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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사과 Oct 02. 2023

2. 메리 크리스마스, 플리즈

어쩌면 조금 경건한 의식







나는 늘 크리스마스를 염두에 둔다. 크리스마스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도, 제발 크리스마스가 빨리 와주길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서비스직 종사자인 나에게는 크리스마스도 일하는 날, 그중에도 바쁜 날이기 때문에 휴일의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름이 지나 긴소매 옷을 입고 겉옷을 챙기게 되는 날씨가 되면 자연스레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 이유는 별거 없다. 곧 그 해가 끝나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눈이 오면 거리가 얼고 강아지가 걷기 싫어한다. 녹은 눈이 바짓단을 적시고 더럽히기도 한다. 그냥. 그냥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다가 금방 크리스마스가 오겠구나. 이러다가 금방 한 해가 가겠구나. 이러다가 또 내년이 오겠구나. 이러다가 또 금방 한 살을 더 먹는구나. 날이 차지면 그런 생각을 슬슬 하다가, 11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12월이 되면 준비한다. 크리스마스를. 그날은 어떤 요리를 해 먹을지, 오븐으로 뭘 구워낼지 후보를 정하고 재료를 정리하곤 한다. 나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줄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하고 없다면 나의 취향만을 고려한다.

그러다 보면 금세 크리스마스다. 물론 나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보다 조금 더 이르다. 25일엔 보통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 전에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부디 메리 크리스마스이길 기원하며 그날 볼 영화를 고르고,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 위해 며칠 전부터 캐롤을 듣고, 좋아하는 와인샵에 갈 일정을 정한다. 강아지에게 입힐 크리스마스 코스튬을 쇼핑하고 귀여운 크리스마스 엽서나 소품이 눈에 띄면 덜컥 사서 방 한구석에 장식하기도 한다. 테이블에 올라갈 만한 작은 크기의 트리는, 매년 고민하지만 결국 장바구니 안에서만 머무르다가 집으로 오진 못한다. 너무 기분 내는 것 같잖아.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끝나버리면, 미니 전구를 줄줄이 두른 걔를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도 고민이고.

열심히 준비하면 이제 크리스마스다. 영화는 보통 해리포터 시리즈를 본다. 언젠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틀었다가 울적해진 적이 있어서 무조건 해리포터를 선택한다. 운 좋게 크리스마스에 쉬게 되면 이브 날부터 영화 채널에서 방영하는 걸 볼 수 있지만, 아니어도 좋다. 종일 나 어릴 땐 왜 부엉이에게 호그와트 입학 편지를 받지 못했을까, 아쉬워하다 보면 저녁 즈음이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음식을 준비한다. 따뜻한 국물 요리일 때도 있고,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 수도 있다. 음식을 하는 동안엔 음식 생각만 할 수 있어 좋다. 호그와트도, 부엉이도 생각하지 않고 음식만 생각한다. 이 음식의 맛이 나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책임진다며, 아무도 시키지 않은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기도 한다.

음식이 준비되면 테이블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 잘 자란 몬스테라 화분에 빨간 리본을 묶어두면,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트리 느낌을 낼 수 있다. 천장에 붙은 방 불은 끄고, 테이블 등을 켜면 어쩐지 조금 차분하고 고요한 나만의 식탁 완성이다. 준비한 와인을 유리잔에 따르고, 예쁘게 음식을 올려놓고, 트리 모양 털모자를 씌운 강아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조용히 앉아 나만의 의식을 행한다.

크리스마스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공휴일일 수도, 연인과의 데이트 날일 수도, 종교적 기념일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다음 해를 준비하는 어떤 상징적인 날이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도 한 해가 마무리되려면 며칠 남지만, 그 며칠은 눈 깜짝할 새 지나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크리스마스를 단단히 채워놓지 않으면 얼렁뚱땅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혼자여도 좋고, 누군가와 함께여도 좋으니 쌀쌀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때부터 설레발 치며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 그날을 위해 준비하고, 기대하면서, 새롭게 다가올 다음 해, 새해, 한 살 더 먹을 나에게 나름의 예의를 갖추는 거다. 그러니 메리 크리스마스, 플리즈이다.


그나저나, 나 크리스마스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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