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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24. 2024

감정 폐허

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6-3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를 지나 CH2. 나를 해체해보니입니다. 

오늘은 CH2 6편의 3. '감정폐허'. 따라서, 지난 글들에 이어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0여년 전 나는 살아야 했다. 생존의 갈림길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하지만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불안감, 막막함, 공허함, 의미없음, 포기, 고립, 소외, 단절, 그리고 무가치함으로 인한 극도의 피곤함, 이로 인한 절망감과 허무함에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왜 나를 또 살려놨는지, 왜 오늘을 또 살아야만 하는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원망의 한숨으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없었다. 변함없는 일상은 그저 내 감정과는 무관하게, 그냥 날 무시하고 흐르는 것 같았다.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도 학교에 가고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밥하고 청소하고 그렇게 일상.이라는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지만 내적으로 나는 에너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무가치, 무의미, 무의욕 상태였던 것이다.     


이 지경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뭐가 힘들어서 맨날 죽상이냐?’라고 누군가는 드러나는 무표정한 인상만을 나무라고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을 싼다’며 이 정도 가진 사람이 이런 감정상태를 갖는 자체가 죄인듯 말하고 심지어 같이 사는 남자는 ‘감정사치’라며 ‘안 바빠서, 한가해서, 살만하니까’ 그렇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속상은 했지만 그 말들이 모두 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별로 힘든 것도 없었고 바쁘지 않으니 감정놀이라 치부될 수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과 비교되어 감정사치나 부리는 40대로 나는 감정기능이 취약하거나 감정무능력자로 전락된 것이다.


인정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나와 같은 경우를 공감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전혀 공감이 안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인정한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을 싸듯 감정사치에 빠져 허우적대는, 죄인과 같던 그 무기력한 시절의 나를 인정한다. 그 때 나는 그랬었으니 인정! 하지만 표면으로 인해 내면의 '감정자체가 죄'로 치부되는 것을 인정은 하되 수용할 수는 없다. 


당시 나는 

감정폐허 상태였으니까.   

폐허가 되었다는 것은 폐허가 되기 전까지 제대로 된 건축물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폭격을 맞았든 쓰나미에 쓸렸든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자리를 잃고 소실되거나 무너져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재건설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가 된 것이다. 마치, 풀조차 거둘 수 없는 사막처럼 말이다. 

사막에게 왜 꽃과 나무를 키워내지 못하냐고 따지지는 않는다. 

사막이니까. 

원래가 그런 거니까.    

 

하지만 폐허는 다르다. 지금 상태는 사막의 기능밖에 못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기능이 무너진 감정은 이전 기능을 되찾으려는 항상성과 본래의 기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회복탄력성도 가동되니 사막처럼 아무런 생성의 기능이 없어 보이긴 하겠지만 에너지면에서는 분명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기능면에서는 사막같의 능력에 좌절하는, 완전한 불균형상태에 놓여 어렵고 괴롭고 곤란하고 힘들었던 것이다. 감정이 두동강난 불균형 상태에서 한쪽에선 ‘일어나야지’, 한쪽에선 ‘못 일어나’를 외치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폐허 상태가 된다는 것은 숨은 쉬고 살고 있지만 내면에선 죽음의 에너지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멀쩡한 집도 사람이 오랜 기간 살지 않으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스스로 발산하며 귀신나올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감정폐허상태도 그렇다. 아무리 웃어도 에너지는 죽음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실제 전쟁 중에 어린 아가들이 부모를 잃고 의욕이 없는 상태를 보일 때 제 아무리 잘 먹이고 보살펴도 건강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신체가 아닌, 정신과 정서적인 타격이 그만큼 사람의 생명에너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하튼, 폐허면 폐허인거지 왜 폐허가 됐냐고, 왜 건설하지 않느냐고, 폐허라도 건물로서 기능을 하라고 다그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한 감정폐허상태에서는 이성도 신체도 상식 밖에 머물기에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말을 들어도 못하거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을 싸는 못난 그대로 그저 숨쉬며 사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간이나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감정폐허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밥이 모래알’처럼 씹혔던 경험, 흥겨운 음악이 아무리 내 귀를 자극해도 주체할 수 없이 계속 흘렀던 눈물, 개그콘서트를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대는 가족들 옆에서 왜 자신은 웃지 못할까에 대해 오히려 자책하며 괴로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소한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정서상태, 감정상태가 나를 바닥으로 꺼뜨리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감정상태지 신체나 지식이 아닌 것이다. 


문제로 지목된 감정. 폐허가 된 감정은 외부의 도움없이는 스스로 일어서기 어렵다. 감정이 나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면 제 아무리 강인한 신체와 더 강인한 정신도 일순간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일사분란하게 처리반이 동원되면 폐허의 잔재들은 모두 치워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듯 열정도, 의욕도, 희망도, 바람도, 행복감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무기력이 극을 치달으며 삶을 궁지로 몰아 넣는다 하더라도 외부의 도움이면 조금씩 소생시킬 수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땅을 다시 고르고 어떤 건물을 짓느냐다.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기존의 토질자체를 훼손시키면 안되는 것처럼 감정 역시 우리 몸의 어딘가를 훼손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감정기능을 복구시켜야 한다. 그래서, 감정폐허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감각을 마비시키는 제압이 아니라 감정의 척도, 감정의 각도계를 바로잡는 정신의 기능을 되살려야 한다. 

죽어가던 기능을 되살리거나 이미 소멸된 기능을 새롭게 무기로 쥐고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든 정신에 의지해야만 한다. 

본능에 이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정신 말이다. 

정신에게 갈구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와달라고, 

그렇게 감정을 이겨달라고 애원해야 했다.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던 그 때, 

나의 외부는 바로 

약이 아니라 책이었다. 

책으로 만난 많은 저자들이 나를 도왔다.    

 

감정과 정신은 서로를 죽이면서 강해지고 

각자 강해지면서 서로를 생성시키는 

아주 기괴한 공생, 기생 관계다. 

아군이면서 적군인 상당히 묘한 관계다. 


정신이 강한 타격을 받으면 마치 친구따라 강남가듯 감정도 타격을 입어 기능을 상실하고

이렇게 무너진 감정을 되살리는 역할 역시 절친이자 아군인 정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이 자기기능을 못하면 못된 감정이 냉큼 그 자리를 점령해버려 오히려 정신을 더 망가뜨리기도 하고 

그걸 알아챈 조금 현명한 정신은 얼마 전까지 아군이었다가 적군으로 배신한 감정을 물리치려 

내 몸을 온통 전쟁터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어떤 순간, 일시적으로 단면들이 모여 입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만들어진 입체가 몸체를 불려 드러난 것이다. 애초에 생성된 아주 작은 입체 속에는 아마도 두려움보다 더한 공포심이 내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어리석은 정신이 이를 감지하지 못하여 부정의 감정이 스스로를 키우게 냅두면서 말이다.     


무의식에 오랫동안 내재된 공포에 화려한 옷을 입히고 치장, 분장, 변장을 해댄 채 일상을 지낸다 하더라도 ‘화려함’은 무의식을 지배하는 공포에 의해 ‘화려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 안에서 오히려 공포가 몸집을 불리도록 도와주는 꼴이 된다. 무의식에 존재했기에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아주 미미하게라도 ‘못해’, ‘안해’라는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공포는 더 강하고 더 크게 자기 몸집을 부풀린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를 들더라도 

그 안에는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해내기 버겁다는

덩치 큰 공포심만 존재하며

이러한 무의식 속의 감정이 동종의 에너지와 교신하며

정신의 무의미, 신체의 무기력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문제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 이면에서 보이지 않게 몸집을 불린 감정이다. 


감정이 얼마나 몸집을 키웠냐에 따라 감정 바깥의 현상과 죽이 딱! 맞았을 때 감정은 외부로 폭발한다. 에너지니까. 에너지는 동종을 불러오니까. 몸집을 키운 감정이 자기가 터지기 위해 일을 만들었든 외부의 어떤 현상이 아직 커지지도 않은 감정을 강하게 끌어당겼든 여하튼 죽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내 안의 감정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때서야 나는 의식한다. 

아... 나의 무의식에 이런 녀석이 자라고 있었구나...   

   

나 역시 그랬다. 지독한 감정과의 내적 싸움은 결국 사단을 내어 내 몸도 상하게 만들었다. 보이는 모든 증상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반응이다. 내 키가 170인데 당시 내 몸무게가 40kg 겨우 나갈 정도였으니 앞서 언급했던 전쟁통의 아가들에게 아무리 영양있는 음식을 먹인들 서서히 건강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나는 40이라는 나이에 몸무게와 비실거리는 신체로 실제 경험했던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를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몸집을 불린 감정이 내 신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공포감까지 보태진..

그 때 나는 

시작해야 했다.

정신에 먹이주기를...


정신을 강화시켜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살기 위해 감정에 저항하고 외면하고 대항까지 하기로 한 것이다. 아마도 책에 매달리기 시작했던 때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새벽에 체계적으로 읽어 내려간 것은 아니지만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고 책에 쓰인 대로 따라하며 구분없이 이것저것 정신에 먹이를 주면서 흐트러진 이성을 바로 잡으려 하루종일 애썼다. 생존을 위한 외롭고 고독한 혼자만의 줄타기를 마치 독립운동하듯 비밀리에 매일매일 거행했던 것이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 출근시키고 얘들 학교보내고 그리고 혼자 하루종일... 그렇게...


결과적으로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멀쩡하다. 

멀쩡보다 더 좋다. 

아둔하기 그지없는 나여서 지금에서야 겨우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나를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추락시킨, 아니, 

감정이 몸집을 불려가며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

감정이 내 인생에서 하려 했던 일은

지금 이러한 글을 쓰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지독했던 생존과의 싸움을 딛고

조금씩 다시 세상과 조우하면서

체계적 책읽기와 인간에 대한 탐구,

사유의 길을 걸으며 느끼는 쾌락,

이 배움을 사람들과 나누며 나를 진정한 교육의 길로 걷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지금의 내 모습까지에서부터 연역해보면 당시 감정이 내게 와서 해야 할 일을 진짜 제대로 하고 나를 떠났구나. 당시 날 찾아왔던 감정은 자기 목적을 달성했구나를 알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감정이 제 아무리 불손하거나 불필요한, 정말 꺼져버리라고 욕하고 싶은 미운 상태로 

내게 왔다하더라도 

자체의 의미는 숭고한 것이다. 

나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삶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며 

나의 이성을 바로잡아주며 

정신의 질서를 세워주는 기능을 한는 것을 

나는 실제 나의 삶에서 경험한 것이다. 


감정이란 녀석은 무너져도 또 세워진다. 

반드시 세워진다. 

폐허가 되었다 하더라도 

더욱 견고하고 더욱 화려하고 더욱 기능좋게 재건축될 수 있다.  

그러니 

신체가 멀쩡하다면

감정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 감정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    


인생에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감정의 요동, 감정의 폐허상태. 이 때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신이 의식주변에서 놀도록 잘 감시해야 한다. 감정이란 녀석을 정신과 제대로 교합시키면 강력한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힘을 초월하여 과시하지만 어긋난 부정교합은 공포심과 불안이 힘을 얻어 세상을 온통 회색으로 보게끔 시야를 흐리게 하며 모든 감각을 통증으로 받아들여 영혼이 제 아무리 외쳐대도 듣지 못하는 둔탁한 마음으로 날 고장낸다. 그리고 그렇게 인지하는 상태가 세상이라는 나름의 정의에 자기 삶을 내맡겨 버리는 염세적이고 비판적인, 어리석음의 끝을 보이고야 마는 것이다.

내가 하강하고 몰락했던 시간은 내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가고자 하기 때문(주1)이며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불리하게 시작되었지만 나는 단지.. 뒤로 물러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었고... 나의 시간 속에는.....무섭고 위협적인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주2).


그 땐 괴로웠고 외로웠고 좌절했고 몰랐었다.

그런데 이제

외로워도 괴로워도 좌절해도 '알기에', '알아버렸으니'

이는 지우고 싶은 시간들이 아니라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었던 나였음을, 

그리고 오늘 역시 나에게 올 어느 날을 위한 것임을,

그래서 매순간 하루하루, 모든 것에 다 감사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감정폐허는 본래의 기능 이상으로 나를 만들어줄,

잠시 물러나 무섭고 위협적인 나만의 것을 키우는 훈련기간이었던 것이다.


아.. 

이렇게 훈련된 나를...

세상은 어찌 쓰려고 하는 것일까.....


=> 다음 편은 CH2. 나를 해체해보니의 6-4. '감정재건(再建)'이 발행됩니다.


주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2000, 책세상

주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2001,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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