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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20. 2024

내가 바보지식인이면,
내 이성이 절름거리면 어쩌지?

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3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가 나고 CH2. 나를 해체해보니가 시작됐습니다.

오늘은 CH2의 3편입니다. 따라서, 지난 글들에 이어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 지담드림


매일 새벽독서를 철저하게 지키는 내가 요즘들어 책을 읽다 말고 나를 덮친 생각때문에 한참을 멍하게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한문장한문장이 내 세포속으로 녹아들어 나를 거쳐간 시간들과 연결되고 그 정체가 자꾸만 내 앞에 거울을 들이밀기 때문이겠지.


그러다 생각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는 순간 나는 나를 혼내버린다. 생각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아닌 녀석에게 침범당했기 때문이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현듯, 느닷없이, 나와 무관하게 나를 정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정신놓고, 넋을 잃고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생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닌 어떤 주체가 '나도 모르게' 나를 내 정신에서 분리시켜 자기가 원하는 곳에 나를 버려둔다. 의식하지 못한 채 내 정신을 찾아보니 온통 과거의 기억속을 헤집고 있다. 생각이 많을수록 걱정도, 불안도, 고민도 커지고 오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지경에 이르는 이유도 이렇게 생각이 나를 데려다 놓는 곳은 '과거''부정'이 지배우위에 있는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떠한 현상과 마주칠 때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은 정확한 사실(fact)과는 거리가 먼데도 말이다. 지나간 과거의 그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기억은 항상 부정확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몇이 모여도 그들의 말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기억은 과거와 지금이라는 유한한 시간속을 유영하면서 들러붙은(또는 갖다붙인) 다양한 요소들과 결합한 채 나의 내면에 자기만의 질서로 자리잡고 있다.

한마디로,

기억은

나의 '감정의 강도'에 의해

우선순위가 매겨진 채 줄맞춤되어 있는 것이다.      


잠깐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 싶어졌다.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이 질문에 당신은 스스로가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당신이 경험해 본(직접 먹어봤든, TV에서 봤든, 친구에게 들었든) 그것을 먹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가장' 자신의 오감을 자극한 그 메뉴겠지.      


'어디 가고 싶어?', '어떤 사람이 좋아?', '뭘 하고 싶어?' 와 같은 흔한 질문들을 다시 던져보겠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당신은 과거의 기억속에서 자신의 오감을 가장 자극시켰던(맛으로든 누구랑 함께여서든 어떻든 오감자극)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기억은 이렇게 감정에 의해 순서화된 것으로서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이번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조금 더 깊이 내면으로 시선을 이동시켜야 하는 질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과거 기억속에 '언제 내가 가장 행복했지?'라고 스스로를 과거로 옮겨 내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그 순간을 떠올릴 것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도 역시나 여기저기서 듣고 읽고 만나고 부러웠던 또는 닮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릴 것이다. 나의 지난 수십년의 시간들을 모두 담아두지 못하는 물리적 한계로 인해 남아있는 몇컷의 기억들 가운데 질문에 간택된 대답은 당시 나라는 사람의 오감에 가장 강한 자극을 남긴 몇 장면이다.


즉, 기억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부정확하며 과거지향적인, 편집된 사실이다.  

   

기억의 속성이 이러하니

기억에 근거한 나의 생각은 과거 부정적인, 감정적인, 그리고 사실과 착각의 혼합으로 이뤄진 것이라 정리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 정신과 분리되어 날 데려다 놓은 그 '과거'와 '부정'에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          


인간이 동물하고 비교되는 기본속성은 '이성적'이라는 것인데

생각의 속성을 들여다보니

'나는 이성적인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망설여진다.

아니, 망설여지는 것이 당연해야 한다.

'이성'이 없으면 인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성적'이라고 말하려니 꺼림직하다.           


'이성'이라는 방대한 담론에 대해

수천년전 철학자들부터 현대의 뇌과학자들까지 그 본질을 파고파고 또 파보지만

나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다.

이유는 이러하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어지는 경계를 '이성’이라 전제하는데 이성의 범주 안에 담긴 주요 대상인 인간이 어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림1> 범주 안의 것이 자체범주를 온전히 파악하는 것에는 오류를 지닐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의 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큰 시야로만 가능.

정말 못 그린 그림이지만 <그림1>처럼 하나의 커다란 원 안에 두 개의 구분된 원이 있다고 치자. 커다란 원의 시각에서 보지 않는 한 작은 원끼리 상대원을 파악하는 것도 오류투성이일뿐 아니라 범주속에 속해 있으면서 자체범주의 속성을 파악하는 것 역시 오류를 지닐 수 있다.


이는 마치, '소행성'이 '우주'를 파악하겠다고 덤비는 격이거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를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 밖으로 나와 전체를 보지 않는 한 바다를 온전히 파악했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더 큰 시야만이 시야안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기에 인간과 동물 모두를 함께 관조할 수 있는 큰원의 주인공만이 인간의 이성이 무엇인지 개념화할 자격이 있다.          


그렇다고 이성이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거나 이성에 대한 탐구를 무시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성이란 방대한 담론을 논하거나

'나는 이성적인가?'에 대한 의문에 있어 정확도나 완벽성을 바라거나 자만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그저 나를 '이성적 동물'이라는 틀에 가두고 '이성'을 탐하는 것에서 자족하려 한다.  

    

정의내리는 행위는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해내는 작업이다. A가 B나 C가 아니라 바로 A인 이유, 즉 A의 본질을 드러내어 그 본질 속에 A를 가두는 작업이다. 본질을 드러내어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언어행위, 그것이 바로 정의(definition)내리는 행위인 것이이다(주1).


이런 이유로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는 본질 속에 가둔 채 다른 것들과 구분된다는 전제를 지니고 나의 사고가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理性)은 다스릴 리 / 본바탕 성.

즉, '본성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글자대로라면 철저히 본능에 의존해 사는 동물이 더 이성적이라고 해도 이견이 없을 법한데 굳이 '이성'을 인간의 능력으로 배치시켰다면 우리 인간은 타고난 본능 외에 분명 진화가 가능하도록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방향으로의 본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로 훈련과 반복으로 각인되고 그것이 재구조화되고 새로운 형질로 재탄생되며 거기서부터 또 다시 훈련, 반복, 각인, 재구조화되는 회귀를 통해 진화를 이끄는 무언가가 굳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경계가 되었을 것이고 이것을 '이성'이라 이름 붙인다면, 조금은 엉뚱하고 무지하고 단순하지만 이성이 무엇인지, 나는 이성적인 인간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다.      


이 가늠은 아주 얇은 거미줄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태풍에도 끊어지지 않는 강력한 점성으로 사고의 맥이 되어줄 것이다. 거미의 가는 줄 하나가 사방으로 더 넓게 더 촘촘하게 그리고 심지어 입체적으로 줄을 뻗쳐 스스로 달려드는 나방들을 면적으로, 접착력으로 꼼짝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나의 사고의 확장도 탄탄하게 이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성적인가?'라는 탐구의 시작은 나의 사고에 외부로부터 투입 내지 흡수되는 진보적 지식들을 기존의 보수적 질서로 짜여진 거미줄에 착착 달라붙게 하고 나름의 촘촘하고 세밀한 신질서로 다시 배열시키는 확장가능한 강력한 궤를 만들어줄 중심맥이 될 것이다.     


앞서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니 심지어 할 필요도 없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생각은 마치 물고기에게 던진 미끼와 같아서 그것을 덥석 무는 순간 나는 엉뚱한 곳으로 낚일 뿐이다.

따라서,

나에게 생각은 필요없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의식'해야 한다. 

또한 '의식한다'는 영역에서 '이성'은 작동되어야 한다.

이 작동이 의식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의식의 힘으로 움직이며 의식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야지만

'이성'은 자체이름에 대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성'은

'의식'의 영역에서 개인의 삶에 밀착되어 활용되어질 때 비로소 가치있다.     


잠깐 '이성''지성'이나 '인식'과 구분지을 필요가 있겠다.

지성은 지적인 면에서, 인식은 지성이 내 사고에 질서화된 것으로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려 하는데 지성의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 기계에 서서히 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발하라리의 말처럼 '이미 지금 우리는 그 전모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대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 속의 작은 칩이 되어가는(주2)'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알고리즘이 나의 뇌를 늘 주시하며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제의 나를 호출해 노트북을 켜자마자 어제 했던 클릭을 오늘 또 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인식된다면 나의 의식은 살아있는 것이다. 인지한 것이 인식되는 것은 의식이 활동중이라는 의미, 따라서 이성이 작동하는 중. 이렇게 이성은 지성과는 다른 또는, 더 큰 차원인 것으로서 단순히 수치화된, 또는 실험이나 데이터로 검증된 나름 '과학'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것보다 훨씬 더 무한한 방향으로 이어진다.     

    

'당신은 어떤 심오한 결정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대부분 성공자들은 자신의 계획이나 지식이 아무리 자신을 설득하더라도 직관이 이끄는 방향을 따른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구체화, 정량화, 선형화될 수 없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도 안되는

섬광과도 같은 직관.

계량화되지 않기에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직관을 무시한다면 니콜라스나심탈레브(주3)의 말처럼 '바보지식인'이다. 몽테뉴(주4)는 지식만을 믿고 직관적 감각을 무시하는 이들을 '이성의 절름발이'라 하며 이들의 골통에는 설사제를 부어 세척시켜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 재미난 표현인지 한참 웃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바보지식인이면 어쩌지?

내 이성이 절름거리면 어쩌지?

내 골통에 온통 비워내야할 오물만 가득하면 어쩌지?

싶어서 말이다.      

세상은 변한다.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변화의 에너지는 나에게도 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나에게도 새로운 지식은 필요하고 지식의 주입은 기존에 자리잡힌 인식을 늘 새롭게 구조화시킨다. 나는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기에 매일 새로운 선택을 하며 선택은 판단을, 기존의 판단은 새로운 판단으로 대체된다.


늘 새롭게 판단해야 하는데 기존의 지식에 의존한다는 것은 오류 속에서 헤매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격이다. 그런데, 어제를 산 결과로 오늘 새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면 분명 무언가가 보태지지 않는 한 어제와 같은 판단,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게 뻔하다. 아, 이렇게 삶이 이어지는 건 너무 가혹하다. 


현명한 이들은 늘 새로운 판단앞에서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는 과거의 기억에 의존한 기존지식, 즉 인식을 배제하고 직관을 따르는 용기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은

‘기존’이 배제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매일 새롭게 할 수 있을까? 단순하다. 오늘을 산 경험 자체가 새로운 창조로 추가되면 된다. 산다는 것은 겪었다는 것이며 겪었다는 것은 무언가가 체화됐다는 것이며 체화는 온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현상앞에서 나는 기존의 인식이 아닌, 오감을 너머 육감이라 불리는 직관을 따라보는 것이다. 다시 또, 인식에 등을 돌리고 직관, 즉 느낌에 따라 움직여보는 것이다.

이 경험으로 나는 매일 낯선 새로운 판단에서도 가능성으로, 지혜로워지는 방향으로 한걸음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진화이고 발전이고 성장이다.      


'직관을 따르려는 판단앞에 분명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예측불가의 범주에 놓여있는 이 판단에 대해 나는 분명하게 안다. 직관’, 미지의 신호야말로 우주가 내게 보내는 영혼의 자극이라는 사실 말이다. 또한, 기존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더 두렵지 미지의 세계에 새로운 판이 펼쳐지는 것이 무엇이 두려울까? 나의 인식에 갇혀 과거를 더듬어 그 중 하나를 뽑아든 선택이 아니라 무한의 가능성 앞에서 ‘운’이나 ‘기적’과 같은 선물까지 덤을 얻을 수 있는 기회 앞에 두려움이 왠 말인가? 


이렇게 ‘인식’말고 ‘의식’의 범주에서 판단하려는 이성의 힘. 이것이 진정한 사고의 힘이다.

따라서, '나는 이성적인가?' 라는 질문에 '이성'을 이렇게 개념화해보려 한다.


인간의 이성이란 

지식의 양을 쌓거나 쌓아진 지식을 다듬어 인식을 구조화시키는 작업에 

직관이라는 섬광의 옷을 입힌 것을 의미한다. 

‘합리’라고 불리는 이성에게 ‘비합리’의 손을 맞잡게 하는 용기이며 

‘논리’에 ‘비논리’까지 보태어 더 큰 시야에서 이뤄지는 판단인 것이다. 

합리와 비합리, 논리와 비논리가 버무려져 

직관에 의한 초월된 지식으로 승화된 곳에서 

합리는 공리가, 

공리는 신비로 우주의 메세지를 수렴한다.


한마디로, 이성은 지식과 경험과 직관의 총체이며 이런 이유로, 이성은 지성이나 인식보다 더 광범위한 범주이고 동물과 구분짓기 위해 신이 그어놓은 경계인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우창교수는 '이성은 단순한 방법의 수련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길러진다(주5)'고 참으로 명쾌하게 언급했다.     


그래서

생각하지 말고 의식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에서 신이 내린 '이성'이라는 선물을 내 것으로 누리는 것은 인간만의 권리, 나의 권리다.


그렇다면

생각을 버리는 수고 대신 이성을 훈련시키는 수고가 더 낫지 않을까? 이 수고로움은 이성이 스스로 이성을 키우는 작업을 돕는다.      


인간은 누구나 감각으로 현상을 느끼기에 이성도 감각의 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성은 현상과 감각을 통해 나에게 형성되는 나름의 절차를 요구한다. 감각으로 전해진 현상에 대해 감각적 판단이 아닌, 현상의 이면을 보는 지력으로부터 도출되어 기존의 인식에 새로운 옷을 입힌 논리가 내 사고에 자리하게 되면 현상에 대한 다른 관점, 다른 시선, 더 큰 시야를 갖게 된다. 이로써 나의 지력은 더 강한 힘을 갖추게 되고 이 과정은 이성을 재구조, 재편성시켜 확장된 이성으로 스스로를 키워내는 것이다.     

이성적 인간의 나선으로의 진화(그림/정근아작가)

이러한 나선형의 회귀와 순환이 더 큰 나로, 더 나은 하루로, 더 넓은 의식의 세계로 나를 진입시키는 이성의 역할이다.


이 역할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앞서 말했듯이

내 눈은 보이지 않는 이면을 향해서 날카로워야 할 것이며

날카로움에 아프더라도 굳어진 지성의 파괴를 허락해야 한다.

파괴된 지성은 물러나거나 새로운 지성과 재결합해

다시 과감하게 새로운 사고체계로의 질서로 건설해야 할 것이다.  

   

자, '나는 이성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성'에 대해 개인적인 소견을 보태면서 

답을 내려보려 한다.


나는 이성적 인간이라 확언할 수 없겠지만

이성에 진입했고 진정한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 진화가능성이 농후한 실천을 행하고 있기에 

보다 고도의 이성을 지닌 인간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내 삶이 위의 언급한 바와 같은 진화를 거듭할 때 

나는 보다 더 동물과 구분되는 '이성적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인간이라 할 수 있겠다.                 


주1>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001, 소나무

주2>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하라리, 전병근 역, 2018, 김영사

주3> 블랙스완, 니콜라스나심탈레브, 차익종, 김현구 역, 2018, 동녁

주4>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테뉴, 손우성 역, 2005, 동서문화사

주5>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김우창, 2014,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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