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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27. 2024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4


(利己論)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가 나고 CH2. 나를 해체해보니가 시작됐습니다.

오늘은 CH2의 4편입니다. 따라서, 지난 글들에 이어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 지담드림


나를 해체해보니

우선, 나에게는 참으로 고쳐지지 않고, 앞으로 고칠 수 있을까 싶은, 고질적인 병이 있었다. 새벽에 불안감으로 눈을 뜬다는 것이다. 아니, 눈을 뜨면 불안감이 밀려오는건가? 


순서야 어떻든 불안이 무의식속에 아주 단단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불안은 걱정을, 걱정은 어떻게든 내가 걱정에 벌벌 떨도록 날 못살게 굴어야 하는데 내가 잠을 자며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이 영 못마땅한 듯 '너 불안하잖아! 얼른 네 불안 살펴야지!' 하며 나를 계속 깨워대는 것이다.       


새벽독서를 시작하고 ‘불안’이라는 정체가 나의 무의식에 있음을 인정했고 나의 또 다른 자아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이를 외면케하려 애쓰고 있다. 최근엔 이 고질병이 많이 고쳐진 것을 느끼는데 이는 분명히 불안이 사라졌다거나 불안의 강도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훈련, 불안을 외면하는, 불안감이 느껴질 때 대응하는 능력이 키워진 결과임을 알았다. 첨언하자면, 이는 꽤 잘 한 짓이다. 훈련의 효과는 좋다.  

   

불안, 두려움과 같은 부정정서가 나의 무의식에 왜 깊이 자리를 잡았을까. 

완벽해질 수 없으면서, 그것을 알면서, '못하거나 밉거나 부족하지 않은 모습으로 세상에 보이도록' 나를 채근하고 닦달하는... 어리석은 내가 가여운 나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저 나 자체로도 괜찮은데 나는 타인과 비교하면서 계속 나의 못남에 집중하여 오히려 더 못나지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무조건 관심두는 곳이 커진다. 

집중하는 곳이 커진다. 


밉지 않으려 애쓰면 더 미워지고 불안을 떨치려 집중하면 불안이 내 관심을 양분삼아 더 커진다. 그렇게 불안은 자기가 좋은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나를 자신과 더 밀착시키고 오히려 나를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정도로 강력하게 나에게 들러붙어 버리는 것이다. 외로움도 그랬었다. 외롭지 않으려 친구를 만나면 더 외로웠지만 고독이 친구가 된 지금 오히려 거의 외롭지 않다. 과거엔 고약했던 외로움이 자발적고립을 선택한 이후 오히려 충분히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활동을 격하게 줄인 탓에 이제는 드문드문이지만 간간히 강의 요청을 받는다. 며칠 전, ‘일찍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도 가졌고 또 작가까지 명품인생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십니다.’라며 강의를 꼭 해달라고 한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여전히 '보여지는 나'와 '내가 아는 나'의 갭으로 망설인다. 


'저.. 다음에..' 하지만, 상대의 이어지는 ‘남은 과제는 좋은 일들 선행 많이 하시면 될 듯 합니다’.라는 말에 ‘그럼요, 베풀어야 할 것들은 그리 해야죠... 어쩌면 그러라고 거죽부터 이리 만들었나 봅니다. 이제 속을 채워야 해서요...’. 갭을 채우지 못한 나는 또 세상으로 나가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렇게

나를 해체해보니

나는 '보여지는 나'와 '내가 아는 나'의 갭(gap)이 아주 차이가 큰 사람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았다. 

이 차이를 매번 느끼며 사는 것은 아주 불편하다. 

사실 나를 해체하려는 시도, 해체 후 들여다보는 탐구의 시작은 5년전 새벽독서를 결단하면서부터였고 새벽독서를 시작했지만 흔들리는 내가 23세의 데카르트를 만나면서부터 확실하게 근거를 잡고 나의 뿌리를 내리기에 타협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해체시키는, 나의 명명대로 '나를 임상실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나는 전에 받아들인 그릇된 의견을 모두 정신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고, 훗날 추리의 재료로 삼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규정된 방법을 더욱 확실히 사용할 수 있도록 그것을 계속 연습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다. (중략) 


갖고 있는 의견을 모두 검토하여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간주하고 있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가장 사려깊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주1).


나도 그랬다. 지금껏 배워 알고 있다 여긴 많은 지식들에도 여전히 삶은 난해했고 심지어 내가 나도 모르고 있다는 본능적 좌절감에 나의 모든 앎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간주해버린 채 책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가 '사려깊은 사람들'이라는 대상이 내겐 책이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나는 나와 남이 아닌, 성현들이 글로 알려준 것에는 무조건적인 순종을 한다. 내 판단은 거의 의미와 가치가 없다. 


내가 한 가장 가치있는 

유일한 판단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판단

뿐이다. 


나는 데카르트에게서 지식과 인식, 인지, 이성, 지성의 개념을, 그리고 논리에 대한 이해를 배웠고 23살의 데카르트가 위와 같은 생각에 이른 자신에게 9년간 '체험적 지식'으로의 앎을 쌓는 기간을 거쳤던 것처럼 나의 매일 이어지는 새벽독서가 '사려깊은 사람을 따르는' 행위로서 타당하게 여겨지면서 상대적으로 가볍게, 그리고 더욱 가치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자발적 단절과 의도적 고립을 선택한 나. 

5년여를 보내며 지금 이 글, '이기론(利己論)'을 쓰고 있다. 나는 아직 쓸 수 있는 감량이 안된다며 스스로에게 자격을 주지 않았던 긴 시간들...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정작 알아야 할 것들에는 오류가 많거나 무지했다. 그렇게 나의 감각과 감정, 정신을 모두 해체하고 들여다보는 과정을 리얼하게 작성하기 위해 엄청나게 나를 끌어올려 쓰는 글이 '이기론(利己論)'이다.


약간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이러한 해체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니 '보여지는 나'와 '내가 아는 나'의 갭은 상당했고 보여지는 나로 세상을 사는 수많은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사는 내가 비겁하고 가엽게 느껴졌기에 나는 나의 내면을 채우는 것에 매일 일정시간을 투자, 언제까지일지는 모르나 이제 됐다.. 싶은 느낌이 올 때까지 말 그대로 거죽과 내면이 별 차이가 없는 나로 나를 만들어야 한다.


사실, ‘내가 아는 작은 나’를 ‘세상이 바라보는 나’까지 끌어올려 나를 키우는 정신의 에너지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내 정신이 거기까지 끌어 올려지지 않는 날에는 

정신의 거죽인 인상은 죽상이 되고

정신의 충복인 감정은 짜증이 되고

정신의 흔적인 정서는 좌절이 되고

심지어

정신의 교류인 관계는 오해를 생산하곤 했다.


사실 이러한 인과에 아주 익숙해진 상태다. 

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기제가 내 안에서 몸집을 불리면

그 에너지로 인해

비슷한 정서를 유발할 상황을 더 끌어들인다는 인과말이다. 


이쪽과 저쪽의 커다란 GAP은 불안으로 채워진다


불안은 

회피나 위선과 손잡고 

부인(否認)과 투사를 조장,

내 안에서 빠르게 증식하며

또 다른 불안유발 현상을 내 인생에 등장시켜

더 나를 불안에 잠식시키고 

이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불안과 형제격인 동료감정들이 서로 압축하여 강력한 힘을 만들면

어느 순간 짜증은 화로, 화는 분노로 분출,  

잘 자리잡고 있던 이성이 타격받는 순간

예상대로 이성이 감정에 항복할 즈음에는 

일은 이미 그르쳐져 있다. 

오해와 갈등, 분노가 일의 앞에 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일이 그르쳐진 것은

일이라는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불안과 같은 무의식의 기제가

바깥세상, 즉 현상이라는 신호에 그간 응축시켰던 압력을 폭발시킨 반응의 결과다. 


무의식의 기제는 반드시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내면에서 몸집을 키운다. 우주는, 세상은 무의식과 교신하는 것이지 행동이나 표현, 일과 교신하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 진동, 즉 파동의 강도로 교신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이성은 응축 후 폭발하는 감정을 버거워한다. 

이렇게 무의식에 응축된 기제는 이성을 이기고 세상으로 분출되어 더 크게 몸집을 불려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내 안에서 자기힘을 키우고 나의 밖으로까지 자신을 드러낸 불안은 

결과적으로 나를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각없는 이성은 방황하고 

방황은 내면의 창조성을 외면하도록 나의 정신을 여기저기로 이끌며 

끝내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만들어 

염세주의자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비평과 비판 - 정작 비난수준이지만 - 으로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고

자신의 앎이 지성에 속한 앎인지 단순한 정보인지의 분간도 안되는 헛된 소리들을 뱉어내고

자기현실의 결과가 자기자각의 결과임을 뭉개버리기 위해 환경, 교육, 세상탓으로 능숙하게 혀를 굴려댄다.


그렇다고 불안이라는 부정정서가 나쁜 것이니 없애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불안과 같은 

부정정서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다루지 못하는

나의 운용술이 문제

인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서둘러

나를 멈춰 세워야 했다. 

두손두발 다 들고 감정에 항복해야만 했다. 

이 말은 

그냥 내버려둔다는 의미다. 

저항도, 반항도, 대항도 없이 그냥 그대로 내 안에 놓아둔다는 의미다. 


무언가에 품은 특별한 애착, 의존 버리고

어딘가에 숨겨둔 의지, 열정, 투지 외면하고

어떻게든 끄집어내려던 용기, 희망, 자신감에게도 기다리라 명하고 

그저 지금껏 알았다 여긴 '앎'에 대한 '의심'과 '거부'부터 시작했다.

어쩌면 초연해지겠다는 포부였을 수도 있다.     


불안이나 두려움, 짜증, 화, 불평, 불만족과 같은 정서들도 나에게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감정자체도 나에게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내 인생에 온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불편한 객(客)이 온 것을 알아차렸지만 어떻게 하려는 의도 갖지 말고 그냥 자기 할일 하게 내버려두고 갈길 가게 무관심하면 되었다. 


나는

감정에 초점두지 않고 

감정을 불러들이고 키우고 방출시키는 무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즉, 부정정서가 날 제압하려 해도

내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정신

이라는 사실을 의식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은 나에게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객이다. 


그런데 주인인 나의 정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다니러 온 손님 눈치만 슬슬 보며 안방까지 내어주려는 태세를 갖추고 나가라는 말도, 어지럽히지 말라는 말도, 알아서들 하라는 말도 못한 채 어디 불편한 건 없는지 계속 관심갖고 살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정의 객들은 나가기가 싫겠지. 편안하니 좀 더 있고 싶겠지. 좀 더 천천히 일을 마무리해도 되겠다 싶겠지. 내가 이 녀석들을 내 안에 더 오래 머물도록 그냥 나를 허락해버린 것이었다. 아무 관심도 주지 말았어야 했는 데 말이다. 정말 주인인 정신은 하던 것에나 집중하지 엄한 데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지경이 되니 마음이 급해졌다. ‘나의 내면이 작구나.’를 알게 되면서 내면이 작으면, 즉 그릇이 작으면 그 그릇 이상의 것을 담아내지 못하기에 지금껏 정말 열심히 쌓아 온 거죽과 거죽을 담은 통의 퀄리티에 언밸런스가 있다면 큰 쪽을 줄일 게 아니라 작거나 적은 쪽을 크게 키워야 한다는 것을. 


나의 부족한 내면을 성장시키는 기간이 무조건 필요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갭은 크게 보여지는 것을 줄이는 게 아니라 작은 나를 키우는 것에 집중하며 균형을 맞춰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휴전을 종식하고 나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감정, 그것을 인지하는 인식, 그것으로 힘을 얻는 손과 발, 그것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나의 긍정 정서. 이 모든 것들을 객의 눈치 보느라 외면했던 나는 이제 나를 만들어내는 주인들에게 두손두발 다 들어 항복하고 앞으로는 결코 주인을 객취급하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다. 

나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나는 나로써 살려는 자발성과 주체성, 그리고 그것들의 발현원인 창조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활동하고 운용하는 데에 결코 방해요소인 객에게 관심두거나 집중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나를 억압, 억제, 제압하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체로서의 나’를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는 의미이다.

나의 의식이 큰 소리로 정신에게 ‘너 또 불안에 관심갖니?’라고 외칠 때 스스로 불안에게 너희들 자리는 여기야. 그대로 놀다 가’라고 

그들을 견제, 방어, 외면하지 않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 그들이 내 삶에서 할 일하고 가도록 두손들고 항복하며 

안전하게 나, 나의 정신에게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지켜주겠다는 의미이다.     


나는 외부와 내면의 커다란 갭으로 인해 내면을 쌓을 때까지, 균형을 느낄 때까지, 자빠지고 넘어지고 다치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서게 될 때까지는 휴전이다! 했었는데 이제 휴전도 멈췄다. 휴전도 방어와 견제니까. 

그저 

항복! 항복! 항복!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을 그냥 수용, 인정!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 자체로서 혼란과 정리를 지나며 정화될 것이라 믿는. 

그러한 항복!!!


나를 해체해보니 

이렇게 나는 나의 곳곳에서 불균형을 억지로 균형인 척 꿰맞추며 삶을 이끈 것을 알았다. 

잘난 것은 잘났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못난 것은 못나니까 드러내지 못하고 

착한 것은 마음에 없지만 착하게 보이기 위해 그리 했고 

못된 것은 알면서도 일부러 용기내어 또는 생떼쓰며 그리 했다.  

    

이렇게

불균형에 아주 익숙한 몸체가 되어 있었던 나를 발견하고 나는 즉각 나를 해체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를 간파할 수 있는 의식이 열려 있었고 

의식의 덕으로 지금껏 아는 모든 지식을 버릴 수 있었고

나에게 간절하게 그러지 말라고 애써주는 영혼의 자극을 감지했었고 

이를 무조건 따르라 명령하는 이성이 충분히 정신의 질서 속에 기능하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사이를 정복한 불안을 발견했고

불안을 외면하는 휴전으로 불균형에 불붙은 기세를 일시적으로는 잠재웠지만 

이 역시 불안한 상황을 조장하는 격임을 깨닫고는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감각과 감정에게 아예 대놓고 항복해 버리니

오히려 '자체로서의 나'를 지켜주고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부의 덕이다. 

독서의 선물이다. 

의지의 소산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나를 해체했다. 그리고 미세한 틈새까지 발견하고 있다. 곳곳에서 출몰하는 엉킨 나를 하나씩 풀어가며 균형을 맞춰가는 중이다. 켜켜히 나의 무의식에 내재된 녀석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녀석인 불안 하나를 해체시키고 제거해내니 불안 뒤에 숨어 몸집을 불리던 다른 놈이 기어 나온다. 그 녀석을 잘 타일러 내보내니 이제는 곪아 문들어져 있던 놈도,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놈도, 짱박혀 기회만 엿보던 놈도 계속 나온다. 이런이런.. 끝났다 싶으면 또 나오고 해체시켰다 싶으면 다시 덩어리진 것의 해체를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속적으로 나의 영혼을 깨우고 의식의 세계에서 나를 운용해가는 시간의 손을 잡고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가 대기중인 그 곳으로 갈 것이다. 


훗날 지나온 시간의 뚜껑을 열었을 때...

내게서 흘렀던 고름과 농들이 빛으로, 보석으로 변화되어 담겨 있는 거룩한 순간이 존재함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게 항복을 선언한 것은 

내게 자유를 선물한 것이다.

겁보인 나에게 용감을, 

쫄보인 나에게 도전을 선물한 것이다.


‘신은 겁쟁이를 통해서는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다(주2)’는 에머슨의 훈계를 다시 꼭꼭 다져서 귀에 담고 가슴에 우겨 넣고 모든 세포가 이 말씀을 품도록 나는 나에게 다시 명한다.


나 자신에게 항복하라고.

그렇게 지난 시간들의 나를 파괴하며 등을 돌리라고.

그래야 내면의 것들이 자기 모양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것이 

'내가 아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진정한 균형, 

'앎'과 '삶'의 일체를 향하는 길이라고.

그러니,

항복하라고...


주1> 방법서설, 데카르트, 1997,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주2> 자기신뢰철학, 랄프왈도에머슨, 2010, 정광섭 역,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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