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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 Sep 28. 2022

관찰력

네겐 별 거 아닌 게, 나에겐 '별 거'여서 말이지

휠체어를 타고 온종일 생활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낮은 눈높이를 가지게 된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걸어다닐 때 늘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또한, 휠체어의 특성상 조금만 길이 울퉁불퉁해도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기 때문에 촉감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주위에 있는 사소한 부분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남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요소들이 나에게는 애를 먹이는 골칫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그런 골칫거리를 사전에 차단하려면 내가 내 주변의 환경을 제일 잘 알아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부쩍 시험을 보는 빈도가 잦아졌고, 때문에 최대한 실제 시험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된, 대규모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시청각실에 자주 드나들게 됐다. 그런데 이 시청각실의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혼자 휠체어로 드나들기에는 그 턱이 다소 높다는 점이었다. 휠체어마다 쉽게 넘나들 수 있는 턱의 높이는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는 어려우나, 내 휠체어 기준으로는 턱을 넘으려고 시도하다 휠체어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뒤로 전복될 수도 있는 높이의 턱이었다. (당시 나는 책가방을 휠체어 손잡이에 걸고 다녔는데, 무거운 교과서와 온갖 유인물들을 가방이 꽉 찰 정도로 넣었기 때문에 조금만 턱이 높아도 바로 휠체어가 뒤로 넘어갈랑 말랑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이 턱은 다른 친구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단도 아닌 일반 턱이었고, 그냥 걸어서 시청각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다칠 수도 있는 위험 요소였기에, 매번 시험 볼 일이 있을 때마다 친구들이 뒤에서 내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손목 스냅을 통해 살짝 휠체어 앞쪽을 들어올려서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내주어야 했다.


도서관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해 도서관을 정말 좋아했는데, 안타깝게도 휠체어에만 타면 내게 도서관은 애증의 장소로 변했다. 앉은키를 기준으로 밑에서 4번째 칸보다 윗쪽에 꽂혀 있는 책들은 도저히 꺼낼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필요한 책들이 전부 4번째 칸 밑에 위치한 것도 아니었다. 보통은 이렇게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일시적으로 휠체어에서 빠져나와서 선 상태로 볼일을 볼 때가 많은데, 도서관은 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휠체어의 회전 반경은 양 옆과 앞뒤로 각각 최소 20cm씩이다. 그런데 도서관의 책장과 책장 사이는 이 회전 반경보다 좁은 경우가 다반사여서 휠체어를 책장 안쪽으로 끌고 가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휠체어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어려웠다. 때문에 겨우겨우 컴퓨터로 도서의 청구 기호를 조회하고 찾아가다가 휠체어가 좁은 책장에 부딪히면서 큰 소리를 내어 눈치를 보게 되는 일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니 결국에는 미리 읽고 싶은 도서를 찾아서 사서 선생님께 대신 찾아달라고 이야기하거나, 상호대차를 신청해 놓고 도서관 입구에서 책을 가져가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관찰하고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아직 배리어 프리 (barrier-free;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등의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없애는 것)하지 않은 시설들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직접 겪어 봤기에 시설의 문제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었다. 현재 내가 거주하고 있는 대학 기숙사 시설을 예로 들 수 있다. 내 방은 휠체어 사용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방인 만큼 휠체어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마련되어 있다. 널찍한 L자 구조라 방 안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으며, 책상도 높이 조절이 가능하고 공용 부엌 역시 높이 조절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옷장을 열었을 때 옷을 걸 봉이 너무 높이 위치해 있어 옷을 단 한 벌도 걸 수 없었다 (휠체어에서 일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옷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면 의미 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가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기숙사 측에 옷장을 방에서 빼 달라고 말씀드리고 내 앉은키를 직접 측정해 행거를 따로 주문했다. 조립하는 데에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옷장이 있던 자리에 행거를 놓고 나니 확실히 옷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고, 이제는 옷을 갈아입을 때 편하게 모든 옷들을 한눈에 보고 고를 수 있게 됐다.


공연과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 개인 블로그에 휠체어를 타고 콘서트를 보러 간 여정과 더불어 여러 가지 고충을 적어 낸 적이 있는데, 이를 보고 최근 모 밴드에서 개인적인 연락이 왔다. 공연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휠체어 사용자들도 공연을 즐길 수 있게끔 하고 싶은데, 공연장까지 오는 동선부터 공연장 시설 이용, 휠체어석 위치까지 나의 의견을 고려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브런치 글에서 더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나는 음악을 좋아해서 콘서트를 자주 가는 편이다. 당연히 배리어프리 공연을 기획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여하겠다고 했고, 나의 경험과 주위의 다른 휠체어 사용자 분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해 드리며 여러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런 일들은 내가 직접 휠체어로 공연을 다녀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와중에 휠체어 사용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휠체어로 생활하는 것은 분명 고된 일이고, 그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순간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휠체어를 탄다는 것은 남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장애 편의 시설을 지었다고 해도 직접 휠체어를 타고 다녀 보면 실질적으로는 개선할 점들이 많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휠체어 사용자 본인이 직접 관찰해서 소통하지 않으면, 사실 자각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공연 얘기로 잠시 돌아가서, 휠체어로 지하철을 탈 때에는 플랫폼과 열차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중요한데 밴드 측에서는 해당 부분을 잘 모르고 계셨다.) 세상에는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나서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부딪혀 봐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열심히 휠체어로 부딪혀 보고, 관찰하고, 소통하는 일련의 루틴을 반복한다. 나의 작은 경험들이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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