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4. 나를 규정하다
지금까지
까지의 집필을 마무리지었고 오늘부터는
가 시작된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이자 이유이며 나아가 진정한 이타다.
나는 이렇게 나만의 사상을 정립중이다.
이를 위해 나를 들여다보며 해체했고 해체하며 알게된 정신과 감정, 감각과 영혼에 대해 나열했고 그렇게 내 삶의 맥으로 정립한 15개의 명제를 기록했다. 이제는 이 명제들을 이끌어줄 거대한 시선, 관점으로서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15가지로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이 글은 이미 네이버프리미엄콘텐츠에서 유료로 판매되는 글이지만 브런치에 공개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 첫번째,
나는 이기적이려 한다.
나는 점점 더, 앞으로도 어느 기간까지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려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이리 말하고 얼마나 많은 욕을 먹을까 예상되지만 개의치 않겠다.
나는 무조건 어떤 기간까지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로 했으니.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내 삶에,
그리고 나아가 모든 것에 이로운지
또한, 왜 이기적으로 살아야만 하는지
논리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타당하게 나를 드러내 보겠다.
글자 그대로 '나에게 이로운'
나에게 이로운 것을 먼저 행하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우주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 분명 나는 눈에 띄지도 않는 보잘것없는 행성에 불과하지만 행성의 시선으로 우주를 바라보면 행성없이 우주는 존재의미가 없다. 개인과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미물부터 인간까지 모든 생명체의 개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회는, 세상은, 우주는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개체없이 전체는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이 제대로 먹고 살며 행복감을 느낄 때 사회도, 세상도, 우주도 충만해진다. 이는 명확한 사실이다. 지금의 여러 사태들, 전쟁, 지진, 그리고 경제위기, 중산층붕괴, 자살률극대화. 이 모든 현실에서 우리는 '개인'이라 불리는 한사람한사람의 행복이 결코 보장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다. 개인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인생이 그렇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일상이 되고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된다.
사소한 행동이 모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모여 운명이 된다.
사소한 말이 인격이 되고 인격의 수준이 주변을 변화시켜 사회의 격이 된다.
사소한 내가 바로 서면 내 옆이 나를 닮고 그 옆이 그를 닮아 모두가 바로 서게 된다.
사소한 것이 쌓여 전체가 된다.
내가 이기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나를 모른 채 세상을 안다한들 과연 아는 것일까?
내가 나를 모른 채 지식이 많다한들 과연 제대로 쓸 수나 있을까?
내가 나를 모른 채 남을 안다한들 과연 이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알아야 하는 유일한 하나가 있다면 바로 나 자신뿐이다.
내가 나를 알아야 나의 쓰임을 안다.
내가 나를 알아야 나의 수준을 알며
내가 나를 알아야 나의 방향을 정하고
내가 나를 알아야 나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모든 생명체가, 나부터 그렇게 나를 알고 내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사회는 개개인의 다양성이 모인 조화를 원한다.
다양이란 독창이 모였을 때 가능하다.
사회가 일률적이고 경직되면 독창성은 자연스레 소멸될 위기에 봉착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앎으로 자신의 격을 높이고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의 재주를 부리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다양성을 확보한다. 결코 한사람한사람의 독창적인 삶을 배제하고서는 다양해질 수 없다. 사회는 한사람한사람의 욕구에 의해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지며 성숙해진다. 모두가 같은 길을, 같은 모습으로, 같은 보폭으로. 같은 색으로 걷는다면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포기해야 하고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경직될 수밖에 없기에 존속의 힘을 잃는다.
이런 이유로
이기적으로 산다는 것은 상당히 효율적인 사회를 위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에서 멀어져야 하는 개인의 용기와 희생을 담보한다. 옆집 누군가처럼 살려는 문화가 팽배한 지금, 비슷비슷한 뽐내기로 바쁜 젊은 친구들을 볼 때면 자기자신을 배제시킨 채 숨죽이고 남들 닮으려 애쓰는 모습에 때론 안타깝기도 하다.
왜 저들은 이기적이지 않을까?
왜 자신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왜 자신의 재능을 이기적으로 뽐내지 못하고 남의 재능만 탐내는 것일까?
왜 자신의 삶을 이기적으로 꽉꽉 채우려 하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일까?
왜 보여지는 삶에 탐닉하며 왜 남과 같이 치장하며 자기를 감추는데에 소비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꼰대여서일까?
보수적이라서일까?
세상을 몰라서일까?
이런 이유로
내게 부여된 나만의 삶이 분명 존재할 것인데
내가 외면한다면 누가 내 삶을 대신 살아준단 말인가?
내가 외면하는데 누가 들여다봐 줄 것이란 말인가?
나는 내 삶을 들여다보는 것에 남은 인생을 쏟을 것이다.
내가 집요하게 내 삶을 찾고 들여다보고 매만지고 갈고 닦으며
내 삶을 일정한 수준의, 격있는 삶으로 성장시켜 놓을 것이다.
나를 성장시키는 것,
그렇게 내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위해
이런 이유로
이기야말로 이타로 가는 가장 기본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서야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어야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으며
내가 알고 있어야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다.
내가 먼저 가 봐야 누군가에게 디딤돌을 놔줄 수 있다.
내가 나를 가치있게 여겨야 생명의 가치를 믿게 할 수 있다.
내가 나로서 살아봐야 그리 사는 것이 얼마나 사회의 균형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논리를 말할 수 있다.
이기는 충분히 가치있는 선택이다. 매일 새벽마다 만났던 책속의 성현들은 내가 이기적으로 나의 삶을 먼저 세워놔야만 이타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음을 알게 했다. 책을 읽으며 나의 사고가 점점 진화되어 얻게 된 결과다.
내가 경외해 마지않는 철학자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이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갖지 마라(중략) 누가 사기꾼인지 찾아내려 두리번거리지 마라. 자기자신만 똑바로 걸으면 된다.'고,
헨리데이빗 소로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한사람 한사람의 욕구를 위해서다. 따라서, 세계의 주민은 개인이다.'라고,
랄프왈도 에머슨은
'한 사람의 사적인 생활은 역사상 어떤 왕국보다 더욱 광채있는 왕국이 되고' /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진정한 위치를-모든 올바른 교육이 인간을 거기에 놓는 경향이 있는 자연의 진정한 위치를,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 즉 인간과 자연과의 결합의 목적인 자리(自利)라고 지시하고자 할 뿐'이라고,
키케로는
'자신이 먼저 선한 인간이 되고, 그런 다음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 '사람은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애담스미스는
'자기(自起)'를 강조하며 '조물주가 인간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존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정력(精力)을 불러 일으키고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인간이 실제로 그 목적들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의 행위에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또한 그 행위에 무조건 박수갈채를 보낼 수 없다.'고,
몽테뉴는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의 일을 자기 일로 혼동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가꾸며, 쓸데없는 일이나 생각을 제안받기를 거절'하라고,
사우엘 스마일즈는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할 건강한 이념은 '자조(自助, 스스로 자신을 돕는)'여야 한다.(중략) 자조가 영웅보다 강한 것'이라고,
벤자민프랭클린은
'부모나 젊은이들이 삶의 합리적인 진로를 평가하고 준비할 다른 정당한 수단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힘'이라고,
장자크루소는
'원숭이나 늑대가 동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할 이유가 무엇일지는 이해할 수 없다(중략) 자연상태란 우리의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니체는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감동이나 행위보다 인간을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라고.
키에르케르고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면서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중심이 되며, 또 전 세계는 오직 그를 중심으로 삼게 된다.(중략) 각 사람은 또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힘에 의하여 언제나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겸손하게, 그러나 자부심을 가지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라고 하면서 절망감에 대한 부분에서는 '자아를 소유하는 것, 자아로 있는 일이 인간에게 중진 최대의 인용(현실적이고 무한한 승인)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영원성의 요구이기도 하다' 라고 했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야고보서 2장)라며 나를 가르쳤다.
내 지성의 길이 협소하여 이들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나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일단 따라보려 한다.
이로써,
이기적이라 함은
애덤스미스의 자기(自起)이며
랄프왈도에머슨의 자시(自視)이며
사무엘스마일즈의 자조(自助)이며
장자크루소의 자기보존인 것이다.
내가 내 기회를 보지 못한다면 어찌 남에게 기회라 일러줄 수 있을까.
내가 내 시간을 쓰지 못한다면 어찌 남에게 시간을 거론할 수 있을까.
내가 내 욕구를 하찮게 여긴다면 어찌 남의 욕구에 손보탤 수 있을까.
내가 내 육신을 소홀히 취급한다면 어찌 남의 육신을 아름답다할 수 있을까.
내가 내 감정을 무시한다면 어찌 누군가를 연민하며 공감해줄 수 있을까.
내가 내 정신을 어지럽힌다면 어찌 남의 정신과 조우할 수 있을까.
내가 내 행복의 정체를 모른다면 어찌 남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
내가 내 운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어찌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내가 내 자유를 방종한다면 어찌 남의 자유에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내가 내 한계앞에 무릎꿇으면 어찌 남에게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말할까.
육체가 건강한데 정신에 굴복하고
정신이 건강한데 마음이 공허하고
마음이 건강한데 경제에 허덕이고
경제가 건강한데 나눔에 인색하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인생을, 삶을, 자유를 보고 배울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보여주며 가르칠 것이란 말인가?
개인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전염되게 되어 있다.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보여지게 되어 있다.
교육의 진정한 본뜻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자기 삶이 먼저 정리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서 보고 배우며 자신의 인간됨됨이를 재건해갈 수 있을까?
나에게로 시선두지 않아 나도 모르게 흘려버린 나의 인간됨됨이들을 과연 어디서 찾아 메울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내 것이 어디서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면 어찌 남의 인격을 탓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의 자식들을, 내 주변의 사람들이 흘리고 다니는 인격을 챙겨줄 수 있단 말인가?
건강한데도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삶이라면 과연 이것을 자연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는 말을 거부한다.
콩 한쪽도 나눠먹을 지경이라면 나는 우선 나부터 벌할 것이다. 어찌 이 지경까지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냐고! 그리고 나는 낼름 콩한쪽을 다 먹어버리고선 힘내서 다른 콩을 구해 상대를 먹일 것이다. 그렇게 반쪽씩 먹고 둘 다 배곯느니 욕먹으며 혼자 낼름 먹고 둘 다 배부르기를 택할 것이다.
일정 기간, 아니 영원히 나는 이기적이어야 할 것이다.
비틀거렸던, 무지했던, 미숙했던, 얕고 가벼웠던 나에게 집중하여 나를 단단하게 먼저 세워야만 한다. 그것이 결국, 남은 생을 이타로 마감할 수 있는 충분한 자양분이 될 것을 믿기에 나는 보여지기 위한 자선보다 성현현(聖賢)들의 가르침대로 충분히 자시하고 자조하여 자리할 수 있는 내가 먼저 되어볼 것이다.
이리하여
누군가가 나를 보며
작아지는 자신을 크게 세울 수 있다면 나의 이기는 곧 이타로 승화되는 것이다.
나는 이리
*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박문재역, 2018, 현대지성
* 헨리데이빗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윤규상역, 1996, 도솔
* 랄프왈도에머슨, 에머슨수상록, 이창배역, 1984, 서문당
* 키케로, 키케로인생론, 김성숙역, 2009, 동서문화사
* 애담스미스, 도덕감정론, 박세일역, 2009, 비봉출판사
* 몽테뉴, 에쎄나는 무엇을 아는가, 손우성역, 2005, 동서문화사
* 새무얼스마일즈, 자조론, 공병호, 2006, 비즈니스북스
* 벤자민프랭클린, 프랭클린자서전, 이계영역, 2001, 김영사
* 장자크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주경복 고봉만역, 2003, 책세상
* 니체,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김미기역, 2001, 책세상
*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선집, 최혁순역, 1994,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