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6-2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를 지나 CH2. 나를 해체해보니입니다. 오늘은 CH2 6편의 2. '인간은 왜 사실보다 감정에 더 무게를 싣는가?'. 따라서, 지난 글들에 이어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자, 이제 감정의 정체가 에너지인 것을 알았으니 보다 현실적인 얘기를 해보겠다.
나는 나에게 먼저 묻는다.
그리고 나는 답한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너무 주관적이라 답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답하려는 시도는 오래된 나만의 습성때문이다. 질문이 잘못되면 답도 잘못되며 질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답은 정답에서 멀어진다. 따라서 혹여 질문에 따라 정해진 답이 없거나 모르더라도 정답을 찾기보다 오답을 피하는 것이 '삶'이라는 다양성과 추상성을 띈 질문에서는 더 필요, 중요하다고 여긴다.
나의 묻고 답하는 습성이 이러하기에 주관적인, 그러니까 보편에서 멀더라도 질문자체에 의의가 있다면 정답말고 오답을 찾아 그것을 제거하는 쪽으로 나를 유도한다.
여하튼, 첫번째 답변에 대해서는 너무 주관적이지만 내 경험은 이러하다. 이성이 강한 사람, 흔히 FM이라 불리는 부류의 인간들은 제 아무리 옆에서 누가 통곡을 해도 잠깐 움찔할 뿐 자기 할 말을 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일을 해내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상대가 화를 내더라도 전혀 동요되지 않는 경우도 숱하게 봤다. 온 전신이 감정에 휩싸여 하소연을 늘어놓는 상대 앞에서도 이성적으로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려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고 어쩜 그리도 냉정할 수가 있을까 혀를 내두르게 하는 부류도 있다.
그래서 감정이 이성보다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감정이 왜 인간을 힘들게 하는지에 대한 논의주제로는 다소 부적합하다. 게다가 나는? 나는 결코 FM스럽지 못한지라 이성이 종종 감정에 패하고 감정에 이끌려 일을 그르친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감정이 이성에 패하고야 마는, 나와 같은 이들은 공감이 깊기에 공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눈코입을 중심으로 한 얼굴근육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이점이 있다. 또한 눈에 비치는대로 마음이 받아들여 바다를 보면 입이 절로 벌어지고 엔틱분위기의 카페에 가면 순간 주저앉아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할 수 있고 할 일이 앞에 놓여 있어도 감정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세워두고 아무리 이성이 나를 말려도 감정이 앞서 상대에게 내 것을 모두 내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감정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사실보다 감정에 더 무게를 싣는지...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정신은 진실하지 않거나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이 글의 시작에 던진 질문에 대한 두번째 답일 것이다.
정신을 관장하는 이성,
이성 속에 자리잡은 인식.
이 자체에는 거짓과 오류가 많다.
인식이란 기억에 의해 자리잡은 관념이기에
기억의 정체를 파헤치면 이성이 오류투성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쉽게 경험한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모두의 기억이 달랐던 경험, 분명 바로 직전에 내가 행한 행동인데도 기억이 토막나 있던 경험, 시간상으로는 너무 오래되어 잊혀지는 게 마땅한데도 아니면 잊으려 애를 쓰고 있는데도 기억이 선명해서 없어지지 않던 경험. 어디선가 꼭 본듯한 데자뷰(주1)의 경험.
기억은 감정에 의해서 소실, 희석, 편집, 소생된 채 저장된다. 같은 곳에서 같은 경험을 했는데도 모두가 다른 기억을 소유하고, 심지어 서로 어긋나게 기억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즉 기억은 ‘이익이 되는 것은 좋게, 손해가 되는 것은 나쁘게’저장하기에 ‘우리는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뇌가 해석하고 재구성한 것을 진실로 믿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보호하고 상대의 믿음을 공격(주2)’한다.
한마디로
기억은
편향과 편견의 덩어리로
감정에 의해 판단된
인식의 맹목적 저장창고인 셈이다.
우리의 인식자체가 기억의 덩어리,
따라서 편향과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
편견은 내가 어떤 안경으로 대상을 보느냐이고
편향은 편견이 가는 방향. 즉, 사실보다는 감각, 감정에 의해 확증이나 편집되어 선택적으로 인지하는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인식의 속성에는 거짓(또는 비사실)이 포함되고
거짓은 잘못이나 오류를 도출하고
오류는 인식의 주요기능인 판단의 비효율, 비정상을 초래한다.
이러한 근거에 의해
감정의 우선순위에 따라 순서 매겨진 기억의 덩어리,
즉 인식은 오류와 비사실을 함유한 채 진실에서 비켜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살며 축적해온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지식의 경험이 다 다르기에 기억도 다르고 인식도 다르고 따라서, 인식이 근거가 되는 사고의 방향도 다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고 편향으로 기억이 왜곡될 수도 있다.
이를 인정하고 여기에 보태서 또 하나의 인정을 나에게 요구해 보는데
나는, 아니 나의 인식은
나의 감정에 의존하여 좋은 것을 기억에 남기고 나쁜 것을 기억에서 배제시키려는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이므로 나의 기억은 감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재구성된 믿을 수 없는, 믿으면 안 되는 영악하고 요상한 정체라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명령하는 뇌 속의 기억 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에 인간본성상 오류를 비켜나려 감정이 애쓰고,
또 편하고자 하는 인간본성상 사실을 오류화시키려 현상을 무진장 왜곡시켜야 하니
이를 불편하게 느끼는 이성이 밀어붙이는 감정과 싸워가며, 또 감정이 오류투성이인 이성에 대항하며 서로의 힘겨루기를 하는 것때문에 나의 육체는 늘 감정적으로 버거운 것이다.
감정은 이미 이성 속의 인식이 거짓과 오류투성이임을 알고 있으니 어쩌면 열일하는 감정때문에 내가 피로해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라 하겠다. 감정의 이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뇌는 어떤 정체를 저장시키기도 소멸시키기도 합성시키기도 하면서 점점 이성의 기능을 진화시키고 있으며 이성의 수준이 사람마다 다른 차이를 보이게 된다.
결국,
그래서,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이며
감정에 힘겨워하는 것이며
감정에 사실이 왜곡되어
감정에 의해
사람을 얻기도 잃기도
일을 해내기도 그르치기도
목숨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 다음 편은 CH2. 나를 해체해보니의 6-3. '감정폐허'가 발행됩니다.
주1> 데자뷰[DÉJÀ VU] : 19세기 프랑스 정신의학 목록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déjà raconté(이미 말한), déjà entendu(이미 들은), déjà eprouvé(이미 성취된), déjà fait(이미 행한), déjà pensé(이미 생각한) 그리고 déjà voulu(이미 갈망한) 등이다. 정신분석은 이미 보았다는 느낌과 이미 말했다는 느낌에 주된 관심을 갖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2> 정체성, 밀란 쿤데라, 이재룡 역, 1998,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