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CH2 6편의 4. '감정재건'. 따라서, 지난 글 '감정폐허'를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자, 감정폐허상태가 되었더라도 우리는 정신에 집중하면 다시 나를 재건할 수 있음을 알았다. 내가 감정에 사로잡혀 정신줄을 놓고 지내지 않으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의식의 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정신은 이성이 지배하고 있고 이성은 인식된 관념에 통제받는다. 인식된 관념은 과거의 경험이 지배적이기에 이 모든 것에서 빠져나와 전체를 보고 다른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초월된 정신활동, 이 활동을 관장하는 ‘의식(consciousness)’의 문으로 들어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의식의 세계는 무한하며 인식의 세계는 유한하다. 감정은 과거부터 켜켜히 쌓인 무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체에 기인한 것이어서 부정의 속성을 지니는 인식으로부터 전해지는 감각적 에너지다. 물고기가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디에 사는지를 보려면 유한한 물 속에서는 제 아무리 기를 써도 볼 수 없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바다를 볼 수 없다. 손바닥은 손등을 볼 수 없다. 손바닥이 손등을 보려면 ‘손’이라는 전체를 볼 수 있도록 시야를 손밖으로 이동시켜야만 볼 수 있다.
의식한다는 것은
이렇게 손이라는 유한의 세계가 아니라 손밖세상이라는 무한의 세계로 나의 정신을 빼내는 작용이며 정신을 지배하려고 안달나있는 인식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이러한 이동이 의식의 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무한의 세계로 시야를 넓혀서 바라보는 것이다. 낯설지만 그 미지의 세계로 자신을 진입시키는 것이다. 알고 있는, 보고 있는, 지니고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알지 못하는, 보지 못하는, 지니지 못한 그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그래야 전체를 보고 알고 가늠할 수 있으며 통일된 전체, 일체의 시선에서 부분을 인지하기에 부분이 전체안에서 조화롭게 균형을 이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결국, 내가 나를 알려면 나를 가둔 인식이 아니라 의식의 세계로 나의 정신을 진입시켜야만 가능하다.
즉, 인식의 저항을 이겨내는 것이며 인식에 등을 돌려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나를 나약함으로 치닫게 하는 감정을 달래고 얼르고 보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체로서 인정, 수용한 후 나의 시선은 의식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자, 그렇다면, 감정폐허의 가장 깊숙이에 잠재하고 있는 부정정서의 끝판왕, 공포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식의 눈으로 바라보자.
우리에게 ‘감정’이란 녀석이 찾아오는 것은 ‘욕구’ 때문이다. 뭔가를 하려 하니까. 뭔가를 바라니까, 뭔가를 변화시키고 싶으니까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진화해야 하니까, 나아가야 하니까, 자라나고 커져야 하니까, 인간의 본성이 ‘욕구’이니 감정의 출현은 당연한 것이다.
뭔가를 하려는데 못할 것 같은, 과거에 실패했던, 어려울 것 같은, 하다가 결과를 못내면 어쩌 싶은 ‘인식’으로 바라보는 습성에 의해 공포감이 저 아래에서부터 스멀거리며 기지개를 켠다. 반면, 되면 좋을 것 같고 하면 멋질 것 같고 이루면 행복할 것 같은 감정도 함께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된다.
감정은 상반된 이면의 것이 함께 발생하고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감정의 발로(發路)다.
인식으로 바라보면 부정적 감정이, 의식으로 바라보면 긍정적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쉽게 말해,
인식이 과거와 부정, 유한의 속성을 띄고 있으니 인식하기엔 공포의 기지개가 더 강하게 느껴지지만
의식은 미래, 긍정, 무한의 속성을 띄고 있으니 의식하는 자는 욕구의 기지개를 더 화려하게 느끼는 것이다.
조금 더 상세하게 거론하기 위해
욕구와 감정을 분리해보자.
욕구의 정체는 현재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바람이다. 없으니, 가져보지 않았으니 갖는 방법도 모른다. 불투명하고 예측불가하고 믿음이 약하다. 경험도 없고 보이거나 만져지지도 않으니 오로지 추상적인 이미지로만 상상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추상성(욕구)을 구체성(현실)으로 바꾸는 ‘이상의 현실화’, ‘관념의 형상화’를 위한 작업장인 것이다. 이 작업장에서 매일 매시간 살면서 되면 좋겠는데 안될 것 같고 쉬운 것 같은데 어렵고 다 된 것 같은데 뭐가 어긋나서 짜증나고 계속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하기 싫어 포기하고 싶고... 온통 감정투성이다.
이렇게
감정은 욕구로부터 생성된다.
욕구를 뭔가 하려는 시도, 즉, 단순하게 ‘일’이라고 표현해보자. ‘욕구’라는 단어가 추상적이니 이를 분절시켜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일’로 명시해 보자는 의미다. '일'은 일 자체에 시작부터 결과까지 가는 길을 내재하고 있다.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린 후 줄기로, 잎으로, 꽃으로, 열매로, 다시 씨앗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든 '일'이 현실화, 즉 결과가 되는 과정은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창조이기 때문이다.
시도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다.
'일'은 없던 것이 결과로 현실로 형상화되는 창조를 위한 것이기에
이미 거대한 손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어 지목된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자,
일은 일 자체가 가는 길이 있다.
전 과정에서 일이 나를 선택할지 내가 아닌 타인을 선택할지는 일이 정한다. 처음에는 내가 일을 정한 것 같겠지만 세상에 우연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이 거대한 손의 설계에 의해 그리 내정되어 심사대에 올려진 것을.... 내가 일에 걸맞는 자격을 갖추냐 못갖추냐에 따라 일이 날 데려갈지 말지를 결정한다.
조금 보태 말하자면, 그 ‘일’이라는 것이 우주의 시선에서는 조화를 위해 창조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며 탄생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그 일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우주가 하는 유일한 일은 창조와 조화, 진화이기 때문이다.
조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반드시 탄생되며
그 과정에서 일이 끝까지 나를 데려갈 때 우리는 ‘성취’, ‘성과’라 언어화하고
일이 나에게 부적합판정을 내릴 때 우리는 ‘포기’, ‘한계’, ‘실패’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그렇다면 내가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냐?’ 고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다. 그건 다른 문제이니 여기서 거론하지 않기를 부탁한다. 나의 관점은 ‘나’로부터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 세상, 세계,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선에서 ‘나’ 또는 ‘일’을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관점을 갖는 것은 의식의 세계에서 궤를 꿰어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감정은 ‘욕구’의 분절, 즉 ‘일’을 ‘하고자 함’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의 크기나 기간을 떠나 어떤 일이든 처음의 시도(행위)를 하려면 감정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용기가 필요하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의심과 자신감, 열정 등 다양한 감정이 한꺼번에 분출된다.
자, 그렇다면 수천수만가지 인간의 감정 중
어떤 감정이
‘시도’ 시점에
가장 우선적으로 나를 지배하는가?
바로 그 감정이 나의 무의식에서 가장 힘을 키운 녀석이다.
공포심이 먼저 들면 공포가 가장 힘을 키운 것이고 설레고 떨리고 불끈불끈 의욕이 넘치면 그것이 힘을 키워온 것이다. 그 무의식이 바로 세상이 보낸 ‘일’과 교신하며 ‘일’이 가는 길의 무늬가 되기도 무기가 되기도 하고 무리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공자의 마인드가 출중하지 않은 이상, 우리들 대다수는 시도하는 ‘일’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일이 주는 중압과 압박이 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 결코 그것을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심도 생겨난다.
그런데 계속 언급했듯이 이것은 인식에 저항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때문이니 이런 감정이 들 때 ‘손바닥 이면에는 손등이 있지!’하며 '공포'이면의 '욕구'로 정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식이 아니라 의식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다.
그러면 ‘일의 시도’ 앞에서 ‘공포심’과 바로 붙어 있는 ‘욕구(욕망)’을 인지하게 되고 공포심의 반대방향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 부정은 더 큰 부정으로 향하고 긍정은 더 큰 긍정으로 향하며 동종의 에너지를 몰고 그 일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꼭 명심하길 바란다. 일의 결과(욕구의 형상화)는 첫 시작에 있다. 인식으로 가느냐, 의식의 문을 여느냐에서부터다.
두려운 공포심은 겁나고 떨리고 낯설고 그래서 하기 싫어진다. 하지만 공포의 이면에 욕망으로 나를 옮기는 순간, 해보지 뭐! 라고 용기도 느껴지고 용기앞에서 설레고 아침에 눈을 뜨며 괜시리 자신감에 벅차오르기도 하는 자신의 강인함도 느낄 수 있다. 공포의 이면에는 욕망이, 겁의 이면에는 용기가, 떨림의 이면에는 설레임이 낯섦의 이면에는 익숙한 것에 대한 자신감이 항상 맞붙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이렇게 이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의식의 문으로 들어서면 선택과 판단이 훨씬 현명해질 것이다. 이는 분명하다. 전체에서 바라보며 내리는 판단이 부분에 한계를 둔 판단보다 현명하다는 것은 당연하니 말이다. 이 현명한 판단의 결과로 긍정의 경험이 축적되고 축적은 타인에게 이로운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유대관계가 좋아지며 뜻대로 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동료에게 동정심도 느낄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힘도 갖게 되어 전체의 시너지로 이어지기에 일은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자,
욕구는 감정에서 생겨나고
감정은 양면성을 지니며
이쪽이면 저쪽을,
저쪽이면 이쪽을 감안한 의식의 세계에서
나의 정신이 한걸음씩 걷는 것,
바로 이것이
폐허가 된 감정을 재건하는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방식이다.
=> 다음 편은 CH2. 나를 해체해보니의 6-5. '세상은 정확하게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보는 대로!'가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