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4. 나를 규정하다 5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이자 이유이며
나아가 진정한 이타다.
나를 해체, 재조립하며 깨달은 것들을 통해
나는 내 삶과 나를 바라보고 규정하는
15가지 관점을 얻었다.
오늘은 그 5번째.
[CH4. 나를 규정하다 5 - 나는 땅이다!]
땅은 세상에 펼쳐진 바닥, 판이다.
땅은 모든 유기물을 품고
무엇이든 잉태시켜 탄생시키고
죽은 것들을 다시 품어 새생명으로 소생시킨다.
땅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물에게 길을 터준다. 땅과 물... 땅은 생명인 물을 머금는다...땅속에서의 유기적인 순환은 참으로 단순하다. 생성과 소멸. 이 단순한 반복만을 거듭한다. 내 안의 열정이 그렇다. 내 안의 생각이 그렇고 내 안의 의지가 그렇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때론 들끓어 화산처럼 폭발하고 때론 조용히 안에서 맴돌다가 소멸되기도 하고 때론 죽은 것들을 보태 새로운 창조물을 제작, 조작해내기도 하고 때론 고여 썪기도 하고... 땅이 물과 함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듯 나의 땅속도 열기와 냉기로 끊임없이 순환하며 정화된다.
땅 속, 그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아직 땅의 비밀은 풀리지도 않았다. 지금껏 파내려간 땅은 극히 일부분이다. 아직도 신비에 쌓인 대지는 넓고도 깊다. 계속 파고 또 파면 지구의 중심에 닿을까 아니면 지구의 밖으로 튀어나갈까. 진짜 '시머스의 구멍(주)'이 있는지 어떤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머나먼 미래까지 결코 알려지지 않을 그 심연에 얼마나 많은 원석들이 묻혀 있을까.... 내 안에도 그럴 것이다. 내 안에도 세상의 보석이 되어줄 원석이 있다. 나도 모르는.. 깊이 내재되어 있는...내 땅의 깊이를 나는 모르지만 분명 무궁무진한 원석이 가득할 것임을 나는 안다.
땅에서 솟구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조그마한 싹이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뻗어 오른다. 나의 꿈도 그럴 것이다. 대자연이 허락한다면 말이다. 자연의 허락은 자연의 필요에 기준한다. 어떤 싹은 태양을 비롯한 자연의 허락으로 튼실하게 기세를 떨치겠지만 또 어떤 것은 자연에게 거부당할 지도 모른다. 또 어떤 것은 너무 연약해 자연의 보호에도 자신을 지켜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땅에서 창조되는 모든 것에는 대자연의 허락이 필요하다. 태양도 구름도 비도 바람도 모든 것들을 동원시켜 싹이 나무가 되고 나무에서 열매가 맺기까지 땅은 늘 대자연을 갈구한다. 나도 그렇다. 솟구치듯 세상이 다 내것인양 일이 잘 될 때도 있고 모든 것이 완벽한데도 일이 어긋날 때가 있다. 내가 관장할 수 있는 영역밖은 반드시 존재한다. 여기까지 알고자 하는 것은 주제넘는 짓이다. 나는 땅이니까. 그저 내려주는대로, 불어오는대로 선택되어지게끔 무엇이든 끊임없이 창조하여 세상으로 내보내고 또 내보내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역할일뿐. 나머지는 자연의 몫이다. 세상이 자신의 설계에 합당한 것을 선택하여 땅위를 구성한다. 나라는 땅으로부터 창조된 것도 그럴 것이다.
땅위에는 두발달린 새들, 네발달린 짐승들, 셀 수없이 많은 발을 가진 기어다니는 벌레들, 그리고, 발없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함께 한다. 지난 50여년간 나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때론 기어서, 때론 걸어서, 때론 달려서, 때론 뒤돌아서, 때론 앞장서서, 때론 내 손을 잡고, 때론 내 손을 놓고, 때론 떼를 지어서, 때론 고요히 홀로, 때론 기운 넘치는 기세로, 때론 기운빠진 형세로, 때론 잠시, 때론 오래 그렇게 내 인생에 들렀었다. 그렇게 나의 속으로, 내 감각과 정신의 토대인 기억과 추억의 일부로 남겨졌고 또 앞으로 올 수많은 인연도 그렇게 땅에 심기듯 내 삶에 남겨지겠지. 땅은 공존을 위해 어떤 것은 소멸시키고 어떤 것은 탄생시킨다.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도 그런 이유에서 내 삶으로 진입하고 또 남기고 또 그렇게 떠나는 것이다.
땅은 아무리 싫어도 하늘을 볼 수밖에 없다. 보여서 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세를 고치려해도 보인다. 하늘이, 그 드넓은 하늘이... 그저 눈에 들어올 뿐... 하지만, 만질 수도 만날 수도 없다. 땅은 아쉬운 마음에 고인물 속에 하늘을 품는다. 현실에 발을 디딘 나도 하늘을 바라보며 내 가슴 속에 나만의 이상을 품는다.
하지만, 땅과 하늘이 만나는 곳은 존재한다. 저어기 뉴질랜드에 있다고도 하고 땅끝마을에도 있다 하니 내가 그리로 가야지 여기서 제 아무리 까치발 들고 하늘에 손내밀어봤자 소용없다. 기차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기어가든 뛰어가든 여하튼 절뚝거리더라도 거기까지 가야만 하늘을 만날 수 있다. 내 삶의 어느 지점에도 반드시 그렇게 이상과 만나는 곳이 있다. 그러니 나는 그 곳을 향해 가야만 한다. 인위적으로 축적된 관념과 치장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나의 본성' 자연스러운 그 자체여야 그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땅속에서 솟구쳐 세상밖으로 튀어나온 모든 것들에게는 그 어느 하나 빠짐없이 결과까지 가야할 숙명이 있다. 중간에 죽어버린 무언가도 거기까지가 결과이며 끝까지 살아남아 튼실한 열매를 자랑하는 과실수도 그 자체의 결과다. 땅은 항상 결실을 요구한다. 결실까지 가다가 포기하는 것들에 대해서 땅은 다시 자신의 품으로 회귀시켜 재생성시켜서라도 결실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땅이 원천적으로 원하는 것은 결실을 맺고 이 결실의 잉여를 서로 나누게 하기 위함이다. 흔하디 흔한 민들레도 돌틈에서라도 씨를 생성해 바람의 힘을 빌어 나누려하듯 못났든 잘났든 나 역시 창조와 생성에 땅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잘난 녀석만 키우는 땅은 없다.
버려진 녀석을 거부하는 땅도 없다.
그저 자기안에서 나온 모든 것들을 숙명처럼 결과로 만들고 또 만들도록
보듬고 품는 것이 땅이다.
흙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완전히 갈아엎을 수도 없다.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가 없다. 그저 주어진대로 나는 더 비옥하게 나를 가꾸는 것만이 유일한 나의 몫이다. 설사 새로운 흙인들 완벽할까. 그 자체에 또 다른 유기물질들이 보태지지 않으면 그저 조금 다른 흙일뿐. 흙을 갈아엎으며 흙을 원망하고 흙에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땅에 이롭다. 하늘이 내려주는 비도 맞고 바람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걸러내며 나는 땅의 본분대로 비옥하게 스스로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 그 토대인 흙에 감사하며 말이다.
세상의 허락하에 어떤 장애없이 건강한 육신으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혜택으로
이제는
땅의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땅의 청각으로 세상에 귀를열고
땅의 전령으로 다리를 옮겨가며
땅의 감각으로 기세를 느끼면서
땅이니 땅답게 진동을 울리리라.
그렇게 땅에서 탄생한
설악초는 설악초를 피우는 것으로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는 것으로
잠자리는 하늘을 나는 것으로
매미는 여름내 울어대는 것으로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으고
사자는 영역을 지키는 것으로
그렇게 본분을 다해야겠지.
그렇게
땅에서 탄생한 것들이 성실의 옷을 입고 자기만큼의 잉여를 생산하면
설악초는 보는 이의 눈을 아름답게
사과나무는 우리에게 탐스럽게
잠자리는 한여름 장난꾸러기들과 신나게
매미는 고진감래의 진리를 깨닫게
다람쥐의 우매함은 다시 땅 속의 영양분으로 알차게
사자는 우두머리다운 기세를 전하며 기운차게
그렇게 세상에 가치를 전하며 조화에 이롭겠지.
모든 땅위의 것들은 그렇게 흙으로부터 비옥한 땅위에서
오로지
태어나며 거머쥔 하나의 숙명을 위해
하늘을 날며 땅위를 기며 산길을 헤매이며 물속을 헤엄치며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무엇을 하든
그저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자연에 의지하고 자신을 키워내면 되겠지.
그러니 나 역시
나부터 비옥하게 만들어 깊은 내면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모든 것들을 세상에 내보내며
간절히 대자연에게 갈구하면 되겠지. 이 여리고 작은 씨앗이 잉여롭도록 도우소서.... 하며.
그렇게 세상에 뿌려진 씨앗들이 자연과 교류하고 교감하며 쓰여질 목적에 쓰이도록
신성한 자세로 무관심하면 되겠지
나 태어난 하나의 목적에 타당한 의무품고
땅의 한계없는 포용과
온기와 냉기 모두 품은 푸근함과
흡수하고 발산하는 활기와
무한한 잉태와 생성의 연속이면
저어기 하늘끝, 나의 이상과 맞닿는 지점에 반드시 닿는 날이 오겠지.
내가 뿌린 수많은 씨앗들이
자연의 허락에 타당한 것들인가.
자연의 필요에 부응한 것들인가
자연의 혼합에 정직한 것들인가.
자연의 잉여에 도움될 것들인가.
나는, 우리는 몽고부터 시베리아까지 정복한 징기스칸이 되려 한 인생 바둥대며 산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자기자신부터 정복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내 안에 품은 광활한 우주를 자신의 땅위에 펼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훗날 자신의 반석위에 자기 존재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땅 속에 들끓는 나의 열정과 의지들
땅 위에 오가는 나의 수많은 상념들
땅과 마주하는 나의 수많은 관계들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를 이끄는 길은
'땅으로서의 나'부터 정복하여
광활한 우주에 참으로 이로운 인간으로서의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1818년 존 클리브스 시머스(John Cleves Symmes, 1780~1829)가 '나는 지구의 속이 비어 있고 그 안에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지구 속에는 몇 개의 단단한 동심구가 존재하며 각각의 극 부분은 열려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