들으니 나의 자격지심이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요즘 왠지 모르게 내가 하찮은 존재로 느껴진다. 언어가 서툴다 보니 "쏘리(Sorry)"를 입에 달고 살면서 남편한테 생활비를 조달받는 입장이다 보니 잉여인간이란 느낌까지 들 때가 있다. 한국에서 같이 맞벌이를 하면서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생각의 근본적 차이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하물며 다른 공간,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데 그 이해도가 오죽하겠는가?


마음이 평온할 때 남편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고맙다.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혼자 희생하며 뒷받침해줘서 미안하면서도 정말 고맙다. 반대 입장이 됐다고 생각하면 나 역시 남편보다 더 너그럽고 관대했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 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는데 그 희생하는 사람이 나일 경우가 많았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너무나 많은 일을 참아내고 감내해 내야만 우리 가족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에 오고 나서는 남편이 희생하는 역할이 됐다. 나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땅에서 너무나 힘들지만 동시에 새로운 도전들이 나를 자극하고 발전시켰다. 영어를 배우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비록 몸은 편할지 몰라도 그 자리 그대로 머물면서 가족의 빈자리만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나도 그 상황이 돼보지 않았으면서 감히 남편의 심정이 어떠하리라 단언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린 한 가족이고 힘들고 아픈 만큼 더 행복한 시간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러기들이여, 그대의 희생은 헛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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