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 최악의 시기에 달러돈을 벌다
내가 받은 J1 비자는 내 연구와 관련된 파트타임을 미국 내에서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한인언론사 구인란을 검색했다. 역시나 뉴욕이나 뉴저지, 위싱턴 DC 등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언론사들이 있었다. 팬데믹이 끝나고 재택근무는 대부분 사라지고 출퇴근만 할 수 있는 일이라 원거리는 무리였다. 그중 눈에 띄는 공고가 있었다. 필라델피아 한인주간지에서 기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미국에 발 디디자마자 어떻게 바로 일을 할 수 있겠냐만은 반신반의의 심정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놀랍게도 주말이 끝난 월요일 바로 연락이 왔고 너무나 적극적인 그들의 구애에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어리둥절했다. 그들에게는 한국에서 20년 동안 언론사에서 일한 나의 경력이 너무나 매력적인 조건이어서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바로 잡아야 했다고 했다.
모든 게 낯설기만 한 나에게 그들은 내가 원하는 조건을 최대한 맞춰주려 노력했다.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말이다. 믿기지 않았지만 난 미국에서 기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오자마자.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계약서에서 사달이 났다. 그들은 구체적인 조건을 적시하는 데 소극적이었고 결정적으로 퇴사 후 반경 100km 내 동종업계 근무 금지 조항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물론 내가 미국에 이민 온 게 아니기 때문에 2년간 이곳에서만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다지 문제 될 조항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 일을 누가 알겠는가? 내가 미국 생활이 맞아서 영주권까지 따게 된다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다면? 가능성이 낮을지라도 100%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설렘도 잠시 나의 첫 구직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련은 그다지 남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내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지만 영세 업체이다 보니 업무 분담이 안 돼 있어 기자 혼자서 취재, 편집, 교열, 광고 등 올라운더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연봉 역시 광고 커미션을 빼면 그다지 후한 편도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남편 없이 나 혼자서 아이들을 케어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렇게 쓰라린 경험을 한 뒤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봤다. 스쿨잡(School Job)이 딱이었다. (다행히 미드웨스트대학에서도 아이들 학교 파트타임 같은 일은 승인해 줄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푸드 서비스(Food Service) 일은 영어 구사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동료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미국 직장 문화를 배우기에도 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ESL 수업을 듣고 있는 리터러시 센터(Literacy Center)는 나의 구직 활동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그들은 이력서(Resume), 자기소개서(Cover Letter) 작성은 물론, 준비해야 하는 서류에 관한 사항도 친절히 설명해 줬다. 심지어 나의 ESL 선생님은 모의 인터뷰까지 진행해 주셨다. 그 결과, 나는 대체인력(Substitute)에 채용됐다. 정규직 직원이 일을 못하는 날에 대신할 수 있는 인력을 말한다. 정규직이 아니어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난 미국 내에서 일한 경험이 전혀 없거니와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다.
인터뷰 통과로 힘든 일은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립학교 직원 채용 시 필수항목인 결핵 검사(Tubercolusis test)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이다. 금요일 오전에 스킨검사를 진행했고 72시간 내에 반응을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 월요일 오전 7시 30시에 예약을 했다. 다른 검사를 하는 게 아니라서 8시 전에는 집에 돌아와 8시 20분에 스쿨버스를 타는 아이들 등교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양성. 영어로 설명을 들으니 내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생각도 실감이 나지 않고 오직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 내 머리속에 가득했다. 그들은 흉부 엑스레이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비용부담은 학교 측이 한다고 했다. 내가 좀 급하다고 했지만 하필 엑스레이 기기 작동에도 시간이 걸리고 내 정보 입력에도 착오가 있어 시간이 배로 소요됐다. 그렇게 시간은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겐 휴대전화도 없고 집전화도 없어서 여기 사정을 알려 줄 수가 없었다. 8시까지 온다고 철썩 같이 말했는데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한 엄마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을지 내 입속은 바싹바싹 말라갔다. 하지만 내 영어 실력으로 그들을 재촉하기도 뭐 하고 재촉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엑스레이를 찍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나서 결과지를 받을 생각도 못하고 바로 나와서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향했다.
정각 8시 20분. 다행히 아이들은 아이패드로 아빠와 통화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서 견딜만했다고 했다.(전화기 연동이 돼 있어 걸 수는 없지만 받을 수는 있다) 서둘러 아이들 가방을 챙겨서 스쿨버스에 태웠다. 떠나가는 스쿨버스 뒤차창을 바라보노라니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별일 없이 잘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후에 네이버 미준모 카페에서 결핵 양성을 검색해 보니 한국인은 스킨검사 시 양성판정이 잘 나온다고 했다. 그랬던 거구나. 별일 아니었던 거구나. 놀랐던 가슴을 다시 한번 쓸어내렸다. 혈액검사도 있는데 비용이 더 비싸다고 했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결핵 양성자가 되다니! 정말 내 인생의 놀라운 일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