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하여
이 글은 자료를 찾다가 아주 오래전 제 블로그(지금은 하지 않음)에 썼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음... 굳이 이렇게 서두를 밝히는 이유는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경계하는 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사람이 보인다.
웃음에 가려진 비굴이
정직에 가려진 변명이
예의에 가려진 아첨이
칭찬에 가려진 무관심이
자선에 가려진 탐욕이
고급스러움에 가려진 졸열함이
연륜에 가려진 치기어림이
정의에 가려진 독선이
그리고
무엇보다
숨겨뒀는지 가려졌는지 본인도 모르는지
말속에 담겨진 어리냥이, 비겁함이, 비굴함이, 생색이.
그런데 어쩌나..
표정이, 눈빛이, 낯빛이, 근육이
다 드러내는 것을...
나의 오래된 수첩을 뒤적거리다 어느 날 끄적거린 글을 발견했다.
떨어지며 자신을 박살내봐야 두려움의 본질을 알 수 있고
들개로 사는 시간을 보내봐야 싸움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고
엎드려 통곡하는 날들을 보내봐야 더는 거짓에 속지 않고...
네 이빨이 빠지나 내 살점이 뜯기나 해보자! 라는 메모를 적은 포스트잇을 책상앞에 붙여놓은 적도 있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과 전투하고 세상과는, 말이 좋아 도전이지 늘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다.
내가 이랬었구나...
가여운 나를 잠시 토닥토닥...
내가 많이 힘들었나보다. 사업에, 연구에, 연년생 두 아이 키우기에, 잦은 다툼과 상처에... 당시를 기억하면 나는 내 역할과 책임에 지독하게 열심이었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그만큼 상처가 깊었던, 그런 시절에 아마도 나는 스스로에게 들개처럼 살며 박살나고 통곡하는 시간의 정당성에 대해 이렇게 주문을 외우게 했나보다.
그래선지 나는 사람이 두려워졌다. 직접적으로 나를 해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웃음 뒤에 숨은 모순이 보이는 내가 오히려 더 싫었다. '나는 감정없는 냉혈동물이고 싶다'를 바랄 정도였으니 나는 사람들에게 받는 실망과 억울을 이겨낼 근육이 없이, 나약할대로 나약해져버린 것이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면 그 근육은 단단해지지만 악물었던 이는 마모되는 이치처럼 한쪽이 강해지면서 한쪽이 무너진 것이다. '균형'의 깊은 의미를 삶에 녹이질 못했던 나였다.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는 근육이 없었고
사람들이 날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운명은 결코 언어가 아니다.
전생에 한 행위의 결과이다.
그렇게까지 소급할 것도 없다.
한사람한사람의 생활이 그 운명을 만들어간다.
왜 너는 약한가?
네가 수없이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주위의 장난감이 된 것이다.
네가 주위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지 주위가 너를 약하게 한 것이 아니다(주1).
난 아미엘이 참 좋다.
나같아서, 아니 내가 아미엘같아서 참 좋다.
주위의 장난감이 된 듯한, 깊은 곳에서 서로 통하는 이 느낌을 우리끼리만 비밀스럽게 공유하는 듯해서 참 좋다...
내 맘을 아미엘은 알 것 같아서 참 좋고
아미엘의 마음을 나는 알 것 같아서 참 좋고...
아.
지금 이렇게 얘기가 옆으로 새면 안되니까 이 얘기는 나 혼자 그냥 삼키고..
암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간절히 바랬다.
상대의 이면에서 치졸함이 드러날 때 더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용기는 마음내킬 때 꺼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꺼내는 것임을 아는 사람.
분명하게 '네', '아니요'라고 눈치보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주변 공기의 흐름에도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
진리를 말하기 위해 자기인식과 관성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말과 표현에 있어 아첨의 작은 조각마저 없애버리는 깨끗한 사람.
본질에서 벗어난 사실을 다시 본질로 끌고와 대화를 이어갈 명석한 사람.
자기를 드러내려 하기보다 사실에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
통역이 필요하더라도 자신의 의미를 애써 전하려는 사람.
욕먹을 것을 알면서도 더 큰 진심으로 상대에게 본질을 보여주는 사람.
비판과 논쟁을 예의로 포장하지 않는 진정한 선을 아는 사람.
위장된 위로보다 따끔한 조언과 충고로 상대에게 더 큰 신뢰를 주는 사람.
지성을 한순간의 오락이 아닌, 격조있는 쾌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을 원한다.
그러나 참으로 드물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어서 내 곁에 이런 이들이 없는 것인지
내가 눈과 영혼이 맑지 않아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인지
내가 머무는 환경이 이런 곳이 아니어서 잘못 머물고 있는 것인지
내가 망상가처럼 바래서는 안될 것을 바라는 것인지.
여하튼, 나는 이런 사람이 좋기에 내가 먼저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래야만 바라는 바가 탐욕이 아니라 정당한 욕구가 되니 나부터 변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변화시키는 것에 초집중했고
수년이 지난 지금, 사람의 향기가 무엇인지, 당시 그러한 냉랭했던 기운들이 왜였는지, 나에게 과부족은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씩 어른답게 알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1글자 3가지.
격이 높고 결이 고와 곁에 있고 싶은 사람.
이런 이가 나이길,
이런 이가 나와 함께 하길 바란다.
어리숙한줄 알았는데 순수하고
무식한 줄 알았는데 영리하고
허술한 줄 알았는데 섬세하고
더딘 줄 알았는데 정교하고
아둔한 줄 알았는데 인내하고
화내는 줄 알았는데 배려이고
냉정한 줄 알았는데 결연이며
무심한 줄 알았는데 철저한 무관심인....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쓸 것을 알면서도 용기있게 행하는 언행속에
결코 경험에서 터득되지 않으면 어려울법한 진리의 실천이
끝없는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실천이
깊은 사고와 단단한 사유의 길에서 깨달은 덕(德)의 실천이
자연스레 전해지는 그런 사람.
그렇게 행동 이면의 진심에서 광채로 풍겨져 나오는 그런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할까...
소로우가 여성 가운데 가장 대화하기 좋아하는 여성인 메리에머슨(그녀는 랄프왈도에머슨의 숙모이며 당시 나이 75세였다). 나도 그녀처럼 나이들고 싶다.
소로우에 의하면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여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사색가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끈기를 발휘해서 알아내고 싶어하는 여자,
그녀가 가는 곳마다 그녀와 관계맺는 지식인이 있는,
말동무에게 최상의 생각을 말할 기회를 제공하는 재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고에 담긴 지성을 이해하는,
자신이 아는 여성 중에서 여성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대화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여성(주2).
사람이 싫었고 두려웠고 피했지만
이제 사람을 아름답다, 감사하다, 귀하다 여길 수 있는 나로 되어 가는 지금,
나도 메리에리슨처럼 70이 넘어도 30대의 총각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편하게 대화하며 함께 사색하며 사유한 것을 나누며,
보태줄 지혜가 있다면 더할 나위없는,
그런 여성으로 나이들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믿음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제안을 하고, 제안을 수락하는 것으로 인해 서로가 서먹해지는 관계가 아니라
어떤 이해관계없이 말하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서로 나란히 한참을 걸을 수 있는 관계다.
이 점만 확신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제안도 다 수락할 것이며 나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관계로 인해 내가
책속 죽은 이들보다, 펜보다, 책상보다, 그리고 자연보다
사람을 더 좋아할 수 있는,
보다 성숙한 사람, 지담이 되고 싶다.
주1> 아미엘, 아미엘일기, 범우사
주2> 헨리데이빗소로우, 소로우의일기, 도솔
[지담연재]
월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화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수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