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시작은 여기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누군가 내게 “꿈이 뭐냐”고물으면 나는 언제나 “시사교양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라고 답했다. 26살이던 2016년, 나는 시사교양프로그램 조연출이 되었다. 꿈을 이루진 못했다. 내가 꿈이라고 답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건 ‘방송국 정규직 직원’이었지 ‘고용형태가 어떻든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깨달았다. 누군가 꿈을 물었을 때 “정규직으로 시사교양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어야 했다는 걸.
지상파 파견계약직 조연출로 일을 시작했다.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언론사 공채 입사 준비를 시작한 지 2년 6개월이 지난 후였다. 수십 번의 탈락에 지쳐있던 나는 전주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을 가기 전 날, 습관처럼 들어간 언론고시 커뮤니티에서 유명 시사교양프로그램의 프리랜서 조연출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프리랜서’라는 단어에 안심해 지원서를 제출했다. ‘X년 계약’이 아닌 게 마음에 들었다. 공채가 뜨면 지원을 해야 하는데 계약직이 된다면 중간에 그만둘 수 없을 거 같았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나에게 계약기간은 절대로 채워야 하는 기간처럼 느껴졌다. (회사가 정규직 혹은 무기계약직 전환을 시켜주기 싫어서 정해놓은 기간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 다음 날 아침, 기차가 평택역을 지날 때쯤 전화가 왔다. “면접 보러 지금 올 수 있어요?” 3년 차 취준생에게 면접 거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바로 기차에서 내렸다. 면접을 보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장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라고 했다. 3년 차 취준생은 이번에도 역시나 거절을 못했다. 이런저런 배움으로 정신없이 며칠을 보내던 중 언론고시 커뮤니티에 채용공고를 올린 선배로부터 고용형태가 프리랜서가 아닌 파견계약직이 될 거라는 통보를 받았다. 경험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걸 왜 채용공고에 안 썼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파견업체 직원을 만나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경험 쌓고 1년 11개월 후에 공채 지원 다시 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며. 방송국에서 주는 임금의 일부를 파견업체에서 떼가는 구조였다. 내가 일하게 되기까지 파견업체는 내게 해준 게 없었는데. 파견업체 사람은 그 후로 본 적이 없다. 통장에 찍히는 기업명으로만 존재했다.
파견직 조연출 생활은 서러웠다. 출입증부터 정규직들의 그것과 달랐다. 목걸이 색만 봐도 누가 정규직이고 누가 비정규직인지 알 수 있었다. 방송국 안에는 정규직 출입증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들이 있었다. 비정규직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곳이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을 하기 위해 꼭 들어가야 하는 곳도 출입을 제한해 놔서 그때마다 정규직 선배의 출입증을 빌려야만 했다. 명절 때 받는 선물도 달랐다. 나는 본사가 아닌 파견업체에서 주는 선물을 받았다. 그나마 받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보조작가 친구들은 소속이 없어 아무런 선물도 받지 못했다. 정규직 선배와 똑같이 연장노동, 야간노동을 해도 수당을 받을 수 없었다. 파견업체 직원들은 포괄임금제를 적용받았기 때문이다. 8개월을 버텼다. 내가 진짜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 건지 생각을 하고 싶었다. 주 6일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사람에게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눈앞에 근사한 답이 가득한 상황에서는 굳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어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살면서 쌓아왔던 믿음에 균열이 생길 때, 사람들은 드디어 다르게 보기를 감행한다. 다르게 생각하기를 실천한다.” - 오은(시인)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3206816?sid=110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쌓아왔던 믿음에 균열이 생길 때마다 내가 할 수 있을 게 무엇일지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이 모여 민언련에서 노조를 만들 수 있었다. 결심의 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 글은 세 편으로 나눠서 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