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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09. 2024

세상은 정확하게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보는 대로!

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6-5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를 지나 CH2. 나를 해체해보니입니다.

오늘은 CH2 6편의 5. '세상은 정확하게 나를 보고 있다.내가 보는 대로!'.

따라서, 지난 글 '감정재건'를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모든 감정은 에너지로 세상과 교신한다. 

감정은 욕구에서 비롯되며

욕구는 감각적으로 받은 느낌!이다. 

즉, 나의 밖에서 떠도는 나의 영혼의 자극이다. 

영혼은 에너지로 내게 메시지를 전한다. 

고로 ‘일’‘영혼의 자극->감각->감정->인지’의 과정이 의식세계에서 이뤄지게 되면 행동의 명확성을 담보하여 욕구하던 그 것을 현실에 발현시키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이것이 

‘관념의 형상화’, 

‘이상의 현실화’다.  


자, 이번에는 나를 벗어난 의식의 세계에서 나를 들여다보자. 

바다를 보고 싶은 물고기가 되어 물 위로 튀어오르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손등이 보고 싶은 손바닥이 손밖으로 시선을 옮겨보는 시도를 나에게 대입해보자는 것이다. 나를 벗어나서 나를 들여다 보는 ‘초월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자. 그리고 종이에 적어보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여기 같은 일, 같은 상황의 다른 A와 B가 있다. 

         

A: ‘나는 나약하고 불안하고 새로운 일 앞에서 머뭇거리며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감이 없어 피하려 한다. 그렇게 나는 늘 위축되어 있고 작은 열정에도 금새 기운이 빠져버린 채 내 몸을 쉬게 한다. 이럴 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괜찮다.'라며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위로하며 나를 성장시키려 노력중이다.’


B: '나는 물론 두렵고 불안하지만 보다 단단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강인해지고 있고 남들이 뭐라 하건 나의 방향대로 걷고 있으며 금새 위축되기도 하지만 더 빨리 마인드를 전환시켜 이뤄진 결과를 상상하면서 그 때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나에게 칭찬도 좋지만 보다 더 나은 제안을 하고 위로보다 점검과 열정의 크기를 알려주는 데 더 에너지를 쏟고 있다.'         

  

자, 여러분은 A인가, B인가?     


이는 자신이 어떤 성향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에서 어떤 에너지를 내보내느냐를 알기 위한 샘플에 불과하다. 이 둘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둘 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모습으로 비칠 테니까. 자신을 저렇게 인지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일단 긍정으로 보이니까.

          

그런데 

A의 경우,

'과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도 나름 만족한다고 답할 것이다. 현실의 자아는 만족하며 위로하고 칭찬도 한다. 하지만 내면의 자아가 '너는 그 정도에서 만족해서는 안돼! 넌 더 크게 이룰 수 있어.'라는 목소리에 저항중이다. '아니야, 난 이 정도면 충분해. 난 쉬어야 해'하며 기존의 인식이 의식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현실의 자아가 내면의 자아를 이긴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위축, 적당한 인정에의 만족, 반성처럼 보이는 자기혐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느껴지는 죄책감, 열정과 같은 높은 수준의 에너지에 대한 거부 등 낮은 에너지를 세상에 방출하게 된다. 이러한 낮은 에너지는 위축, 실패의 두려움, 낮은 수준에서의 칭찬과 위로를 동반하기에 계속 그 수준의 에너지를 키워 그 정도의 결과만을 안겨주게 되며 지속적으로 위로와 칭찬을 갈구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반면

B의 경우,

'과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강한 부정을 할지 모른다. 현실적 자아는 너무 힘드니 쉬라고 강요할지 몰라도 원초적으로 배양된 내면적 자아에게 항복을 선택한 것이다. '너는 네가 아는 너보다 훨씬 커!'라고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중이다. 내면의 자아가 현실적 자아를 이긴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당연히 높은 에너지를 지니는 용기, 열정, 극복, 의욕, 성취의 감정이 무의식에서 세상과 교신하기에 지속적으로 그러한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되고 결과도 그렇게 드러나게 된다.           


분명 A와 B는 외적으로는 비슷하다. 

하지만 

무의식이 보내는 에너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한다. 


지난 주 글에서 언급한 공포와 욕구처럼 말이다. 이 두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리네 모습이다. A와 B 모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그리며 자신의 현위치를 인지하고 칭찬과 격려를 하지만 

A는 내면적 자아가 아닌, 현실적 자아가 압승했고 

B는 내면의 자아가 압승을 거뒀다. 

A는 현실적 자아의 압승으로 인해 성장의 기회를 놓치며 감정에 지배당한 채 자신을 그렇게 작고 나약하고 더 나아가기에는 다소 어려운, 옹졸하고 스스로에게 비겁한 이로서 자신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 

B는 내면적 자아의 압승으로 인해 현실적 자아에게 만족보다는 불만족한 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삶을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대로 

세상은 나를 바라본다. 

우리는 에너지로 교신한다고 했으니까. 


두 사람의 보이는 행동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다 어쩌면 전자가 자기 인생에 만족을, 후자는 불만족을 보내는 듯하지만 에너지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위축과 불안, 옹졸의 내면을 지니고 있으며 후자는 도전과 성취, 자신감의 내면적 자아가 오히려 현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고 있기에 부정으로 보이지만 실제 긍정의 에너지를 우주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전자는 부정을, 

후자는 긍정의 에너지를 수신받고 

결코 각색하지 않는 우주는

받은 그대로를 돌려준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은 언어나 행동으로 나를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에너지로 나를 알아낸다. 그리고 동종의 에너지를 무한의 공간에서 모아가며 세력을 키운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회귀본능을 지니기에 에너지 역시 나에게로 다시 되돌아온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자신이 인지하는대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의식혁명’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호킨스(주)내면의 부정적 감정에 매달리고 싶어하는 전자와 같은 ‘감정이 왜소한’ 이들은 갈수록 더 허약해짐을 실험으로 증명했는데 


‘마음속에 심술궂고 옹졸한 생각을 품은 채 옆으로 뻗은 팔을 다른 사람에게 눌러달라고 하고 누르는 힘에 저항하게 되면 근력이 약해지는 것을 실제 경험하게 되며 반면, 스스로를 관대하고 너그럽고 다정하다며 자신의 내적 위대함을 느끼는 사람을 상상한 채 팔을 눌러달라고 하면 근력이 세짐을 스스로 느낀다'고 했다. 


이 실험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나의 에너지가 얼마나 강하게 우주와 교신을 주고 받는지, 아울러 이러한 교신을 전해주는 영혼의 자극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왜소한 내면의 에너지, 

즉 왜소한 감정은 

왜소하게 자신을 인지하고 왜소하게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세상은 왜소한 이에게 가장 걸맞는 두려움과 나약함, 불안, 적당한 만족, 비굴한 타협, 죄책감,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의 에너지를 그에게 조우시킨다. 

그리고 몸집을 불려 더 크게 돌려보낸다. 


아무리 변화하려 애쓰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착한 행동이 그의 전반을 감싼다 하더라도 그의 내면의 자아가 세상에 보내는 왜소한 에너지는 유유상종으로 동종의 것들을 끌어당긴다.

반면,

위대한 내면의 에너지를 지닌, 자신의 위대함을 인지하는 이는 세상에 자신을 위대하게 드러내려 애쓴다.

세상은 위대한 이에게 걸맞는 극복, 충만함, 열정, 의욕, 성취욕, 미래를 결정하고 움직이는 추진력, 타인보다 자기 스스로에게 인정받으려는 자기이해와 자기도전의 에너지와 조우시킨다.


결국,

시도는 도전으로 

도전은 변화로 

변화는 주변상황을 극복해내는 자기극복으로, 

극복은 성취로, 

성취는 성장과 나눔으로 이어지는 삶을 선사하는 것이다.     


신의 계산법에는, 일처리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 더 주거나 덜 주는 것이 없고 아주 정확하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받았지만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이 작은 집에 들어앉아 사는데도 재산세니 주민세니 뭐니뭐니 세금이 매겨지는데 신이 무한히 베푼 것들에 우리는 세금조차 내지 않는다. 신은 그렇게 후하게 베푼다. 하지만, 감사와 자신의 쓰임을 망각하는 이에게는 누릴 권리를 박탈해버리고 적당히에서 만족하게 해버린다. 반면, 자신의 쓰임대로 쓰이기 위해 스스로를 크게 만드는 이에게는 오히려 복리로 불려 지급하는 것이 신의 일처리 방식이다. 확실하게 줄 것은 주고 가져갈 것은 가져간다. 


이 모든 일처리를 위해 신은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통신교신소로 만들어 

모든 인간이 그가 내보내는 에너지를 간파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몫을 아는 자에게는 후하게, 

적당히 타협하는 자에게는 그에 걸맞는 계산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주> 놓아버림, 데이빗호킨스, 2013, 판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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