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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15. 2024

어찌 제비가 백조와 겨룰 수 있겠습니까?

‘체념’과 ‘갈구’에 대하여 

               

그토록 큰 어둠에서 그토록 밝은 불빛을 처음으로 들어올려 

삶의 기쁨에 빛을 비춰주실 수 있었던 이여.

저는 당신을 따릅니다.

(중략) 


이제 저는 당신의 깊이 찍힌 자취에 저의 발자국을 눌러 딛습니다.

다투고자 원하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애정으로 인하여,

그대를 본받기를 제가 갈망하므로..

왜냐하면, 

어떻게 제비가 백조와 겨룰 수 있겠습니까....(주)


신은 나를 알고 있다.

신은 나를 보고 있고

신은 나를 사랑한다.

원망이 스멀스멀 가슴에서 올라올 때쯤

항상 내 심정을 간파한 글을 내 눈앞에 등장시키신다.

신은 날 보고 있는 것이다. 

어찌 제비새끼가 백조와 겨루려고

원망.이라는 것을 품고 있었는지..

건방과 오만이 무섭지도 않냐고 나는 나를 혼쭐낸다.     


이쯤하면 되지 않았냐고.

이정도 참으면 되지 않았냐고.

여기까지 왔으면 되지 않았냐고.

내 아무리 심보를 곱게 쓰려 해도 자꾸만 

원망과 의심이 내 심정를 꼬드기니

건방과 오만이 보란듯이 등장해 버렸다.    


이 원망과 의심은 도대체 누가 내게 보낸 것인지.

이 또한 당신이 보낸 것이라면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서 언제까지 이런 시험에 들게 할 것인지

건방과 오만이 아직도 내게 자리잡아 감히 이런 의문도 하게 되나 보다.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를 신격화하여 그에게 굴복하고 그의 근원적인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제비로 격하시켰듯이 나 역시 누군가를 추앙하며 여전히 날 괴롭히는 난감하고 막막하고 뿌연 길을 꾸역꾸역 내딛고 있다. '다투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루크레티우스도 자신의 탐구와 사유가 인간에게, 세상에게 지쳐 원망의 늪에서 허덕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던 것 같다. 


그러다가 더 지치고 더 허덕대니 스스로를 이치 앞에, 진리 앞에, 그 가르침을 준 에피쿠로스를 신으로 격상시켜 자신을 굴복시키고 거기 어느 즈음에서 저렇게 처절한 글이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 오죽했으면 저런 글이 나왔을까. 저 심정이 고스란히 내 눈을 통해 가슴으로 스며드니 나는 이 순간 너무 감사한데 괴롭다.     


나는 저렇게까지 처절해 봤는가. 결단코 그렇지 않다.

나는 저렇게까지 용기있게 나의 탐구를 주장해 봤는가. 결단코 그렇지 않다.

자신이 쓴 저 글들이 1천년이나 금압될 것을 예상하고도 저리 치열하게 써내려간 것일까.

저 정도의 통찰과 본질을 들여다보는 눈이라면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우매하지 않았을텐데...

정말 알면서도 그리 했을까.     


도대체 어떤 정신이어야 저렇게까지 맹목적일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간절함이어야 저렇게까지 시도, 시작, 시행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책임이맹목이 저렇게까지 탐구의 끝까지 자신을 몰고 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떠한 무엇이...     


그는 있고 나는 없는 것이 바로 '저렇게까지' 자신을 움직이게 한 정신일텐데

도대체 나에게는 언제 그 정신이 자리잡힌단 말인가.

자리잡히기나 하겠냐는 말이다!     

자연이 모든 것을 허락했고 모든 것을 제공한다는데

이 이치가 이제 가슴으로 믿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의 정신은 어둡고 두려운 것인지.

어린아이가 컴컴한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제일 먼저 '엄마'를 찾듯

나의 정신도 '신'을 갈구한다.     


길을 모르니 길을 잃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길었는데,

길이 보이는 줄 알았는데 뿌옇기만 한 답답함이 지금 이리도 길어지니,

이는 미로같은 복잡한 길 때문이라고, 이 길에 처음 들어서다 보니 나에게는 너무나 모든 길이 낯설다고 길탓을 해보지만 조금도 이해받지 못할 '탓'천지일 뿐이다. 


한걸음 떼기가 두려운 이유는 그 다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누가 그 다음을 보고, 알고 걷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는 곳에서만 뱅뱅 돌며 살면 그만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한짝 발로 여기저기 두드리고 까치발로 엉거주춤 서 있는단 말인가.


그렇게 내 삶이 하찮은 것인가

그렇게 내가 시간을 허비해도 괜찮단 말인가

내가 내 갈길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모자란 인간이란 말인가

신이 나를 이 정도에서 머물러도 될 인간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나는 그리 태어나지 않았다.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리 하찮고 보잘것없고 짝발로 선 불편한 거동에 원망과 의심이 가득할지언정 나는 그리 태어나 그리 사라질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 나에게 명령한 것들이 분명 존재할테니 이 명령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아니 어쩌면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일지언정 일단 가면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가지 않고 엉거주춤 서 있는 이 자태가 꼴같잖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보기에도 위태로운데 언제까지 그리 서 있겠다는 말인가.    

 

내 주변을 돌아본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갖추고 사는가.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은 각종 기구들을 걸어놓고 장식하고 쟁여놓고 사는데 

이 '편한 것'들 속에서 나는 왜 짝짝이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불편한것인가

그렇다고 다 갖다 버리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요량도 없으면서 왜 이리 누리지도 즐기지도 못하게 자신을 닥달하는가. 


내 안에 어둠의 자식이 자리를 틀고 앉아서일까. 

밝은 빛보다 적당한 어둠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까. 

결코 아닐 것이며 아니어야만 한다. 


나는 결코 그리 태어나지 않았고 

그리 살아지지 않으며 

그리 죽어가지 않으리란 건 내 나를 잘 알기에 하는 소리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리 편하게 안주할만큼 내 두려움이 가볍지는 않다.     


분명 

갈구하는 그것이 나를 부르기 때문일테다

갈구하는 그것이 지금의 '편함'보다 더 크기 때문일테다

갈구하는 그 정체가 드러나려 내 시선을 끌기 때문일테다

갈구하는 그것이 점점 가까이 내게로 오는 느낌 때문일테다

갈구하는 그것이 나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테다

갈구하는 그것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해야하기 때문일테다


물론 내 추측이지만 지독한 원망과 의심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루크레티우스도 굴복했을 것이다. 그가 갈구하고 추구하는 그것들을 에피쿠로스가 가지고 있고 가진 것을 봤고 본 이상 자신도 갖고 싶고 가져야만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자연이 자꾸 그리로 자신을 데려가니까 저리 간절하게 스스로를 굴복시키지 않았을까. 

갈구를 현실로 만드는 길이 이러하다면 나는 제대로 가고 있다고 해도 괜찮을까. 

내가 뭐라고 루크레티우스보다, 에피쿠로스보다, 그 누구보다 덜 치열하고 덜 불편한데 

갈구가 현실이 되겠는가.     


나 역시 그리해야 하나보다.

체념하고,

갈구하는 그 곳으로 내가 너무나 가고 싶은가보다.     

왜냐하면 

내 안에 원망이, 치졸함이, 비겁함이, 그리고 던져 버리고 싶은 욕구가 가득 차오를 때면 어김없이 내 앞에 '나를 읽어내는글들이 등장하니까.


이는 신이 나를 보고 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는 신이 나를 계획하고 있다고밖에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는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표로 내가 그의 사랑을 받아주길 바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신이 나에게 이토록 자신의 사랑을 증거로써 내미니 나 무릎꿇고 더 큰 사랑을 보내야 하는 수밖에 없다.    

 

왜 이 새벽, 첫 등장한 글이

내 마음을 그대로 들키게 하여

당신의 호통을 무섭게 받아내게 하는지

이로써 나는 또 알게 되었다.     

당신은 나를 들여다보고 

그리고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려 한다는 것을.     


체념.이란 이런 마음이구나...

들고 있는 나머지 한쪽 발을 땅에 디디게 하는 힘이구나.

원망하고 의심하는 못난 심보를 거두게 만드는 손길이구나.

애써 외면하려던 당신의 사랑앞에 진심어린 순종의 마음을 끌어내 시선을 맞춰주는 눈빛이구나.   

  

갈구.란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버린 나의 의지구나...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던 내 안의 움직이는 것들이 보이는심지어 만져지는 듯한 나의 감각이구나...

찰나전까지 몰랐거나 희미했던 내 안의 것이 스스로 태동해 세상 속으로 걷게 하는 나의 헌신이구나...     


나는 체념했다.

그리고

갈구한다.

내가 나로써 나여야만 하는 나이기에.     


(주) 루크레티우스, 사물의본성에 관하여, 2012,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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