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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16. 2024

엄마독자들에게서 받은
21개의 질문앞에서

'부모정신'이 '시대정신'

브런치북 '부모정신이 시대정신'을 쓰는 이유에 대해, 내가 그 자격을 갖췄는지조차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키우고 교육하는 데 어찌 정답이 있겠냐마는 오답은 피하고 해답을 찾아보자는, 우주같은 내 자식을 행성의 마인드로 키우지는 말자는, 나아가 시대를 모르고 관성대로 키우면 안되지 않겠냐는 의도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때문일테다. 


작년 11월 나의 에 한 학부모께서 지인들과 함께 나눈 질문들을 무려 21개로 정리하여 내게 카톡을 보내주었고 그 내용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되어 오늘 이 질문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보려 한다. (질문내용은 카톡사진 참고, 질문을 받은 형식이 제가 직접 상담을 하거나 직접 통화하거나 직접 긴 글로 사례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아래 나의 견해는 질문내용만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니 이 점 양해바랍니다.)


어머님들 대다수가 공부공부공부공부... 공부질문밖에 없다. 어느 한 사람도 '내 아이의 꿈은 무엇일까요?', '내 아이가 어떻게 하면 자기가치를 실현하며 살 수 있을까요?', '내 아이가 올바른 어른이 되려면 무엇부터 갖춰야 하나요?', '아이에게 도움되는 부모가 되려면 나는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까요?'류의 질문이 없다. 물론, 불특정소수의 질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아..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일단 주신 질문들의 주요내용인 '공부'에 대한 나의 견해부터 말하자면, '공부를 잘하게 하고 싶다',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시킬까?'와 같은 엄마의 바람에는


'욕망' 대비 '공부'에 대한 기본정의를 비롯한 제대로된 지식이 필요하다는 의미, 공부 잘 하는 것이 막연한 바람인지 편협된 인식때문인지 간절한 엄마의 소망인지 아이의 미래를 위함인지에 대한 판단이 요구되는 데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적은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인데, 요령이나 노하우, 어떤 교육도구만 손에 쥐어주면 내 아이는 공부를 잘 할 것이라는 착각이 함유된 발상이며 왜 공부를 잘 시키고 싶은지에 대한 부모 스스로의 목적의식이 결여되어 그러다 보니 아이도 마찬가지로 목적이 부재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일상과 공부를 결부시키지 않는(또는 못하는), 부모와 자녀간의 연결관계에서 빚어지는 인과,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단절된 사고, 즉, 전체론적 사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 한가지.

질문이 잘못되면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조차 모르는' or '너무나 기본적 지식이 부족하여 허황된 방법에 의존하고자 하는', '그저 남들이 가진 의문이 나의 의문이라 착각하는' 그런 경향의 질문들이 많았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지금 나의 연년생딸아들은 22,21살) 이런저런 고민과 방황과 실수와 착오를 거쳤지만 이러한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이 주장해보려 한다.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란 일상이며 그 시기에 '해야할 본업'이다. 공부가 어렵다,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은 단지 머리가 나쁘다. 습관이 안좋다고 치부해 버릴만한 쉬운 주제가 아니다. 이 의미는 앞으로 무엇을 집중해야 할 지, 어려운 것을 어렵게 가는 방법을 모른 채 살아야 한다는 무거운 숙제를 안긴다. 공부. 물론 어렵다. 나 역시도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1인이어서 공부가 결코 쉽다고는 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려운 것은 어려운 길로 갈 수밖에 없고 어렵게 치른 대가만큼 보상도 크다는 사실이다. 공부 잘하게 만드는 길은 처음엔 어려우나 잘하는 아이는 끝까지 스스로 잘하기에 어려운 과정만 잘 지나가면 계속 쉬워진다! 는, 일이 돌아가는 원리부터 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또한,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학습으로 이어지게 할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아이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대신 발견해줄 수 없다. 혹시, 엄마는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본 쾌감을 경험해 보았는지 먼저 묻고 싶다. 지금 간절히 원하는,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서 '무언가를 좋아서 한다는 것은 이런거야' 를 아이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지? 그런 경험이면 충분하다. 좋아하는 것을 학습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게임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리 막아도 게임공부 알아서 제대로 시간투자해서 한다.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 다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타깝게도 엄마가 변하지 않으면 아이를 변하게 할 수 없다. or 어렵다. 에이 뭐야? 뻔한 얘기잖아! 싶겠지만 이치가 그러한데 어쩌겠나....여기저기 방법, 노하우, 비결만 찾다가 아이는 그냥 커버리고 마는 것을, 그것도 딱 닮지 않았으면 싶은 것만 더 두드러지게 닮아가면서 말이다. 결코 불안을 조장하거나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숱한 부모교육을 통해 경험으로 체득된 편견일 수 있으나

대다수의 엄마들이

엄마는 변하지 않고 아이를 변하게 하려 하고

엄마는 변하지 않고 아이가 변하기를 바라며

엄마는 변하지 않고 아이가 잘해내길 바란다.

원리는 결코 그 길을 가지 않는데도 말이다.


엄마와 아이는 같은 집에 살며 일상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기에

한쪽을 변하게 하고 싶으면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인간은 바로 옆의 사람에게 전염된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보편적 기준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게 왜 어려울까? 공부 잘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널려 있고 인터넷 몇번만 두드리면 다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니, 방법을 몰라 헤매는 것은 어리석은 시간낭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산삼도 누구에겐 이롭고 누구에겐 해롭다.

아무리 좋은 조리도구라도 누군가는 멋진 요리를 해내지만 누군가는 주방장식용으로만 사용한다.

아무리 귀한 진주도 돼지가 걸면 돼지목에 진주목걸이다.

아무리 좋은 방법을 찾더라도

엄마가, 내 아이가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일 뿐이다.


공부가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아이가 공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벌이 벌집을 만드는 것이지 벌집이 벌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필요에 의해 공부를 하는 것이지 공부가 아이를 부리게 해서는 안된다.

육체를 먹여 살리는 것과 존재의 본질적인 양식을 마련하는 일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져야 하는데 한가지의 동일한 수단으로 그 두가지 욕구를 모두 채울 수만 있다면 더할나위없겠지만 그것은 진실로 드문 성공일 것입니다. 그것을 동시에 둘 다 얻을 수 있는 길은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공부'를 중점으로 해야 하는 '학생'으로의 기간을 통해, 즉 지성을 통해 밥을 벌어야만 하는 현실에 살면서 '공부'가 밥벌이가 되어야 하고 또 밥벌이 이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도구여야 한다고 감히 말하겠다. 이런 고차원적인 목적과 수단으로서의 공부를 모두 아이 스스로 터득하고 찾아나갈 수 있도록 엄마는 가이드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두 벌이 같은 곳에서  같은 먹이를 먹어도 이 벌은 침을 만들고, 저 벌은 꿀을 만든다.

두 사슴이 같은 풀과 물을 먹어도 이 사슴은 배설물을, 저 사슴은 순수한 사향을 만든다.

두 갈대가 같은 물을 먹어도 이 갈대는 텅 비어있고, 저 갈대는 설탕으로 가득 찬다.

둘 사이에 만 가지의 유사점이 있어도 그 차이는 한평생 인생만큼 크다.

이것이 먹으면 오물이 되고 저것이 먹으면 신의 은혜가 된다.

이것이 먹으면 질투를 낳고 저것이 먹으면 신의 지혜를 낳는다

이 땅은 비옥하고, 저 땅은 황폐하다.

이 사람은 무결한 천사이고 저 사람은 들짐승과 악마이다(주2)


같은 시기를, 비슷비슷한 환경에서 공부한 아이가 왜 누구는 이렇게 또 누구는 저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무엇을 투입했는지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는 시기의 아이부터 청소년시기에 이에 대한 중간 연결자인 부모, 특히 엄마가 아이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아니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학습지가, 학원이, 사교육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승마도 할 줄 모르는데 좋은 말이 왜 필요할까?

나무를 깎아만든 인형에 좋은 옷을 입히는 목우인의(木遇人衣)꼴은 면해야 하지 않을까?


'결과'는 수많은 원인들, 수많은 과정을 거쳐 하나로 결론지어진다.

자신만의 꿈, 방향, 목적이 없다면 '바보지식인', '공부잘하는 속물' 인간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또한 공부라도 잘 했을 때 얻는 수식어다. 주변을 돌아보면 답이 쉽게 나온다. 왜 다들 창의창의하면서 같은 학원에서 같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창의는 자신의 내면에서 독특한 무언가를 창조시키는 사고인데 말이다. 왜 다들 4차혁명, 혁신교육하면서 같은 선생 밑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왜 다들 메타지식, 메타버스하면서 20세기 교육관에서 방법을 찾고 있는지?


직설적인 이 글에서 신경질나고 화도 나겠지만 괜찮다. 내가 용기를 냈으니까. 욕먹을 용기. 반발을 수용할 용기. 비아냥을 감당할 용기. 하지만, 듣기 괜찮은 말로 대충 넘어가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하는 글보다는 이 글을 읽는, 질문하는 부모들 중 누군가는 화나고 신경질나더라도 지담! 너 두고 보자! 하며 단단히 맘먹고! 엄마인 자신부터 변화시키길 바라는 맘이 크다. 


나의 경우 주변의 소음에 흔들흔들거릴 때마다 이 노랫말을 들으며 참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엄마인 내가 방향을 잡지 못하거나 엄마인 내가 자녀의 미래보다 나의 욕망이 더 크게 느껴질 때, 또 엄마인 내가 감히 미래가 창창한 아이의 앞에 굳어버린 관념으로 판단하려 할 때 이 노랫말을 음미했었다. 이 노랫말처럼 교육하려, 살려, 키우려 애써왔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https://youtu.be/F9ZlolEBsVE


교육은 보여지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결과는 정해놓고 가는 것이지 가다보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해야할 것을 해내는 것이지 하고 싶은 것부터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쓰임있는 사람은 알아서 돌보지만 쓰임이 적은 사람에게는 그 흔한 운도 주지 않는다.

부모자녀관계는 부모로부터 보여지는 것이기에 보여주지 않는 부모에겐 자녀도 보여주지 않는다.

진짜 공부는 지속되어 계승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단절된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자녀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길 바란다면 엄마가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엄마부터 먼저 '삶'을 공부하고 자신의 변화를 위해 애쓰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일상의 소소한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는 단호함을 보여준다면 톱니바퀴처럼 아이도 그렇게 맞물려 돌아갈 것이다. 


주1>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데이빗소로우, 2005, 오래된 미래

주2> 루미시집, 잘란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 2019,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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