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4. 나를 규정하다 3
'이기(利己)'.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이자 이유이며
나아가 진정한 이타다.
나를 해체, 재조립하며 깨달은 바 가운데
나는 내 삶과 나를 바라보고 규정하는
15가지 관점을 얻었다.
오늘은 그 3번째.
[CH4. 나를 규정하다 3 - 내 돈의 절반은 내 것이 아니다!]
느닷없이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이 말을 한 나 역시 '도대체 뭔 소리야?' 싶었다.
새벽독서시작하고 1000일 정도 지났을까... 느닷없이 이 생각이 문득 내게 온 것이다. 그래서 '어? 이거 뭐지?' 했었다. 감히 말하건데 이 규정은 내가 주입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내 관념을 뚫고 침투한 것이라 내 의지로 내보낼 수 없는, 그렇게 부여받은 규정이다.
살면서 가끔 이런 경우가 온다.
내가 거부해도 결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떤 규정, 명제들.
이 명제들과 씨름할 것이 뻔하지만 제 아무리 온몸으로 거부해도 한판승으로 내가 질 것도 뻔하다.
이들 명제는
내 관념에 어떻게든 쑤셔박아서라도 투입시켜 자리를 틀러 온 것이다.
아주 강한 마력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중력으로, 그 무엇도 당해낼 수 없는 위대한 위력으로
나로 하여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식적 행위를 하게 만들려는 그런 명제들.
이번 규정이 내겐 그렇다.
참 중요하다.
아니, 돈이 중요하다기보다 '경제적 / 시간적 자유'가 필요하고 중요하다.
난 책과 글로 노닥노닥 살고 싶다. 쇼펜하우어도, 몽테뉴도 경제적으로는 자유로웠기에 자신의 온생을 고독과 싸우며 글을 쓸 수 있었고 소로우도 '자발적 가난'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에머슨이라는 든든한 경제적 지원자(물론 일부지만)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지 모른다.
노동이 무가치하다거나 힘들어 거부하겠다는 의도는 없다.
50이 넘으면서 앞으로 내게 올 숫자에 뭔가를 채울 때에는 좀 더 진하고 깊게 꾹꾹 눌러서 하나하나의 숫자에 가치를 담고 싶은 의도가 있을 뿐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일치하길 바래서다.
그렇게 세상에 '나'로써 유용하게 쓰이고 싶어서다.
그런 길 위에서 방해없이 나를 걷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악착같이 모으며(모은 돈이 지금은 자녀에게 탕진되고 있을지라도) 아껴쓰는 것은 국보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사실 쓸데도 없고 애쓰지 않아도 어려서부터 몸에 베인 습관 덕) 나름 돈이 들어오는 통로도 몇 군데 있어서 굳이 돈돈거리지 않아도 괜찮은 삶이긴 하지만
그런데!!
왜 나에게 느닷없이!!!
오마이갓이다!!!!
아깝다.
그렇지만
...
아깝지 않다.
이 무슨 궤변이냐면,
돈만 보면 아깝지만
돈의 가치로 보면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의미다.
돈만 보면 나눌 이유가 없지만
돈이 나에게 터를 잡은 이유를 찾으면 나누는 것이 의무라는 의미다.
돈만 보면 돈불리는 것이 더 행복이겠지만
돈이 자기 몸집을 불리는 방향을 보면 돈이 가고 싶은 길이 보인다는 의미다.
나는 참으로 복많은 인간이다. 고생을 별로 하지 않았다. 굳이 남들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실부모했다거나 부모에게 가난을 물려받았다거나 무언가를 돈때문에 못했다거나 몸 어느 한 구석이 고장나 지속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거나 사기를 당했다거나 여하튼 크게 돈때문에 어려웠던 적은 없다.
고만고만한 살림이지만 힘들었거나(물론 상대적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연명해야 하는 삶은 살아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런 지난한 삶이 내게 오지 않게 할 자신정도는 지니고 있다.
이는 대단한 복이다.
조상의 덕이다.
나의 운이다.
그런데 새벽에 읽는 책에서 계속 나에게 강요되다가 서서히 날 채워버린 단어가 있다.
물론 나의 연구의 지향점도 '공공선(common good)'이기에 내 논문에도 이 단어는 수시로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다. 인간의 궁극의 행복은 '함께'이며 '나누는' 것에 있다. 나는 인간의 궁.극.의.행.복.을 맛볼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사용하고 싶다.
이 둘을 다 가지겠다 욕심부리니 너무 단순해졌다.
'선'이 무엇일까?
잉여의 나눔이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도움받지 않을 정도의 기준으로, 이 기준을 초월한 소유에 대해서는 나눌 수 있는 삶. 어쩌면 애덤스미스가 언급한 '인간은 누군가를 도울 때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주)'라는 본성의 발로일 것이다.
나는 특별히 자선을 베풀거나 어려운 누군가로 인해 가슴아파하는 사람은 아니다. 남들과 비슷비슷하게 봉사정도는 하고 살았지만 특별하고 투철한 정신으로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실행해온 인간도 아니다. 또 그렇게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란 사람은
제 아무리 전쟁이 나도 내 손톱밑 가시가 더 아픈 1인이다.
내 시간을 남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고 내 정신을 무료로 나누고 싶지도 않다.
나는 배 곯으면서 남을 배불리 먹일 포용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왜 '내 돈의 반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규정을 지니게 되었을까?
3년정도 책을 읽었을 때부터 서서히 자리잡혀 새벽독서 5년을 넘긴 지금은 이 규정을 지켜나가는 것이 '진짜 나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지금껏 멋진 부모에게서 충분한 지원으로 성인까지 양육되었고 나의 성인시절도 그다지 어려움없이 살아왔지만 반면, 지구 반대편, 또는 내 뒤에, 내가 보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명을 보존해야만 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선'이란 단어는 지구상에서 사라졌을테니까. '도움'이라는 단어 역시 불필요할테니까.
이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사가 그리 양극으로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에서 한쪽은 다른 한쪽을 감추고 있다. '신의 패권은 항상 한쪽이 무겁게 마련(주2)'이다. 그러니까 항상 한쪽이 무거워 세상에 먼저 드러나는 면이 있지만 먼저 드러날 뿐 그 배후에는 평정을 위한 다른 쪽이 반드시 숨어 있다.
필요하다는 것은 요구되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요구된다는 것은 공급과 수요가 이뤄진다는 의미다.
어쨌든 내놓고 가져가고, 가져가면 또 내놓고.
이런 원리가 세상을 움직인다.
지구상에서 누군가는 내 것을 내놓고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 살아간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순환의 원리인데
지금껏
나는
도움을 받은 적은 없다.
즉, 내가 도움을 받는 쪽이 아니라면 도움을 주는 쪽에 속해 있다는 의미로 단순하게 정리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도움주는 쪽'에 속해 있으니 내 것을 내놔야 한다.
또한, 내가 '도움받지 않아도 되는' 인생을 살면서도 내놓지 않고 산다는 것은 누군가가 날 대신해 물질이든 정성이든 정신이든 무엇이든 더 내놓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양을 다른 이가 채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하튼 이렇게 단순한 구분, 단순한 명제에 의해
양극의 원리까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 원리에 의해 나는 당연한 논리로 이해되었다.
몇가지만 더 보태자면,
첫째, 나는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났다.아니, 신이 나를 살려놨다. 오늘도 나를 잘 사용하라는 의미다.
둘째, 책에서 항상 '선', '덕'에 대한 추구야말로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자꾸 알려준다.
셋째, 나는 어디 아픈 데도 없고 팔다리, 게다가 정신까지 멀쩡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신체와 정신과 영혼이 나름 괜찮다. 잉여정도는 있다고 여긴다.
넷째, 달리 돈쓸 곳이 없다. 먹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가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 그저 책이나 사고 김치랑 쌀만 떨어지지 않으면 나는 만족한다. 노트북이나 좀 가벼운 놈으로 바꾸고 싶긴 하다.
다섯째, 자선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나,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고 정의롭게 이 규정을 인정한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이 내게로 오는구나.'라는 명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또 반을 내놔야 정의로운 것이라는 사실에 인정했을 뿐이다.
양극과 균형의 원리에 5가지 소소한, 거부할 수 없는 이유까지 보태어 정리해보니
더더욱
내 돈의 50%는 내 것이 아니다!!! 가 뚜렷해졌다.
능력주신(능력받은) 내가
'어쩔 수 없이 도움이 필요한' 이의 것까지 버는 것이
마땅한 의무라는 명제!
그러니
그것은 네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라는 우주의 대법(大法).
내가 너를 건강하고 능력있고 성실하게 지켜주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냐는 우주의 호통.
제 아무리 늘여도 더 늘어나는 것이 너의 잠재력이며
제 아무리 나눠도 호주머니에서 흐르는 일없는 것이 현자의 주머니인데
부른 배 두드릴 시간에 너를 더 키워 가진 것을 더 불려 나누라는 우주의 명령.
귀하게 쓰려고 내 너를 간택해 고통으로서 정신과 신체의 강건함을 도모했다는 우주의 생색.
그러니 잘 지켜라, 함부로 쓰지 마라, 계속 불려나가라, 네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는 우주의 일침.
아뿔싸.
50%를 떼어내보니 이런.
너무 내가 가난해진다.
그래서!!
내 능력의 50%를 더 끌어다 써야 하는구나.로 사고가 이어지고
에너지가 바닥나더라도 50%는 더 벌어놔야 하는구나.로 능력이 키워지고
내 지갑에 있더라도 50%는 남의 돈이구나.로 씀씀이도 반으로 줄여지고
기존에 내가 머물렀던 기준을 2배로 높여야 하는구나. 싶어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고
이리 산다면 잉여가 늘어나는 것이니 나는 점점 더 부자가 되겠구나. 싶어 나를 즐기게 되고
남의 돈을 맡고 있는 나는 왠지 든든한 신의 은행창구가 된 듯하여 뿌듯하고
캬~~~
나는 신의 곳간을 담당하는
도둑이 아니라면 이 돈(정량적 화폐외의 모든 정신과 물질적 가치 포함)은 손대면 안되니까
매사에 깨끗이, 소중히!!!
함부로 나를, 나의 것을 취급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또 있다!
혹시 모를 정신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책으로 틈을 막고
혹시 모를 건강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운동을 하고
혹시 모를 정서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감정을 지배하고
혹시 모를 영혼의 도둑이라도 내게 침투할까 싶어 자연에 따르고
이 모두를 뭉개버릴 엄청난 힘의 악마가 내게 올지 몰라 기도를 한다.
이 무슨 해괴망칙한 발상인가?(헛웃음)
괴상하고 요상하고 이상하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일상의 지도에 이상지점이 포착된 것은 아니다!
결국, 나는 책을 읽고 건강을 챙기고 감정을 다스리고 영혼을 맑게 하는 단순한 일상을 지금처럼 유지시키면 그만이다! 이런 내가 되지 않으면 나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물질에 정신과 마음을 뺏겨버릴 충분한 자질을 지닌 못난 인간이니까.
신의 은행창구에서 커다랗게 몸집을 불릴 나의 돈들이여
신의 은행창구에서 자신이 가야할 곳을 향해 준비중인 나의 돈들이여
신의 은행창구에서 나를 믿고 귀하게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는 나의 돈들이여
내 너희들을 위해 더 능력을 키워 안전하게 지켜주리다.
아파서 창구를 비우는 날도 없을 것이고
힘이 약해 누군가에게 키를 뺏기는 일도 없을 것이며
정신없어 키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는 수년간 '보여진' 사실로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작정한 날로부터 처음에 우왕좌왕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아파서, 게을러서, 꾀나서, 잊어서, 정신없어서 새벽독서를 안한 적은 없으니까.
이렇게만 계속 해주는 것으로 이 창구가 지켜진다는 것도 아니까.
나는 이 창구에 모셔진 남의 50%가 제 갈길을 찾아 떠나는 그 날까지는 새벽독서를 계속 할거니까.
아.... 가볍다. 마음이....
내가 잘 쓰이는 듯하여
내 쓰일 곳에 잘 서있는 듯하여
여기 이 곳에서 지켜내고 지켜지는 삶으로서 내 걸음에 가치가 보태지는 듯하여
이런 못난 나를 닮으려는 누군가도 자신의 능력을 더 키워내는 것이 보이는 듯하여
이런 삶이라면 어찌 불행이 나를 가로막을 것이며 어찌 감사가 자리를 비울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성장과 선'의 연결과 연쇄와 연계에
나는 지독하게 행복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행복한 감정보다 천만배 더 감.사.해.야.마.땅.하.다!
내가 배운 모든 것을 누구에게라도 정성껏 나누는 것
내가 얻고자 하는 반을 줄이고 쓰고자 하는 배를 쓰는 것
나의 50%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모르고 한 짓인데 내 삶이 이리 가고 있다..... 신기하게도....
주1> 도덕감정론, 애덤스미스, 2009, 비봉
주2> 그리스철학자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2008, 동서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