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모기와 언제 폭우가 오고 언제 천둥 번개가 칠지 모르는 숭한 날씨의 콜라보. 퇴장해야 할 배우가 퇴장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 관객들은 의아해하며 감정 섞인 말을 내뱉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극장은 출입구가 없다.
올여름의 미련은 유난히도 끈질긴데, 이제 와서 어르고 달래 봐야 소용없다. 올 초에 벚꽃 졌던 모습을 되새겨보면 여름 놈과 겨울 놈이 땡강부릴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다. 여차저차 여름 놈이 아지랑이로 흩어졌고 나는 조금은 뒤늦게 잘 익은 황혼의 정취를 온 맘 다해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만, 바로 어제, 듬성듬성 세워진 가로수의 머리털이 빠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채 무르익지 못하고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푸르른 이파리도 꽤나 많이 보였다. 양력 11월 8일, 사실 일주일도 더 전에 이미 입동에 진입했다. 절기상 가을은 이미 한참 전에 떠나갔지만 마음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랄까 절기 부조화(?)가 왔달까. 가을은 지나갔지만 인중에 아직 초가을 나뭇잎의 풋내가 얹혀있는 것만 같았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낙엽의 건조하면서도 달큰한 향기는 나도 모르는 사이 한가을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은행 손바닥과 손을 맞대고, 단풍 손가락과 깍지 끼는 것이 어렴풋한 추억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쓰름한 입맛을 다신다. 뒷맛이 썩 유쾌하진 않다.
비록, 이번 가을걷이는 설익은 채로 끝나버린 것 같지만 어쨌거나 지금껏 그랬듯 한 해는 끝을 향해 익어가고 있다. 벼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지금의 나는 얼마나 익었을까. 아직도 목대를 초록빛으로 빳빳하게 세우고 있을까. 아니면 황금빛으로 고개를 숙인 채 가을바람에 살랑이고 있을까. 한 움큼 돌이켜보고자 한다.
나에게 작년과 올해 초는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다짜고짜 상경을 해서 한참을 헤매고 서성이느라 마음에 무언가가 들어앉을 빈자리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그러던 와중 삶의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다양한 모양의 사랑을 보았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거리낌 없이 낡고 허름한 것들을 바라볼 줄 알고, 사소한 것들에도 진심 어린 마음을 다할 줄 아는 것 그리고 편견 없이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그런 짙고 푸르른 마음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이자 가치이다. 재능 기부, 제주 바다 플로깅, 안내견 그리고 엄마의 반찬 등등. 그 사랑 어린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올랐다. 나도 그들처럼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만 상념이 가득 찬 마음으로는 그 무엇도 건네줄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랑의 언저리에 머무르며 손 뻗어 잡을 수 없는 아득한 별을 잡으려 애면글면 댔을 뿐이다.
어느 저녁, 자문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사람, 사람...
문득 그 사람이라는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조금 모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받침이 둥그런 '사랑'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나와 같이. 그러면서 이윽고 모난 받침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누구라도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기에 사랑의 언저리에만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랑 어린 마음을 나누어주려는 것 자체가 사람으로서 나누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사랑은 가닿으려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자연히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나는이 모든 생각들을 가사로 옮겨 <사랑 어린 마음>이라는 자작곡을 쓰게 됐다.(김그늘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있다)
이 마음을 다시금 되새겼던 것은 11월 19일 토요일, 독립서점이자 아트플랫폼인 스트랭고에서 했던 내가 속한 봄끌림이라는 어쿠스틱 밴드의 자그마한 공연을 통해서였다. 제목은 <이공이이 일기장>으로, 2022년 한 해를 돌아보며 멤버 각자의 마음속에 적어놓았던 조금은 진중하면서도 깊은 이야기들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는 음악 공연이었다. 타인의 삶과 경험이 담긴 책을 읽을 때 되려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듯이,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이 본인의 올 한 해는 어땠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도 담긴 그런 공연이기도 했다. 이 공연에서 나는 자작곡 <사랑 어린 마음>이라는 곡을 쓰던 당시에 느꼈던 마음들을 감히 내놓았고 담담하게 읊어냈다. 올 한 해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가치는 월급, 지위와 위치, 사회적 평판, 인간관계 같은 것들이 아닌, 바로 '사랑 어린 마음'이었음을.
내가 바라는 행복한 삶의 모습에 다다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내 자신의 생각이 무르익고 단단해지는 것이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을 향해 몇 걸음 정도는 걸어간 기분. 한 해의 끝자락, 그중에서도 이 가을의 끝에 찾아온 가장 큰 수확은 아무래도 이 사랑어린 마음을 가슴 깊이 생각해보았다는 것이겠다. 사랑 어린 마음에 가닿으려는 그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고, 그 모든 게 소중하다고 깊이 생각해보았다는 것이겠다. 설령, 완연한 가을이 아니었고 설익은 채로 황혼이 저물었을지라도, 나의 한 해는 꽤나 가치 있는 과실을 맺었다고 굳게 믿는다. 사랑 어린 마음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남은 몇십여 일간의 밤들은 달큰하게 익은 마음을 끌어안고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내년엔 또 새로운 씨를 뿌리고 알찬 과실을 거둘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소소하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