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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Oct 12. 2024

안에 사람 있어요!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제가 어렸을 적,

그러니까 대충 지금으로부터 약 20~30년 전만 해도 세상은 지금과 꽤 많이 달랐습니다.


아직 학업의 부담도 없던,

권리는 풍족하고 의무는 그저 '밥을 잘 먹는 것' 정도였던 참 좋았던 그 시절.


저 간단한 의무를 손쉽게 다한 뒤, 친구와 연락해서 노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 저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방법.

친구네 집 앞에 가서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린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개똥아!!!! 나와!!!! 놀자~!!!!"


대충 3~4회 정도 반복하면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그렇게 신나는 하루는 시작되었죠.


그리고 두 번째 방법.

"안녕하세요? 저는 개똥이 친구 레터리스트입니다. 죄송하지만 혹시 개똥이 지금 집에 있나요~!?"


엄마가 몇 번이고 알려준 통화 대본을 잘 외운 뒤, 유선 전화를 걸어 친구와 통화를 하면 그렇게 또 신나는 하루가 시작되곤 했습니다.


만나서 하는 거라곤 덜컹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곳곳을 누비는 것, 그러다 적당한 공터가 있으면 또 대충 적당한 공을 찾아 뻥뻥 차대는 것 정도였지만 신나는 하루는 늘 순식간에 지나갔죠.

그리고 또 그렇게 친구네 집 앞에, 그리고 또 끈 달린 전화기 앞에 다시 서곤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충 20~30년 전에 말입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집 아이도 저렇게 박력 있게 친구를 부르진 않습니다.


카톡(어쩌면 요즘 아이들은 다른 메신저를 쓸지도 모르겠습니다)으로 손가락 몇 번 톡톡. 답장도 다시 손가락 몇 번 톡톡.


그렇게 톡톡 만난 아이들은 만나서 또 같이 스마트폰을 보곤 하더군요.

여러모로 참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물론, 아이들만 바뀐 건 결코 아닙니다.

시대 자체가 바뀌었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네, 시대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사실 잘 한번 생각해 보면요.

유선 전화 너머의 목소리라는 것 역시 한때는 '대단히 놀라운 변화'의 상징이었을 겁니다.


집 앞에서 부르던 목소리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렇게 유선 전화 너머의 목소리로.

또 그 목소리는 이제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로.

또 그 목소리는 다시 앙증맞은 까톡까톡 소리로.


'대단히 놀라운 변화'는 이렇듯 늘 우리 곁에 있었고 그렇게 세상을 바꿔놓았습니다.

우리가 각자 어떻게든 먹고 사느라, 또 달라지는 우리네 모습을 일단 고민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한 새에 말이죠.


뭐, 역시 예전이 좋았다!

아니다 요즘이 훨 편하지 옛날이 좋긴 뭐가 좋냐, 과거미화 기억보정 오진다!


이런 걸 굳이 꼬치꼬치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거야 개인의 취향일 것이고 따진다 한들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일 테니까요.


하지만 말이죠.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합니다.


물론 편한 세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마는..

어쨌든 자꾸 진짜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진짜 사람 손이 사라지고..사라지고..사라지고..

그렇게 자꾸 진짜 사람이 사라지는 것만큼은 참 아쉽습니다.


가게 주인, 혹은 점원을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어디서든지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비단 물건뿐이 아닙니다. 먹을 음식을 구하는 것도, 더러운 옷을 빨래하는 것도 모두 다 가능하지요.

비대면 비대면 비대면으로 말입니다.


비대면은 어느새 이미 당연한 일이 되었고 모습은커녕 다른 이의 목소리조차 이제는 굳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누구를 보지 않아도, 누구와 말을 섞지 않아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 오히려 그게 더 편하고 좋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러다 보니 종종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도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톡톡 누르는 그 스마트폰 속 간편한 버튼 뒤에는 결국 다 사람이 있을 텐데..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 목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결국 다 나와 같은 어떤 사람이 있는 걸 텐데..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일 텐데,

사람이 사라지는 세상이라 해도 진짜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진대..


우린 종종 착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이 물건 뒤에, 내가 받는 이 서비스 너머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사람이 없다고 착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사람이 있습니다.

나처럼 속상할 줄도, 화날 줄도, 슬퍼할 줄도, 힘들어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대는 분명 변했고 이제 다시 개똥이네 집 앞에서 개똥이를 목청껏 불러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부디 착각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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