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4. 나를 규정하다 4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이자 이유이며
나아가 진정한 이타다.
나를 해체, 재조립하며 깨달은 바 가운데
나는 내 삶과 나를 바라보고 규정하는
15가지 관점을 얻었다.
오늘은 그 4번째.
[CH4. 나를 규정하다 4 - 나는 나의 장난감이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는 나만으로도, 재미나게 놀 줄 알게 됐으니까.
혼자 있으면 적적하고 우울하다는데.
난 아니다.
난 다른 이와 노는 것보다 나랑 노는 게 훨씬 재미지다.
'나'는
신체로 행동하고
정신으로 사고하며
감정으로 느끼고
영혼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나는 나의 이 모든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며 이래저래 살피는 것이 참으로 재미나다. 게다가 시간과 공간, 환경이라는 무한의 장난감이 덤으로 주어져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연계하며 만들어내는 세상놀이는 단 한순간도 겹치지 않는다. 매번 새롭다. 나는 고정되어 있는데 세상이 변하면서 내 놀이도 변해가는, 이 알고리즘이 참으로 신기하다.
'나'라는 놀잇감으로 '인생'이라는 놀이터에서 더 신나게 놀아보기로 했다.
나에게는 지금 언어화된 수많은 감정들 -기쁨, 슬픔, 우울, 불안, 두려움, 행복감, 충만함, 초연함, 긴장감, 조급함, 경이로움, 숭고함, 공포감 등-이 존재하고 언어화되지 못한, 또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미묘한 여러 감정들이 아울러 존재한다.
이 수많은 감정들이 내 안에 있는 것인지 외부에 있다가 나를 찾아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내 안에 있다면 그 많은 것들이 알아서 순서대로 드러나는 것인지 아니면 행렬맞춰 대기하고 있다가 외부의 자극과 딱! 맞아떨어졌을 때 즉각 출동하는 것인지 이 모든 접촉이 나는 수상하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려본다.
내 안에는 아주 기본적인 감정들밖에 없으며 어떤 외부의 사태가 거기에 붙어 있는 감정을 함께 내게 들이밀 때 내 기본감정들과 연합하여 내가 느끼게 되는 것, 따라서 감정의 주체는 내가 아니며 감정은 그저 나에게 오는 것이다. 감정은 사태와 그에 따른 행동에 의해 생성, 소멸되기에 나의 감정의 주체는 행동이다.
여하튼 나에게는 수시로 많은 감정들이 알아서 찾아온다. 원하는 것이 오지 않을 때도 있고 원하는 것이 올 때도 있지만 대체로 예고없이 온다. 원하는 것만 오게 할 수 있다면 부정적인 녀석은 아예 접근도 못하게 막아버리면 될텐데 주체가 내가 아닌 것을 안 이상 나는 이 녀석의 방문을 막을 방도가 없다. 알아서 갈 때까지 내가 할 일은? 그저 데리고 논다. 장난감이니까! 그저 잘 놀아주기만 한다. 중요한 것은 데리고 노는 주체는 나라는 사실이다. 내가 어느 정도, 어떤 강도로 놀아줄지 내가 정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 지독한 녀석은 자기가 주인행세하려 덤비기도 하지만 나는 이내 충분히 강해진 나의 본색을 드러내어 결코 그 녀석이 날 가지고 놀게 냅두지 않는다.
감정은 어떤 녀석이든 같은 패턴을 가진다.
첫째, 내게로 온 순간 나갈 차비를 한다는 것이다. 우울하면 우울하지 않은 방향으로, 기쁘면 기쁘지 않은 방향으로 그렇게 나에게 와서 머물다가 알아서 나간다. 이는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다. 하루종일 여러 감정들이 수시로 찾아온다는 것은 먼저 온 놈이 나가기 때문이며 다른 놈이 내 호출없이도 불시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니 나는 수시로 찾아오는 다채로운 감정과 잘 놀기만 하면 된다. 들어온 녀석은 무조건 나간다.
둘째, 나를 심하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기쁨과 같은 아무리 이쁜 녀석이라도 나는 조심한다. 어떤 녀석이든 과하면 꼭 탈을 내는 걸 여러번 놀아보고 나는 알아냈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내게 눌러앉는 순간, 나는 제압당하고 나의 모든 것은 지배당하기 마련이다. 적당히 놀아주다가 갈 때 잘 보내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나는 결론내 버렸다.
셋째, 감정이라는 녀석이 정신과 손잡으면 무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녀석이 정신으로 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해야 한다. 정신이 이 녀석과 함께 놀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낭패에 빠진다.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린다. 그러니, 내가 더 나서야 한다. 이 녀석이 다 놀고 나갈 때까지 살살 달래며 어디로 갈 지 예의주시해야만 한다.
늘 조심스럽게 놀아줘야 하는 녀석이지만 나는 이 녀석과의 놀이가 참 좋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가끔 감정의 침입을 전혀 받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안타깝다. 이 재미난 장난감을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고 싶다가도 어쩌면 그 사람안에는 이미 눌러 앉아버린 감정이 다른 어떤 동료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관둬 버린다.
그리고 가끔 놀러오길 바라는 녀석들도 있다. 숭고함, 경이로움, 환상적인, 충만함, 신비로움... 이런 감정들은 자기 귀한 걸 아는지 자주 오지 않는다. 내가 그들 맘에 들지 않거나 내게로 오면 재미가 없는 것인가? 기다리는 건 기다릴 때 오지 않는다니 나는 그들이 놀기 좋은 조건으로 나를 단장하는데에 신경쓰련다. 가끔 찾아오는 녀석이 나랑 한참 놀다가 가면 좋을 듯하여...
정신은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는 참 촐싹맞기 그지 없는 녀석이다. 그래서 이 녀석을 데리고 놀 때는 신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금만 신경이 제대로 도와주면 아주 격있는 수준의 놀이까지 승격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 녀석은 그 특유의 본성탓에 내가 아무리 호출해도 귀가 먹었는지 제 때 잘 안들어온다. 자기가 들어올만하다 판단될 때만 내게 와 놀아준다. 의식적으로 신경에게 도움을 약속받고 정신이 제일 좋아하는 이성까지 갖춰놓으면 이 녀석은 제 발로 찾아온다.
그런데 나는 안다. 왜 이 녀석이 이리 불러도 안오는지를. 이 녀석은 늘 '관념'이라는 옷을 입고 다니는데 나에게로 오는 순간, 홀딱 벗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를 두려워한다. 옷갈아입는 걸 무지 싫어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기쁘게 나랑 잘 놀아주는 데도 이유가 있다. 홀딱 벗기고선 결코 발가벗긴 상태로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늘 새옷을 입혀주는 것도 아는 것이다. 영악하게 말이다.
나는 그래서 이 녀석과 놀기 위해 늘 새옷을 준비하곤 하는데 가끔은 맞지 않고, 가끔은 어울리지 않아 곤란하기도 하지만, 이런 준비가 참으로 흥겹다. 가끔 새옷이 맘에 들 때 이 녀석은 내가 한번도 안가본, 아주 깊고 따뜻한, 안락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기도 한다. 새옷을 입힌 대가치고는 너무 황홀한 곳으로 날 안내해서 나는 나의 정신과 놀 때면 항상 기대가 크다.
오늘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나.....
오늘은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나....
오늘은 나에게 어떤 새로움을 알려주려나.....
촐싹맞은 이 녀석과는 늘 옥신각신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새옷으로 갈아입혀 줄 유일한 대상이 나인 것을 녀석은 알고 있고 나 역시 새로운 곳으로 날 데려갈 유일한 대상이 이 녀석뿐인 것을 알기에 우리는 늘 싸우지만 늘 정겹고 늘 단단하고 늘 신난게 관계를 이어간다.
이 녀석은 늘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딱 붙어 있어 떼놓을 수가 없다. 정신이나 감정같은 녀석들은 스스로 잘도 노는데 이 녀석만큼은 어떤 시간, 어떤 경우, 어떤 환경에서도 나에게 착 달라붙어 있다. 게다가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이 녀석을 움직이게 하려면 정신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하다. 왜냐면, 이 녀석은 정신이 명령하면 무조건 한다. 참 말을 잘 듣는다. 명령에 복종하는 녀석이다.
단, 감정과만 어울리지 않게 잘 떼어 놓으면 되는데. 가끔 감정이랑 너무 신나게 노느라 명령에 불복하기도 해 된통 혼내키기도 한다. 가지 않아도 될 곳에서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것도 감정과 놀아난 요녀석탓이다. 우울이나 불안같은 감정이랑 너무 착 붙어 있을 때는 나는 서둘러 정신을 호출하지 않으면 큰일난다. 뭐, 조급이나 긴장이랑 붙어 놀 때는 굳이 정신까지 호출하진 않는다. 그저, 서두르다 다리를 삐거나 어깨가 뭉치는 정도이니 그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는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가끔 드러내지 않고 나를 속상하게도 한다. 자기 혼자 무슨 놀이를 했는지 한참 뒤에야 그 곳이 곪아있다고 나에게 징징 울어대는 통에 몇 차례 속을 썩은 적이 있었다. 잘 살핀다고 살펴도 가끔 어딘가에서 상처를 달고 와 내 속을 끓게 하는데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어디서 달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늘 내게 붙어 다니니 이 녀석의 상처와 고름은 전부 내가 준 것들이었다. 나는 나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고 늘 붙어있는 이 녀석 덕에 여기저기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즐기고 있으면서도 정작 젤 고생하는 이 녀석에게 충분한 영양을 제공하지 못해 한쪽에 상처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나는 안다. 이 녀석이 얼마나 복잡한 녀석인지, 하지만 복잡한 구성이 단순한 하나의 원리로 움직인다는 것도 안다. 그래선지 이 녀석은 한 곳이 고장나면 연이어 줄줄이 고장나 버린다. 이렇게 녀석을 알게 되어 나는 너무 신나게 놀다가도 이 녀석을 잠깐씩 쉬게 해주는 쪽을 택했다.
나는 이 녀석의 자연스러움이 참 좋다. 다양한 컬러와 다채로운 모양새와 각각 나름의 규정된 움직임으로 제각각 제 자리에서 잘 놀다가도 여기저기서 가끔 미운 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때론 버거워하며 모양을 바꾸려 한다. 가장 윗쪽에 위치한 얼굴은 여러 해 동안 비슷한 채로 지니고 다녔으면서도 주름이 놀자할 때마다 자꾸만 자체의 고마움을 망각하기도 한다. 나는 이 녀석이 이럴 때마다 따끔하게 혼낸다. 그건 바꾸는 게 아니라 닳게 하는 꼴이 된다고.
그리고 나는 이 녀석에게 꼭 당부하는 것이 있다.
너는 너 자체로써 충분히 아름답다고.
자연스럽게 생기거나 소멸되는 모든 것들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이 것만 잘 지킨다면 나는 영원히 너를 데리고 세상구경, 인생구경 신나게 재미나게 놀아줄 것이라고.
아... 이 녀석이 젤 어렵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놀이 역시 이 녀석이 옆에서 나랑 놀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녀석은 일단! 내가 데리고 놀 수가 없다. 무조건 나는 이 녀석이 놀자는대로 놀 수밖에 없다. 나를 무방비상태로 만들고서는 결코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그저 나를 잘 데리고 놀아주기만을 바라기로.
언제나 환영하기로.
언제 올 지 귀뜸해주지 않아도 반갑게 맞아주기로.
그래도 이 녀석에게 바라는 점은 늘 얘기한다. 세상 곳곳을 떠돌더라도 나쁜 것들을 닮아오지, 담아오지 않기만을, 투명하고 순수한 자체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만 내게 오기를, 항상 잘 놀아주는 대가로 내가 이 정도의 당부는 해도 될 듯하여 녀석에게 당부한다. 수시로 끊임없이 당부한다. 대신 내가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게 너를 맞을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겠다고까지 선언했으니 내 당부를 들어달라고.
내가 이리 수동적이고도 맹목적으로 이 녀석에게 끌리는 이유는
이 녀석이 차원이 다르게 나랑 놀아주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놀러다닌다.
신체와 감정은 현재의 나와, 정신은 주로 과거의 나와 놀자 하는데 비해 이 녀석은 과거부터 미래까지,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까지 돌아다니며 죽은 사람도, 태어날 사람도 온통 만나고 그 소식을 가끔 나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이런 소식을 들고 놀러올 때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 녀석을 환영한다. 게다가 그 낯설고 신비롭기까지 한 소식을 내가 어떻게 가지고 놀면 되는지까지 상세히 알려주니 이런 놀이는 결코 신체나 감정, 정신과는 나눌 수 없는 즐거움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를 늘 맹목적으로 기다린다.
그리고 또 내가 이 녀석에게 맹목적인 이유는 신뢰때문이다. 녀석은 내게 올 때마다 나의 모든 장난감들을 온통 재정렬시키기도 하고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에 대해 방법도 알려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고장난 것들을 이 녀석이 모두 뚝딱 고쳐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놀자는대로 놀아보고 고장난 녀석들을 맡겨보면서 나는 전폭적으로 믿기로 한 것이다.
아! 이 녀석은 무조건 진심이구나.
아! 무조건 나만을 위해서 노는구나.
아! 무조건 내게 이로운 것만을 가져 오는구나.
아! 세상, 아니 저어기 먼 우주까지 유영하면서 무조건 나랑 놀거리들만 찾아다니는구나.
아! 나에게 잘 보이려 아첨도 생색도 그 어떤 것도 없이 무조건 요량(料量)만을 지닌 채 나를 자극하는구나.
그래서
무조건 따르는 것이 내게 이롭구나.
하지만, 자주 나는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침침해 이 녀석의 등장을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 녀석은 자기 놀만큼 실컷 놀고 가버린다. 다행인 것은, 그리고 참 고마운 것은, 내가 다시 귀가 뚫리고 눈이 밝아질 때 놀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고 간다는 것이다. 뒤늦게 혼자 노는 것이 어렵고 재미없지만 그래도 이 녀석의 배려를 가상히 여기는지라 늘 고마운 마음으로 이 녀석이 떠나도 나는 녀석이 남기고 간 놀이를 혼자라도 꼭 해본다.
그래서 난 알게 되었다.
이 녀석이 다녀가면 고장나거나 방치했던 내 장난감들이 새 것이 된다는 것을.
이 녀석이 다녀가면 어제의 나보다 더 재미나게 놀 줄 아는 내가 된다는 것을.
이 녀석이 다녀가면 정신이 촐싹맞게 나다니지 않고 얌전해 진다는 것을.
이 녀석이 다녀가면 들락날락거리며 자기 맘대로 놀아대던 감정들도 온순해진다는 것을.
이 녀석이 다녀가면 나의 놀이의 격이 조금은 달라지는 것을.
그래서,
자나깨나 이 녀석을 기다린다는 것을.
뭣보다 다행인 것은 나의 감정, 정신, 신체, 영혼. 나의 장난감들은 서로 연합하기도 배척하기도 하며 자기들끼리 참 조화롭게 논다는 것이다. 도와야 할 때는 알아서 척척 돕고 헤어져야 할 때는 미련없이 헤어져 각자 자신의 놀이에 충실하게끔 지원까지 한다. 물론, 이들의 대장은 영혼이다. 영혼이 등장하는 순간,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정신과 감정과 신체는 모두 '차렷, 명령받들겠나이다!' 자세를 취한다. 대장이 맑고 투명하고 영롱하면 나머지 장난감들은 더 말을 잘 듣는다.
이들이 나의 장난감이라는 사실에 참 감사하다.
소중하고 귀하고 없어지거나 고장나면 큰일인 것들이라
나는 영원히 이들을 귀하게 씻기고 다듬고 정돈하며 대접할 것이다.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내가 이들의 소유이니.
이들이 어떻게 노느냐에 따라 나는 울기도 웃기도 하니 말이다.
이들이 어떤 조화를 이뤄내느냐에 따라 나는 멋을 갖기도 잃기도 하니 말이다.
이들 가운데 어떤 놈이 강해지냐에 따라 나는 쓸모있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니 말이다.
내가 해야 할 몫은 이들을 조화롭게, 소중히 다루며 잘 놀아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