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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12. 2024

갈라진 마음을 들켜버린 새벽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글을 쓴다.

글로 먹고 살고 싶고

글에 나를 담고 싶고

누구든 그렇게 자신의 삶이 시간속으로만 묻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남길 바라는 맘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을 돕는 일로도 한발짝 전진하고 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글은 지식이 아니다.

언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국문과를 나왔다고 해서 표현을 진실되게 하는 것도 아니더라.


나야 뭐, 출판사에서 의뢰받아 몇 권 써본 것과 브런치에 2년 가까이 쓴 것이 전부인 사람이라 '글'이란 대명제 앞에서 내 의견은 그저 초라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은 글에 대한 의미가 내 가슴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의미하리라. '언어는 (중략) 언어를 만든 사람의 천재성이 직관의 행복한 순간에 힐끗 본 진리의 싹을 담고(주1)' 있다는 글에서 난 잠시 멈췄다. 


그렇지. 내가 글을 위해 어떤 단어를 찾을 때 그 단어가 딱 적합할 때도 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아 사용할 단어가 없을 때도 많다. 그럴 땐 '내 모국어 안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단어'라고 표현하며 글을 쓴 적도 많았다. 또 내 나름대로 단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글 하나에 오로지 집중하고 싶다. 

글 하나에 오로지 내 삶을 담고 싶고 글 하나로 나의 미래가 보장되기도 바란다. 지나친 욕심이라 누군가가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내 뜻이 이러한데 말이다. 글이. 글쓰는 내가 참 좋다. 이렇게 언어화되는 과정이 나만의 창조니까. 창조자로서 내가 쓰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저 지나가는 일상, 그저 지워지는 생각들이 유형화되는 과정이 글이다. 없어져도 무관한 것들 투성이겠지만 없애지 않고 남길 수 있는 수단이 내겐 글이다. 글 하나에 집중하여 내가 추구하는 욕구가 채워지길 나는 간절히 바란다. 


하나(one)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배제시킨다는 것이며 

이 선택에 의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은 

마음이 둘로 갈라서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인도유럽어에 '둘'을 뜻하는 어근이 '불량'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 접두사 dys(예 : dyspepsia, 소화불량)와 라틴어 dis(예 : dishonorable, 불명예스러운)는 모두 'duo(둘)'에서 파생되었다. 같은 어원을 가진 bis는 현대 프랑스어 bevue(실수, 문자적으로는 '두 가지 시각')와 같이 경멸적인 의미(주2)가 부여된다. 


하나를 취하고자 하면서 마음을 둘로 갈라놓고서는 힘들다, 두렵다, 모른다고 떼쓴들 내 인생이 날 용서할까?

내가 사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것이 내 인생인데 내 인생이 날 싫어하면 어쩌나?

날 좋아하게 하려면 내 인생이 가야할 방향으로 보폭까지 잘 맞춰서 따라가줘야 할텐데 날 기다려주려나?

기다린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일텐데 내 인생이 날 보기에 가치있게 봐줄만할까?

그렇다면,

내가 날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내 인생이 더딘 나를 기다려서라도 데려가게 하는 우선이겠다.


가치있는 나를 만들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그에 충실하게 기본부여잡고 떼쓰지 않고 묵묵히 걷는 것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혼자 끙끙대더라도 내 황금빛 인생은 날 기다려주며 그에 적합한 나를 주인공삼으려 하겠지. 신이 나를 빚으실 때 구겨지거나 찢겨지거나 흐리멍떵한 색으로 빚지 않으셨을테다. 모든 인간 하나하나에 창조성을 부여하여 황금빛으로 살라 하셨을테니 난 황금빛으로 전제되어진 나를 외면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나의 혼탁한 색을 채색해주길 바라는 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보련다.


오랜만에 온전히 내 맘대로 사용하도록 주어진 오늘 새벽, 나는 둘로 갈라진 마음으로 눈을 떴다. 조금만 어딘가에 쿵 쳐박히면 오락가락한 정신이 늘 마음에 지고야 마는데 테라스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나의 정신에 다시 깊은 주름을 만들어본다. 하나의 길을 냈으면 그 길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야하지 않겠냐며 내가 나를 윽박지르다 달래다 안아주다 그러다가 눈길을 잠시 화분으로 옮긴 순간, 볼품없는 이파리들이 나의 나약함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며칠 강한 햇빛에 누렇게 변하고선 곧 시들 태세를 갖춘 이파리가 다시 선명해져서 날 노려본다. 저 볼품없는 것들도 자기 생명을, 자기 길을, 자기 꽃을 피우려 저리 애쓰는데 넌 지금 뭐하고 있냐고 호통치는 듯한 소리에 나는 할말을 잃고 날 꾸짖는 이파리에게조차 눈길을 주지 못할 정도로 민망하다.


지나친 특권이나 힘은 오히려 자만과 탐욕, 허영을 불러온다. 지금 내가 딱 그 정신인 것을 들켜버렸다. 볼품없다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이파리가 나보다 더 큰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에 내 자만은 자신감으로, 자신감은 다시 겸손으로 꼬리를 내리고 내가 지닌 힘은 내 힘이 아니라 더 큰 의지에 의해 순종해야 할 덕목이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성찰인지 반성인지 자각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심정으로 쓰는 이 글이 나에게 다시 한걸음 내딛으라 명하는 신의 명령과도 같이 느껴지고 요 몇주 글에 자신감을 잃고서는 이리저리 갈팡대는 손가락을 다시 노트북위에서 춤추게 해주리라 기대도 해보려 한다.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고 탐욕에도 쉽게 마음을 주고 자만에도 쉽게 눈길을 흘기는 내가 보여 나는 참담하지만 이 또한 지금 내 현주소를 알게 하려는 신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아침, 하나에 집중하고 둘을 버리는, 의심없는 믿음으로 

내가 쓰는 글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글을 위해 도구여야 하는 관점을 잊지 않길 나는 나에게 명해본다.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고 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자격을 갖추면 된다.

뜻이 길을 내어줄 것이니 나는 그 뜻을 가슴 깊이 담아 내어주는 길에서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않으면 된다.

글은 그 자체의 힘으로 세상에 나갈 것이니 내가 쓰는 글이 아니라 내가 품은 뜻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써내야 할 과업을 행하는 자로서 나는 그저 쓰면 된다.


글은 기술이나 능력이 아니다. 

글은...

혼(魂)의 언어화다. 


주1,2> 영원의 철학, 올더스헉슬리, 2014,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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