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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Nov 26. 2022

EP. 6 < 조사 >

22.11.26 土 연극 조사 관극기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님들이 예술집단 '풍작'이라는 이름을 걸고 연극 <조사>를 올렸다. 휴학 이후 꽤나 오랜만에 관극이라 신이 나기도 했고 연출의 말의 밑으로 이어지는 질문들이 흥미로워서 부족하겠지만서도 나만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피력해보고 싶었다.


커피를 평가하고 향미를 표현하기 위해 커핑이라는 일종의 훈련을 통해 감각을 단련하듯, 공연을 다채롭게 볼 수 있는 눈도 훈련으로 단련되는 것인데 그동안 꽤나 소홀했다. 다 적고 보니 너무 단편적인 면만을 바라보고 글을 쓴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사(助詞)는 낱말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품사다. 의미상으로는 독립된 구체적 의미를 표시하지 못하기에 관념사에 부속되는 관계사인 동시에 기능상으로는 자립어에 부속되어 그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거나 그 의미를 덧붙여준다.' _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능상으로 자립할 수는 있지만 결국 의미를 띠기 위해서 어딘가에 붙어야만 하는 품사인 조사는 마치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인간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의 생존 본능 때문에 혼자서 살아가는 것보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안정적이라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명백한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이 연극은 이 시대의 조사(助詞)들을 조사(調査)하며 막이 오른다.



사회는 높은 곳을 항해 날아오를 때

우리는 더 낮은 곳을 기어가고 있다.



극의 초반부에 두 명의 조사원들은 제4의 벽을 비집고 들어와 관객들과 소통을 한다. 진호는,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매장에 영업제한이 걸리고 그를 해제하기 위해 조사에 참여한다. 극 중에서 진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MZ세대이자 가장 낮은 자리에서 폭풍을 맞닥뜨린 존재로 대표된다. 조사원들은 진호가 사회의 부속품으로서 사회의 유지와 체계의 존속에 올바르게 기능하고 있는 인간인지 조사를 통해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고, 아니라면 바로잡는 행동을 보인다. 하나, 조사원들로 대표되는 사회의 심문은 무딘 날이 무를 베듯 무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윗분이라 부르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조사원들이야 말로 여지없는 기계의 부속품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조명과 액팅을 통해 그렇게 표현한 듯하다) 게다가 영업정지 처분을 해제하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질수록 그들이 하는 조사는 진호에게 당위성 없는 신문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한편, 개인적으로 진호가 '동의의 자세'를 향한 그 흐름을 설득하는 과정의 깊이가 조금 얕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시로 나온 진호의 이야기는 최저시급을 받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한 명의 근로자를 대변하는 것 치고, 본인이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행했던 구체적인 노력을 근거로 들며 설득하는 과정이 누락됐거나 흐릿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진호가 조사원들에 그저 대항하며 당황과 짜증,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는 행동만 남았다고 기억한다. 사회에 굴복한 하나의 기능자로서 부덕의 소치만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해명 없는 주장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누구도 등장인물의 손을 들어주지 않게 만든다. 또한, 관객에게 진호의 흐름을 명료하게 설명해내지 못했을 때, 진호 본인의 지분 없이 극 후반 변사의 언변에 휘둘려 주체적인 삶의 가치를 깨닫고 손목을 내리찍고 마는 한 명의 인간이 되어버린 것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혹은, 마침내 극 중에서 '동의의 자세'를 취할 때, 그 마저도 사회의 억압을 못 이겨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내 머릿속 진호의 흐름이 드문드문해서 지금 이 의견을 누구에게 명확히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글을 쓰는 입장에서 제작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시간만 있다면 한번 더 보고 납득하고 싶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능력 있는 자가 자본을 취하고 능력 없는 자는 도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순리가 됐다. 다만, 진호는 사회적 기능을 하지 않았던 존재가 아닌, 경쟁 사회에 치여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아직은 미성숙한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도,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진호는 기계의 부속품인지 뭔지 그 따위의 것들로 자신을 규정하기보다 사회 속의 개인, 인간 전진호 본인을 마주하고 '순응'했으며, 손목을 내리친다는 본인 나름의 선택이자 '저항'을 한다. 그를 통해 진호라는 인간의 주도적 자세를 표현했다고 이해했다.



우리는 사회의 부품일 수밖에 없다는 물음에 나는 거절의 자세를 취하겠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도치 않은 공동체가 형성되는 우리는 사회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지만, 사회의 부품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사회는 유기적이다. 현재의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적응이 유기적이고 융통성 있을수록 많은 이점을 가져다주겠지만, 유기적이지 않더라도 분명 괜찮다. 개인의 선택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사회의 적응만으로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윤택하진 않더라도 만족할 수 있고, 부유하지 않더라도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여기 그 어느 곳에도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쓸모'라는 것도 사회적 존재들의 가치판단에 의해 형성되는 상대적 개념인 것일 뿐이며, 사회의 어느 집단에서는 쓸모를 따지지 않을 수도 있다. 조사, 증명. 필요 없다고 본다. 우리는 명령에 순응하고 단순히 버튼으로 작동하는 고철 따위가 아닌, 조금은 모나고 연약해도 갈등으로 성장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폭풍이 몰아칠 때면 각자 개인만의 개성과 가치관과 방식으로 삶을 선택하고, 영유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현명한 삶의 방향이라는 것에 나는 동의의 자세를 취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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