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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올 Feb 08. 2024

3화. 고향집에 대한 기억

 아파트 공화국에서 단독주택 예찬론자가 되어 단독주택 살이를 논하자니, 고향 집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농촌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한 고향 집 주택 살이에는 여러 가지 기억들이 공존한다. 좋은 기억보다는, 누추해서 창피해서 숨기고 싶은 집, 얼른 어른이 되어서 벗어나고 싶은 집이기도 했다. 농사일에 찌들어 고생만 하시던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의 집에 비해서도 정말 초라하기만 했던 우리 집.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집은 당시 마을의 집 중에서도 진짜 옛날 집이었고, 초라했다.

 한국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반쯤 지붕이 날아간 집을 피난에서 돌아온 할아버지가 급한 대로 지붕만 새로 얹어 살게 된 집이었다. 다른 집들은 폭격으로 무너져 버렸지만, 우리 집은 다행히(?) 지붕만 일부 날아가고 멀쩡했다고 한다. 피난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시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차라리 그때 우리 집도 폭삭 내려앉았으면 친구들 집과 비슷하기라도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벽지가 뜯긴 틈으로 검게 불에 타고 일부는 붉은 테라코타가 되어 있던 흙벽이 보이곤 했다. 전쟁의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있던 검붉은 흙벽이 아직도 기억난다. 


고향집에 대한 사진을 찾아보니 거의 없고, 기억에만 의존해 그리기 어려워 가장 비슷한 시골집 사진을 자료로 그려 보았다. 

      

 그러다가 마을 친구들 중 하나둘씩 집을 새로 짓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그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슬래브 지붕을 가진 빨간 벽돌 양옥도 한 집 두 집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 우리도 집을 짓자고 부모님을 졸랐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오 남매나 되는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부모님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부모님이 오히려 감사하다. 없는 살림에 다른 것을 모두 포기하고 자식들의 교육에만 쏟아부었기 때문에 나와 동생들이 모두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불편을 참으며 집을 짓지 않으신 게 오히려 참 감사하다. 그 당시 우리 마을만 해도 마을에서 나름 땅 좀 갖고 있고 부자라고 어깨 힘 좀 주고 다니던 어른들도 딸들을 중학교 졸업시켜 인근 구미의 공장에 보내는 일이 많았다. 우리 집은 양식도 겨우 나올까 말까 한, 작은 논 한 떼기밖에 가진 게 없었고, 아버지 어머니는 평생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셨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감내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가난한 집 오 남매 맏이인 나는 감사하게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고 대학으로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마을에 양옥집이 들어서면서 그 영향을 받아 아버지는 부엌에 싱크대도 넣고 비닐 바람막이도 만들고 다른 집에서 버린 새시도 얻어 달고 흙벽 일부도 시멘트 벽으로 교체하는 등, 집을 여러 번 보수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집은 오히려 누더기가 되어 갔다. 불을 지피던 야외나 다름없던 부엌이 싱크대가 있는 실내 공간인 주방으로 바뀌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구들 방에 보일러가 놓이는 등 생활은 조금 더 편해졌지만 집은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처럼 누더기가 되어 갔다. 예쁘고 단정한 걸로 치면 차라리 정갈한 흙집이 더 예쁠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한 번도 단정하고 정갈한 흙집인 적은 없었다. 식구 많은 집이다 보니 농사 도구와 각종 가재도구로 늘 어설프기만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학교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겠다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데려오기 싫었다. 어쩌다 담임 선생님의 가정방문이라도 있는 날이면 노심초사했다. 그 시절에는 학기 초 가정 방문이 종종 있었다. 어느 날은, 동생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예고하지 않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청소조차 못하고 담임 선생님을 맞이했던 그날 밤, 동생은 내 앞에서 엉엉 울었다. 나는 밤새 그런 동생을 달랬다. 우리 부모님들은 집이 가난해도 훌륭하신 분들인데, 그런 부모님을 만나고 가셨으니 분명 좋은 기억을 갖고 가셨을 것이라고 나는 밤새 동생을 다독였다. 


 우리 중 한 명은 건축과를 가서 집을 짓자고 동생과 다짐하곤 했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건축과를 가지는 않았다. 사실, 집을 짓는 것은 건축과를 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돈이 있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는 

 “니가 가라~ 건축과!”

라며, 서로에게 미루었지만, 그런 다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고향집에 대한 사진을 찾아보니 거의 없다. 20년 전 아기였던 딸과 젊었던 우리 엄마가 고향집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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