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5
이는
2사람의 인생을 혼자 살아내야 하는 의무일지도,
인생을 2번 사는 혜택일수도...
나의 새벽 독서는 2019년 2월 19일부터였다. 살면서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으나 40줄 끄트머리에, 책을 읽고도 이렇게 실천없는 무능한 인간이 나구나를 강렬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야 할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나 따져보면 없다. 나의 새벽독서는 그냥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일어날 수 있을까?’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망설임은 짧았다.
아주 짧았다.
그만큼 간절히 원하던 바가 컸나 보다.
이제 3주정도 뒤면 5년이 된다.
그간 한결같이 태양과 책과 노트와 글을 곁에 두고 새벽을 맞이했다. 어떤 날은 졸면서, 어떤 날은 불안감에 휩싸여 그렇게 어두컴컴한 시간에 나는 빛이 세상을 밝히기도 전 매일 외롭고 고독한 눈을 떴다. 아둔한 나를 현명하게 이끌려, 무지한 나에게 지식을 넣어주려, 나태한 나를 제대로 바삐 움직여보려 새벽시간을 부여잡았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매일 내게 빛을 선물하는 태양에게 너무 고마웠고 난 이 거대한 존재의 행차에 눈꼽만큼의 도움도 준 것이 없구나 싶어 마중이라도 나가기로 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그런 느낌이 날 사로잡은 그 날부터 살짝 해가 비치려 하면 테라스에 나가 하늘로 고개 쳐들고 나만의 인사를 건네왔다.
처음엔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였다가 뭘 해준 게 있다고 부탁하나 싶어
‘오늘도 잘 해내겠습니다.’ 다짐으로 바꿨다가 다짐이 무너질 때쯤엔
‘오늘도 그냥 흘러가 보겠습니다’ 변명도 각오도 아닌 너스레를 늘어놓다가
기분이 좀 업된 날에는
태양을 내게 보낼 채비를 서두르는 하늘에게도 안녕안녕!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 태양마중이라 나는 명명했다.
내게로 오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밝혀줄, 나의 하루를 빛으로 비춰줄 태양을 맞이하는 나만의 의식, '태양마중'을 시작했다. 뭐, 별 것 없는 잠깐의 인사가 다지만 그 시간, 주변엔 불켜진 집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마중나온 이가 거의 없는 것이니 태양은 분명 만인들 가운데 날 기억해줄 것같아 혼자 좋아라 한다. 초등학교때 왠지 숙제 잘하면 선생님이 내 이름을 한 번 더 기억해줄 것 같은, 그런 설레임같은?
그렇게 새벽 4시에서 3시였다가 다시 5시, 그러다가 또 어떤 날은 2시. 내 맘대로 새벽 시간을 늘였다 줄였다 기획하고 제작해오고 있다. 일단 분명한 것은 새벽이 좋다는 것이고, 이 시간만큼은 양보하기 싫다는 것이고 이 시간이 주는 선물만큼은 꼭 챙기고 싶은 욕심도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하루는 아주 길다.
1st 하루는 책읽고 글쓰고 코칭하는 게 주다. 사이 아점먹는 짧은 식사 시간이 있지만 남들 직장 다니며 오전부터 저녁까지 쓰는 하루를 이 시간에 초집중하니 사실 어떤 때엔 에너지가 바닥일 때도 있다. 그래도 거의 평균적으로 나의 1st하루의 에너지레벨은 상당히 높고 상당한 초집중이 가능하고 상당히 효율적이라 상당히 만족스러운 하루로 마감한다.
그렇게 최고조의 만족감으로 시계를 볼 때! 그 때 기분은 최고다!
겨우 낮 12시!!
이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루를 다 살았는데 겨우 낮 12시!!!.
하루에 해야 할 중요한 것들을 다 해치워버린 후련함과 성취감과 만족감과 뭔가 내가 성장한 듯한 야릇한 느낌까지!!! 내 정신이 어제 거기였는데 지금 여기까지 오른듯한 뿌듯함.. 아주아주 끝내준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라 부른다.
위대한 정오와 태양마중.
매일 주어지는 거대한 2개의 의식.
태양마중으로 나의 1st하루의 포문이 열리고
위대한 정오로 나의 2nd하루의 대문(大門)이 열린다.
꽤 긴시간 이 2nd 하루를 어찌 보내야할 지 사실 난감하기도 했었다. 난 특별히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얘들이 어린 것도,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놀러 다니는 것도, 누구를 만나는 것도, 수다 떠는 것도, 어디 가고 싶은 곳도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자유롭게 내가 좋아하는, 좋아할 것 같은, 좋아하면 유익해질 것들에 시간을 보냈었는데
1년 7개월 전 브런치글을 시작하며, 또 6개월만에 독자가 1천명이 넘어서며 2nd 하루는 모조리 글쓰기에 투입되고 있다.
이 때는 자리를 옮긴다. 같은 공간에서 2번째 하루를 시작하려는 배려없는 내게 바짝 약이 올랐는지 감정은 늘어지고 몸은 자기를 땅에 붙이려 내 근육들에 땡깡부리며 난동을 피워대니 이 몸뚱아리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맞춰주기 위한 배려다.
걸으며 다리 운동도 해야 하고 눈에 다른 곳도 보여 줘야 하고 무엇보다 귀로도 다소 소음이 있는 카페로 자리를 이동한 후 6시경까지, 그렇게 4시간가량 주구장창 글에 매달린다.
점심먹고
조금은 짧은 2nd 하루지만 초집중으로 내 맘에 쏙 들게 보낸 날은 아.. 이런 기분을 '하늘로 날아갈듯'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금방 앉았는데 금방 6시가 된다. 정말 무언가가 날 쑥 들어 그 시간에 앉혀둔 느낌이다!
이 기분의 여운을 어떻게든 아껴서 남은 저녁시간은 아줌마로 산다. 밥하고 치우고 빨래개키고 이방저방 정리하고 뭐, 그냥 그렇게... 그러다 맘 내키는대로 OTT도 보고... 그래서 왠만한 인기 드라마는 모두 섭렵하는 중이기도 하고.
시간을 쪼개어 살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어느 날 문득 하루를 두 동강 내어 2번 살고 있구나를 감지한 날부터 나는 시간의 즙까지 짜내는 느낌의 매력에 푹 빠졌다! 진짜 매력적이다, 이 느낌!
특히, 잠자리에 들면서 느껴지는
캬!! 기가 막히다.
표현할 언어가 없다.
앗싸라비아다!!
새벽에 읽은 책의 의미를 가슴으로 이해하려 자음모음을 다 흩어서 후벼파고
그 영감으로 노특북에 손가락을 얹지만
어떤 어휘를 써야 할지 몰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쩔쩔매며 내 사유의 바닥을 기어 다니고
더 쓰고 싶은데 밥할 시간이 가까워오면 1초가 아까워 방광이 요란을 떨어도 다리를 떨며 자리를 지키고야 마는...
시간과 정성과 정신과 지식과 감정과 신체의
모든 즙을 짜내며
24시간을 써내는 일상은
삶의 모든 틈새라도 찾아서 내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의지같기도,
사유의 길에 우스운, 엉뚱한 돌덩이라도 발견하면 해치워야만 하는 도리같기도,
활용하지 못하고 소모되는 시간은 1각이라도 허용하면 안되겠다는 의무같기도.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의 뚜껑을 열었을 때 없어야 할(or 없애고 싶은) 것들을 발견한 놀라움때문이기도.
하루를 2번 사니 못해낼 일이 없을 것이라는 당찬 자신감같기도,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직도 날 봐주지 않느냐는 호기(豪氣)로운 기세같기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판 뜨자 덤벼드는 내면적 자아의 패기같기도.
여하튼,
은 내가 아주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듯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천만에다.
난 아주아주 단순하고 아주아주 여유롭다.
일정부분의 구속을 강제함으로써 하루 전체가 자유인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낀다.
자유로우니까 내 일상의 어떤 부분이든 구속할 수 있는 자유!
당연한 이치 아닌가?.
나를 구속할 자유,
자유가 구속보다 훨~씬 크기에
자발적인 구속과 고립은 나의 더 큰 자유를 위한 보증수표같은 것이다.
음..
그러니까,
이러한 초자유의 하루 안에서 나는
오로지 ‘해야 할’ 일과로 무장되니 ‘하지 않아야’, 또는 ‘할 필요없는’ 방해거리들이 저절로 물러남을 경험하고
오로지 책과 글에 내 모든 자원을 투자하니 ‘남’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는 치밀함을 경험하고
오로지 외부가 아닌, 내부로 시선을 모으니 나의 자아는 위대해지려, 커지려, 확장되려 용처럼 나를 휘감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 경험으로 나는
나를 희망고문으로 설득하는 현실적 자아가
희망과 기대보다 결과됨을 믿으라 외쳐대는 내면적 자아에게 참패했음을,
나의 능력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진단하는 현실적 자아가
능력보다 더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겠노라는 내면의 더 위대한 자아에게 또 참패했음을,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 강렬하게 꼬득이는 현실적 자아가
‘하고 싶은 것’이 곧 ‘해야 할 것’이 되게끔 묘수를 둔 내면적 자아에게 완벽히 참패했음을,
계획하고 예측하려 애쓰는 현실적 자아가
그저 흐름에 따르라. 그저 명을 받들라, 그저 결과를 믿고 걸으라 등을 토닥여주는
내면적 자아에게 항복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자유다.
구속된 줄 알았는데 그 어떤 것에도 난 구속되어 있지 않음을, 설사 제약, 제한, 한계를 느끼더라도 이는 구속이 아니라 조금 뻑뻑한 다음 문을 열기 위해 힘이 좀 필요한, 그저 처리, 절차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나는 완벽한 ‘나’로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음을 느낀다.
김우창 교수의 표현대로 ‘자유로운 삶이란. 원인과 결과, 동기와 행위, 그리고 의무와 수행이 강제적 연쇄관계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영향과 선택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삶(주1)'.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이쯤에서 느껴지는 자기희열은 나의 하루를, 그리고 내 인생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성으로 둘러싸버린 듯한데... 내친 김에 나의 자유가 어디까지 도달해 있는지 살짝 언급하고 싶다...
나는 나의 죽음 뒤의 삶에까지 원하는 것들을 열거해 두었다. 시간을 초월하여 초자유를 느끼기 시작한 초기였을 것이다. 보는 이들은 '왜 그렇게 너한테 박하게 구느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느냐?' '좀 편하게 살아라.' 말할 때마다 '난 지금 너무 자유로운데...'를 어찌 말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아무런 대답도 못했던 당시... 나의 정신세계는 이미 초자유의 세계 속을 거닐며 그 어떤 것들도 나의 선택에 의해서지, 구속이라 느끼지 못하던 시점이었다.
나는 나중에 내 생을 다하고 다음 생으로 이동하면 내 삶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준 이들을 모두 만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 꿈꾸기 시작했다.
정말 나는 다음 생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선명해졌고 '신이 허공에서 날 떨어뜨리듯이(주2)' 그 선명한 공간으로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에 배심원으로 참여해 보기도 하고
케인즈와 러셀, 버지니아 울프가 토론하는 그 현장에 진땀 흘리며 앉아있어도 보고
네로 앞에서 세네카를 대신해 항변하기도 하고
코스톨로니나 벤자민 그레이엄에게 투자의 비법을 알려달라 조르기도 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를 직접 그의 묘사로 들어도 보고
에머슨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그와 대화하며 노트도 하고
스웨덴보리를 만나 당신의 천재성을 직접 보고 싶었다고 베짱부리기도 하고
궁수의 모습을 그리는 파올로코엘뇨를 옆에서 지켜도 보고
사아디의 우화 속 그 맨발을 직접 만져도 보고
나폴레온 힐의 연설장에 내가 청중으로 자리하기도 하고
마르쿠스아우렐레우스가 그 전쟁통에 도대체 명상록을 어떻게 집필했는지 옆에 따라다녀도 보고
루크레티우스를 찾아 떠난 포조의 손을 힘차게 잡아주며 응원도 해주고
그렇게 거닐고 싶은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그와 함께 거닐어도 보고
귀곡자를 만나 직접 그의 처세술을 전수받기도 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단순한 일상으로 나를 무장시키니
이렇게 초자유의 상상을 하며 하루 종일 히죽거리기 일쑤다.
사실 하루를 2번 산다는 이 기준은
단지 시간을 양적으로 구분지은 것 뿐이다.
시간의 질적인 측면으로 가늠하면
하루를 1주일처럼 산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간의 질적인 측면으로 가늠하면
과거부터 먼 미래까지 하루에도 수십번 드나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나는 상당히 집중을 잘하는 편이다. 걸음도 빠르고 먹는 것도 빠르고 손도 빠른 편이라 요리할 때도 남들이 몇 시간 걸릴 것들을 금새 해치운다. 아주 효율성이 높은 두뇌와 신체를 가졌다. 이는 정말 나의 특별한 장점이다. 이런 이유로 해내는 양만을 따지만 하루를 2번이 아닌, 그 이상으로 사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감히 과신해본다.
또한, 빠른 신체만큼
나는 포기도 빠르다.
싶은 순간 그냥 포기해 버린다.
안 가고 말고 안 보고 말고 안 하고 만다.
그렇게 포기한 그 자리에 해야 할 것을 탁 집어넣어 집중해서 해치우기에 낭비나 소모되는 시간이 별로 없는 편이다. 두 세벌의 옷을 번갈아 입고 매일 같은 신발을 신고 화장은 안 하니까 여자라서 더 시간을 요하는 면도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실웃음이 터지는 이유는 ‘이렇게 단순하게 산단 말이야?’ 하며 내 일상이 또 보였기 때문이겠지.
‘단순이 반복되는 일상’이 ‘자유’로운 모순의 경험을 통해 나는
위로가 아닌 명제로서 이를 증명하는 중이다.
쇼펜하우어(주3)와 소로우(주4)가 알려준
‘인생의 최종손익계산’을 해본 결과 거대한 이득을 남긴다는 것을,
시간은 촘촘하게 쪼개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내가 알아서 활용해야 할 자원이라는 것을.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중심으로 그것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 정리된다는 것을.
바보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풀지만 천재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푼다는 사실을.
이것저것 다 해내는 멀티가 아니라 하나에 집중하면 모든 것들이 물같이 흐른다는 원리를.
나에게로 오고 가는 사람, 사물, 감정, 사태.. 모든 것들에 나를 기꺼이 내어주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이로운 효율이라는 것을.
모든 것을 다 떨군 채 그저 가야 할 길로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라 위대한 정신의 물질화를 위한 지름길이라는 것을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증명해가는 중이다!
현재로선 새벽 시간이 제아무리 좋아도 더 늘일 수는 없다. 간혹 너무 늦게 잠이 든 날은 새벽 4시 기상이 어려워 5시 가까이에서 눈을 뜨기도 하니 더 늘일 수 없다면 더 아껴야 할 것이다.
시간의 양도 더 촘촘히 아껴쓰고
흘러가는 시간의 탁도도 더 맑게 활용하고
새벽이 주는 영감도 더 강하게 느끼고
새벽이 뿜어내는 기운도 더 많이 내게로 담고.
그렇게 내게로 준 자연의 풍성한 기운을 담아내도록 나는 늘 깨어 있어야겠다.
매일 태양마중으로 1st하루를 시작하고
위대한 정오에 당당하여
2nd 하루에게 바통터치를 잘해서!
잠들기 직전 ‘하루를 착즙한 쾌락’을 매일 느낄 수 있도록,
이 단순하고 충만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름길을 달리며 목표지점에 닿을 수 있는 현실을 더 앞당길 수 있도록,
그렇게 나 죽은 뒤 꿈까지 모두 증명해낼 수 있도록
나는 늘 깨어 있으련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
나는 알게 되겠지.
이렇게 하루를 2번 사는 것의 의미가
주1>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김우창, 2014, 김영사
주2> 행복의 건축, 알랭드보통, 정영목역, 2007, 이레
주3> 쇼펜하우어인생론, 쇼펜하우어, 2010, 박현석역, 나래북
주4> 소로우의일기, 헨리데이빗소로우, 2003, 윤규상역, 도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