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이야기들, 식어버린 나

미디어에 관한 소소한 의견

by Derick

어릴 적 명절에 친척들과 모인 시골집에서, 문득 아직도 잊지 못할 한 특선영화의 예고편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그 마지막, 산채만 한 육식공룡이 정면을 쳐다보며 우렁차게 포효하는 장면.


어린 남자아이의 심장을 일순간이나마 뜨겁게 하는 그 장면. 인생 처음으로 '쥬라기 공원'이라는 타이틀을 접한 순간이었다.


아마 내가 어리고, 처음 접하는 문물의 연속인 탓이었을까. 그 시절엔 어떤 어지간한 영화를 봐도 모두 신기하고, 가슴을 조아리며 시청했다.

'스피드' '타이타닉' '마스크 오브 조로' '불가사리' '터미네이터' 등,

부모님을 따라보든, 혼자 몰래 챙겨보든, 그 시절 TV에서 방영해 주는 모든 영화들이 내겐 짜릿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떤 영화는 이래서 좋긴 했는데 또 이 점은 뭔가 아쉽고,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어떻고, 이런 평론가 행세를 점점 마음속으로 반복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취향을 알아가는 걸 넘어 멋대로 취사선택을 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지나고 보니, 그 자체가 어찌 보면 더 깊은 관심의 표현이었나 보다.


오히려 지금은, 드라마고 영화고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 신작들, 그중에서도 OTT 서비스 등으로 공개하는 매 신규 콘텐츠들은 뭐가 그리도 매번 자질구레하게 튀어나오는지 어질어질하다.


'오징어 게임?' '무빙?' '카지노?' '더 글로리?',

기타 등등.....

이젠 2시간 내외 영화도 쥐가 날 정도로 피곤해서 그 MCU조차도 손절하는 마당인데, 드라마라?

게다가 한 두 편도 아니고 어느새 무슨 공산품처럼 매달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콘텐츠들, 이젠 공개 이전 쏟아지는 콘텐츠들의 광고만으로도 부담스럽다.


어쩌면 이런 내가 시대에 뒤처지는 건지도 모른다.

이미 콘텐츠 시장은 OTT가 장악했고, 온갖 회사들이 다 뛰어들어 저마다의 브랜드를 내걸고 말 그대로 '콘텐츠의 자동생산화'를 이끌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저 내 호흡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전혀, 관심도 설렘도 없다.


난 그저 한 달에 한 편만을 보더라도, 내게 어떤 감정이나 경종을 울리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원한다. 그저 온라인으로 타고 들어가 수없이 줄지어있는 리스트 중 하나를 골라, 고요함과 공허함을 달래려

틀어놓기만 할 뿐인 콘텐츠는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이 바뀔 만치 바뀐 듯, 이제는 어떤 호소력 있는 연기를 스크린에서부터 펼치더라도 그저 그때 잠깐일 뿐, 또 몇 주 뒤 물밀듯이 밀려 나오는 다른 타이틀들이 감상을 곱씹을 틈조차 없게 만든다.


거기다 요즘은, 이제 내 머리가 클 만큼 커서 그런지 현실적인 시선을 아예 떨쳐내고 관람을 할 수도 없고.

가령 TV 속에 출연하는 저 사람들이 실제론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화려한 삶을 사는 집단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버렸다. 굳이 알기 싫어도 여기저기서 회자되기까지 하니까.


스크린 너머에서 그들이 절규든 분노든 행복이든, 어떤 감정을 드러내도 그게 진짜 그들의 삶과 다른 가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게다가 성격은 좀 달라도, 하다못해 요즘은 일반인들도 온갖 예능의 주역으로 출연하는 세상이기까지 하다.


눈만 돌리면 그야말로 미디어가 쏟아지는 시대, 그런데 나는 도리어 어지러워지고 있다. 외려 원래 관심 있던 미디어조차 지겹게 느끼고 있다.


차라리 팬데믹 이전 한창 극장 상영의 부흥기 시절, 매 신작을 보러 매주마다 영화관을 찾아가던 때가 그립다. 그때는 차라리 평가를 내릴지언정, 소위 어떤 작품일지를 나름 상상하는 맛도 있었다. 게다가 같은 작품도 영화관의 화면과 음향을 통해서라면 확연히 몰입감부터가 다르다. 개인적으로 '위플래쉬' '유전' '셰이프 오브 워터' 같은 영화를 여전히 종종 되새김질하는 이유가 아마 그 때문일 듯하다.


어쩜 이런 생각에 빠져 아무 몰입도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마음이 탁해지고 시야가 좁은 걸까? 아무튼 요즘 들어선 확연히 전과 비교해선 영화관에서도, 소위 OTT의 홍수 속에서도 그리 눈길이 가는 작품들이 없다.

정말 그들의 퀄리티가 낮아져서일까, 혹은 이미 온 자극에 절여진 채로 더 이상의 감정의 파도도 못 느끼는 상태인 걸까.


"그 시절이 좋았다."라고 되뇌던 예전 주변 어른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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