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다행이다.
내게
선택의 기로에서 의견을 묻을 수 있는 그녀가 있어서
결정을 앞두고 허락을 구할 수 있는 그녀가 있어서
결과가 미심쩍을 때 살짝 미리 귀뜸해주는 그녀가 있어서.
그녀는 5년 뒤,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
내가 원하는 그 곳에 열맞춰 대기하며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내가 원하는 시기에 딱!
내가 원하는 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내가 원하는 그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나에게 지침과 명령과 훈수를 준다.
그녀는 바로
미래의 나, 김주원이다.
나에겐 꿈이 있다.
꿈을 위한 장중단기 목표도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도 있고
계획을 지켜내기 위한 스케쥴도 있고
스케쥴가운데 가장 우선순위인
'나를 키워낼' 매일의 루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잘 스스로를 의심하고
결과에 불안해하고
과정에 힘들어한다.
인식에 내 발목을 자주 잡히는 것이다.
열정도, 의지도, 투지도, 별다른 탁월함도, 주변에 딱히 도와줄 이도 없는 이런 내가
어려워도 매일매일 정해진 루틴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간절함때문이다.
'원하는 나'의 모습을 온전하게 갖고 있는 '미래의 나'
내가 원하는 딱! 그 모습의 그녀에게
붙잡고 매달리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가진 두 개의 눈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선이 바른 곳을 향하는지
시야는 넓고 멀고 깊은지
시각은 정확하게 바라볼 곳을 보는지
하나의 몸뚱아리 안에서 내 정신과 다리를 바라보자니
자주 흐려지고 탁해져서인지 오류도 실수도 많다.
게다가
하나의 몸뚱아리이기에 자주 감정이 정신을 이겨먹으려 한다.
그래서 무조건 필요했다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
나를 밖에서 바라봐줄 제대로된 두 개의 눈이.
'공정한관찰자(주1)'이면서, '퓨처셀프(futureself)'인 그녀는 항상 '나그네의 시선(주2)'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벌써 20여년 이상 나와 매순간을 함께 한다.
지금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대화하고 그녀의 훈계를 받고 있는 날 느낄 때 피식 웃음도 나고....
이러한 그녀의 존재를 브런치에 몇 번 글을 써서 올리긴 했는데
2022년 세운 3년목표, 그러니까
2025년에 서 있는 그녀의 시야에
자발적 감시를 당하고 있다.
관찰자이든 퓨처셀프든 어떤 이름이든 상관없다.
지금의 눈 2개로는 부족하니까.
나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무조건 답이다.
'이쪽으로 가면 너처럼 돼?'라고 묻고
'아니, 그 쪽으로 가면 나처럼 안돼!' 하면 가지 않는다.
'그렇지, 그 쪽이야.'하면 힘들어도 간다.
정신이 감정을 이겨 신체를 움직이게 만든다.
'지금 이 속도 괜찮아?'라고 물었을 땐
'너 미쳤구나! 그 속도로 내가 되려 했어?'하면서 눈물빠지게 날 혼내기도 하고
'너무 빨라, 좀 쉬어도 돼'하며 나를 쉬게도 했다.
빨리 달리느라 지친 내 정신을 다시 질서있게 정돈해주며 감정에도 살며시 손길을 준다.
'이걸 잡아, 저걸 잡아?'라고 물을 땐
이쪽이다 저쪽이다 얘기해줄 때도 있지만 그녀는 항상
'둘 다 괜찮아. 하지만 반드시 한쪽은 놔야 해.'라고
잃고 나서 얻는 순리를 알려준다.
'나 잘못한 거 같은데 왜 안 알려줬어?'라고 따지려들면
'일부러 그랬지! 조금 기다려 봐. 그 잘못으로 인해 큰 것을 얻을거야'하며
나보다 더 먼 시야로 나의 잘못이 타당한 결과였고 연쇄적으로 작용원인이 될 것이라 이해시킨다.
여기저기서 의견을 구할 때
이때일까 저때일까 찔끔거릴 때
할까말까 망설이고 두려워할 때
과거의 기억에 정신이 꽁꽁 묶인 채 한걸음도 나가지 못할 때
어떤 공포스러움에 온 세포가 잠식되어 하루 종일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는 살짝 책임을 미루고 더 나아가려 하지 않을 때
못난 내가 뭐라도 하려 애쓰는 그 모습에 내가 가여울 때
다행이다.
그녀의 감시를 받으며 자발적 강제에 날 들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가 24시간 날 지켜주기에 내 삶의 소소한 시간조차 엉망으로 냅두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그녀가 알려주는 길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옳은지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녀를 내 인생에 등장시켜서.
다행이다.
그녀로 인해
나는 나에게 엄격하고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나 스스로 만든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나 자신을 근사한 명함으로 포장된 나보다 더 믿으려 하며
나를 유혹하는 그 어떤 타협에도 내 패를 허락하지 않을 수 있어서.
나 혼자의 힘으로
신독(愼獨, 주3).을 지켜나가기는 어렵지만
그녀를 주인으로,
내가 손님도, 하녀도 자청하니
신독은 오히려
그녀를 매개로 하여
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만들고 있다.
내가 신독을 지키려 애썼는데
신독이 오히려 나를 키워낸다.
내가 그녀를 만들고 따랐는데
그녀가 나를 만들고 키워낸다.
내가 그녀를 만들고
그녀는 나의 삶에 '신독'을 들여 나를 절제시키고
신독은 나의 간절함이 현실이 되도록 나를 키우고
나는 또 더 먼 미래의 그녀를 만드는,
내 인생의 선순환.
내 인생에 줄세워진 저~어기 멀리 누가 서 있나?
바로바로!
'뽀다구나는 할머니!!!!!!'
나는 몸도 정신도 경제력도 지혜도 갖춘
뽀다구나는 할머니로 서있고 싶다.
자식, 손주, 그리고 누구든
삶이 버겁거나 지겹거나 어려울 때
나를 찾아와도 충분히 괜찮은,
뽀다구나는 할머니이고 싶다!
50줄이 넘어서인지
이제
자손들이 '우리 엄마, 할머니, 선생처럼 나이들고 싶다.'고 인정받을만한
그런, 뽀다구나는, 닮고 싶은, 닮아도 안전한, 아니, 닮아야 할 할머니가 되어야겠다.
인정받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닌,
인정받을만한 삶이어야 하겠다.
그래서 그녀에게 오늘도 묻는다.
"나 자격있어?
나 잘하고 있나?
나 이대로 괜찮아?
나 믿지?"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지금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 곳에 계속 쪼그리고 앉아 있게 내버려두겠다.
이 절름발이야. 내가 너를 이 높은 곳까지 업고 오지 않았는가! 보라, 이 순간을!(주4) '
버거워 절름거리고 주저앉으려는 내게 니체처럼 그녀는 소리친다. 그리고 나는 이내 이 문장을 가슴으로 다시 환기시킨다.
이 순간이라는 길에서 하나의 길고 긴, 영원한 골목길이 뒤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 뒤에는 하나의 영원이 놓여 있다....
만물 가운데 달릴 줄 아는 것이라면 이미 언젠가 이 골목길을 달렸을 것이 아닌가?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언젠가 일어났고, 행해졌고, 지나가버렸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었다면,
난쟁이여, 이 순간을 어떻게 보는가?
이 길 또한 이미 존재했었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이 순간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물들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방식에 따라
모든 사물은 이처럼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하여,
자기 자신까지도?(주5)
주1>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 비룡사
주2> 발타자르그라시안, 나를아는지혜, 하문사
주3> 신독 :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감.
주4,5>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건율원 ]
삶의 가치실현을 위한 어른의 학교, 앎을 삶으로 연결짓는 학교, 나로써, 나답게, 내가 되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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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북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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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화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수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