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자고 일어났더니, 설국이었다.
밤새 눈이 많이 온다 했는데 정말일까..?
커튼을 걷기 전까지 반신반의했던 건 순전히 기상청의 지난 잘못 때문이었을 뿐, 내가 첫눈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커튼을 걷어 만난 세상은 온통 새하얬고 심지어 현재진행형이었다. 24-25 시즌의 첫눈이었다.
첫눈은 첫눈 같지 않게 몹시 무거웠다.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이라 이야기했던 한강 작가의 눈이 아닌 엄홍길 대장의 눈이었다. 아침 창밖의 나무들을 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낙엽을 이미 털어낸 나무의 가지 위엔 가벼움이 소복했지만 미처 낙엽을 떨어내지 못한 철없는 나무들, 그리고 억울할 수밖에 없는 소나무의 가지 위엔 하얀 무거움이 가득했으니까 말이다. 가뜩이나 첫눈 덕에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세상이 한껏 휘어져 낮아진 나뭇가지들로 인해 더욱 유별나게 보였다.
아무튼 무겁고, 또 무거운 만큼 깊이 새하얀 그런 첫눈이었다.
그 무거운 첫눈이 나를 조롱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티없이 하얀 눈을 실없이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이던 때의 일이었다. 첫눈은 나를 조롱했다. 어차피 이렇게 곧 못 입게 될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 굳이 가을 재킷(멋진 가죽 재킷이다)을 구매했던 나에 대한 '새하얀 조롱'. 눈은 무거웠고 그 조롱은 명백했지만 커피향이 좋았던 덕인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심지어 나는 그 새하얀 조롱을 멍하니 즐기기까지 했는데 그 덕에 결국 오늘은 아침이 조금 더뎠다.
더디다는 것은 무언가 정해진 기준이 존재할 때 쓸 수 있는 말인데, 내가 방금 전에 나의 아침이 더뎠다고 표현한 것은 얼마 전에 내가 사무실을 구하면서 '직장에 다녔을 때처럼 매일 9시 30분까진 사무실에 가겠노라'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엄청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 할 일도 아니었기에 그 다짐은 지금껏 잘 기능해왔고(비록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이지만) 그에 맞춰 내 아침에는 새로운 루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첫눈은 나의 그 루틴에 최초로 경고등을 밝혔다.
루틴에 켜진 그 경고등은 이내 내 마음속 간사함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기왕 늦은 거.. 어차피 제때 가기 그른 거 같은데.. 그냥 더 천천히 갈까..? 아니, 눈 꽤 많이 오는데 오늘은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내 마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새삼 마주할 때 나는 진절머리가 나곤 한다. 개념적인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던 것이 현실 세계로 끌어내려질 때는 그 개념이 무엇이든 간에 필연적으로 어떤 충격음을 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러니까 그 개념이 ‘간사함'일 경우의 충격음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쿵...!!!" (...이 간사한 놈...ㅋㅋ)
첫눈 오는 날, 나는 새하얀 눈에게 한 번, 그리고 내 간사함이 현실에 닿아 발생하는 충격음으로 또 한 번. 이렇게 벌써 두 번 조롱을 당했다. 이른 아침부터 말이다.
첫 번째 조롱은 견딜만했으나 두 번째 조롱은 참기가 어려웠기에 나는 아침을 거른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평소보단 확실히 늦은 출발이었고 거센 눈발을 헤치며 이미 쌓인 눈밭을 나아가기가 영 짜증스럽고 쉽지 않았지만 하루에 세 번이나 조롱을 당할 순 없었기에 발길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길을 나선 거, 되도록 오늘도 나의 루틴을 지켜내고 싶다는 무리한 생각이 든 건 사무실까지 횡단보도 3개를 남겨뒀을 때였는데 이 생각은 남은 횡단보도의 수가 줄어들수록 마치 몰아치는 눈발과 같이 점점 더 거세어져만 갔다.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괜스레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고 발걸음을 재촉했던 건 오늘이 하필 첫눈 내리는 날이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나의 타고난 강박스러운 성격 때문이었을까?
답은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그렇게 나의 마음은 괜히 급했고 나는 안 될 걸 알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사무실까지 횡단보도 하나만을 남겨두었을 때, 나는 급한 마음에 첫눈 오는 날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 한 가지를 깜박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때 시계 속의 숫자는 무척 공교롭게도 0과 9, 그리고 2와 9였다.
루틴을 위한 9시 30분까지는 딱 1분, 조금 늦는다 해도 사실 아무 일도 없을 그 1분이 그 순간 내겐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리고 사무실 건물이 아닌, 외져서 아직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한 골목의 안쪽으로 향했다.
작은 나뭇가지가 있으면 딱 좋았으련만 골목길엔 눈 외의 것이 없었기에 나는 손가락으로 눈밭에 몇 글자를 천천히 적어 넣었다.
‘XX♡’ (XX은 내 아내의 이름이다)
그리고 눈이 다시 쌓이기 전에 찰칵, 그리고 전송, 그리고 이내 둘이 같이 폰으로 ㅋㅋㅋ.
벌써 거의 10년 가까이 해온 나와 아내의 겨울맞이 행사, 처음엔 특별했으나 이젠 꽤 당연해진 이 연례행사. 그래서 한번쯤은 그냥 걸러도 그만일 것 같은 이 행사를 나는 오늘 거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이유로 건너뛰기 시작하면 결국, 당연하지 않은 것들만 남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소중한 1분과 아직 덜 굳은 알량한 루틴을 놓아두고 눈밭에 글을 적고 사진을 찍고 이를 보냈다.
얼얼한 손가락으로 사무실에 들어오니 9시 37분이었다.
차가운 눈은 가을옷 대신 패딩을 꺼내 입고 결국 사무실에도 늦은 나를 여전히 조롱하고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전히 설국이었고 기분은 따스했다.
2024. 11. 27.
눈이 한껏 쌓인 날,
레터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