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利己論) - Ch2. 나를 해체해보니 6-6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를 지나 CH2. 나를 해체해보니입니다.
오늘은 CH2 6편의 6. '감정의 진가'. 따라서, 지난 글 '감정재건'를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계속 감정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만을 부각시킨 경향이 있는 듯하여 이제 감정이 어떤 진가(眞價)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거론하려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감정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면이 존재한다.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이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존재에는 양면이 존재하니 감정에도 양면이 있다. 문제는 한쪽을 없애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도 성취의 쾌락을 위해 필요하고 쾌락도 영원하지 않으며 그 너머의 더 커다란 성취를 위해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한다. 이 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사형 직전 나눈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쾌락이란 참 이상야릇한거야. 고통이라고 하면 그 반대 것으로 생각되는데 둘의 관계도 묘하단 말이야. 이 두 가지는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법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하여 얻으면 대체로 반드시 다른 하나도 얻게 마련이야(주)”
감정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 죽을 때까지 연속적으로 나에게 온다는 것은 감정 자체가 인간의 인생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내 인생에 진입, 개입한다는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존재의 이유, 가치, 역할이
'감정의 진가'다.
인간은 신체와 정신, 감정으로 자신의 육체를 운영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삶은 나를 중심으로 한 '현상'의 나열이며 '현상'은 '시간과 공간, 자원의 한정'속에서 만들어진다. 자원이라 하면 사람, 자본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인생이란,
이러한 기본 전제를 지니고 감정이 내 인생에 하는 일은 '현상'과 연계될 수밖에 없으며 '현상'에 있어 좋든 싫든 감정은 반응하게 되어 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대로 감정이 좋은 현상과 만났을 때 맘껏 즐기면 된다. 단, 우리가 범하는 오류는 부정적 감정을 없애려한다는 것이다. '위기'라고도, '갈등', '문제'라고도 불리는 좋지 않은 현상과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감정을 외면하거나 거부한다.
하지만 이 때 감정의 진짜 역할이 드러난다.
이것이 감정이 인생에서 하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위기를 겪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니, 없다. 위기관리에 능하거나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천치는 있을 수 있지만 위기가 없는 인생은 없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해석이 뛰어난 이들을 보면 참으로 감탄스럽기 그지 없는데 이는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의 '해석'수준이 뛰어난 것이다. 고로, 감정은 이성의 통제아래에 두는 것이 옳다.
위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감지하는 감각과
이 감각이 어떻게 감정으로 연동되는지,
나아가 이를 해석하는 지성,
그리고 해석 후 연결되는 행동까지
내 육체의 모든 면면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은
감정이 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하기 위해 개입된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 해석, 풀이해낼 줄 아는 것이다.
자,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감정,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감정들...
이 모든 감정은 우주가 나에게 요구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역할과 사명을 띠고 내게로 오는 것이다.
위기와 감정이 만나면 우리는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 말을 하면 상대가 화를 낼텐데 두려우니 멈춰야 하나? 거지같은 감정에서도 이성적으로 말을 해야 하나?’, ‘억울해서 미치겠는데 내가 이것까지 해야 하나?, 눈 질끈감고 외면해야 하나?’, ‘저 사람의 성취에 박수를 보내야 하나? 질투심에 뒤돌아서야 하나?’, ‘저 불쌍한 이를 외면해야 하나? 손을 잡아줘야 하나?’, ‘나의 그릇된 면과 마주할 때 괴로워해야 하나? 자각해야 하나?’, ‘과거의 상황이 되풀이될 때 초월할 수 있을까? 좌절하여 무릎을 꿇을까?’, ‘대가를 치를까? 보이는 미래를 포기할까?’ 등등 사소한 일부터 파산, 사기, 배신, 원망 등의 크나큰 사건사고까지 인생의 모든 위기는 감정을 앞세워 선택 앞에서 나에게 혼란을 준다. 즉, 선택은 감정의 개입을 피할 수 없다.
커다란 위기에는 감정의 동요가 위아래로 극심하다.
감정은 위로든 아래로든 반드시 어떤 경험을 내게 각인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출렁인다.
혼란스럽다.
선택자체가 혼란을 전제한 것이긴 하지만.
위기는 선택을 강요하고 선택은 감정의 출렁거림에 혼란스럽다. 바로 이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의 겉모습과 속모습까지 들여다보는 고통, 감정은 이 어려운 것을 하게 한다. 감정은 극심한 정신적 혼란을 야기하면서 자신을 밀어내고 ‘자각’의 힘을 키우라 한다. 현실자각, 자기인식은 위기에 드러나고 드러나니 인지할 수 있고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더욱 더 필요하다.
이 때 감정의 신호를 캐치하고 자각하는 이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부정감정에 질질 끌려다니며 자각을 외면하는 이는 숟가락까지 쥐어줬는데 깨닫지 못한다며 현상에게 호되게 당하며 세상의 뭇매를 맞는다.
위기와 짝을 이뤄 다니는 부정감정의 대혼란을 막고 위기를 ‘자각하여 자신을 들여다보는’ 기회로 만들고자 한다면 감정의 출렁임을 외면해야 한다. 감정이 극심한 강도로 내 안에서 난리를 치더라도 감정에 관심두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내가 현상을 제대로 자각하는 힘을 기르도록
나를 마구마구 흔들며 나랑 싸우자고 덤비는 중이다.
내가 자각할 때까지 있는 힘껏 나를 들쑤시는 것이다.
그게 자기 일이고 역할이니까.
가령, 누군가를 원망하며 하루하루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원망이라는 감정’이 하는 일은 내가 ‘원망’의 본질을 알 때까지 몸집을 키워 더 원망스러운 감정에서 내가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나를 자극하는 것이다. 내가 ‘원망이란 나는 완벽한 피해자, 상대는 가해자인 나쁜 놈으로 스스로 규정지은 것이구나‘를 깨닫는 순간 나에게서 물러난다. 감정을 통해 '원망'이 결국 자기변명임을 자각했기 때문에 이제 '원망'이란 감정은 더 이상 내게서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한껏 부풀린 '원망'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억울함, 무기력, 복수심 등으로 자신을 몰아가게 된다.
한마디로, 어떤 사태를 통해 내게 '원망'이란 감정이 진입한 이유는 '자신을 피해자로, 타인을 가해자'로 규정한 자기합리화를 자각시키기 위해서 온 것이며 자각이 되면 원망이란 감정은 자기 할일을 다 했으니 알아서 떠나는 것이다.
감정이 자신을 드러내 힘을 쓰면 엄청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감정이란 놈은 지속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순간 엄청난 속도와 강도로 심장까지 마구 두들겨대더라도 금새 힘을 잃는 속성이 있기에 감정이 출렁일 때는 잠깐 멈추고 감정을 그냥 내버려 두기 위해 정신을 딴 곳에 보내보는 것도 좋다. 왜냐면, 정신은 감정이 진입한 순간 출동하도록 세팅되어 있기에 멀리 떼어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감정을 내려놓고 외면하겠다는 의지다. 나의 경우엔 영화를 본다.
좋은 감정도 마냥 그대로 지속되지 않고 싫었던 그 감정도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간다. 감정이란 지속력에 있어서는 아주 형편없다. 바로 이 감정의 특성을 믿어보는 것이다. 물론 달래주지 않은 감정이 내 안의 저어기 어딘가에서 두 눈 부릅뜨고 다음 기회를 노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내 온몸을 뒤덮을 기세로 성난 채 출렁댄다면 모든 것을 잠깐 멈춰보자.
진정 신이 인간이 이토록 절절매는 감정이란 녀석을 꼭 쓰이게 하려는 의도는 바로 이것인 것이다.
아무리 감정이 내 정신까지 요란하게 요동치게 해도 외면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감정은 오히려 내가 외면하는 순간,
할 일 다했다는 신호를 보내듯 조용히 누그러지고 이내 사라지는,
아주 독한 기운으로 날 침범하더라도
신을 대신하여 진정한 사랑으로 나를 키우려는 코치같다.
나는 이러한 감정의 진가를 한마디로
라고 명명하려 한다.
자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인지, 성찰하여 아는 차원을 너머 자신을 극복해내고 변화시키는 힘이다.
자각한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을 너머 수용하고 체념한다는 의미다.
자각한다는 것은 인정, 수용, 체념의 과정을 통해 위기로 인해 주눅이나 폭발을 일으킬 감정이 더 이상 내게서 힘을 쓰지 못하도록 놔버린다는 것이다.
감정에 발목잡히지 않은 정신에게 감정은 자신에게 관심두지 않는 것을 깨달았기에 자체적으로 내게서 물러나며 나에게 엄지척을 보낼 것이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의도를 내가 알아챘으니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고 자기 기대보다 내가 더 잘해냈다는 칭찬을 듬뿍 주며 그렇게 내게서 물러날 것이다.
긍정의 감정도, 부정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너무 좋아도 이성은 판단력을 잃고 너무 싫어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극까지 치닫다가도 내가 ‘자각’을 통해 감정을 외면하는 힘을 키우면 물러서는 것, 그리고 그 이면의 감정의 길을 터주어 이성으로 연결시키는 것. 가령, 해야 하는데 하기 싫은 감정에 짓눌려 아무 것도 못하고 끙끙댈 때도 '해야 할'을 '자각'하면 '하기 싫은' 감정은 물러나고 그 이면에 있는 '그래도 해야 하는 열정'이 나의 이성과 연결된다. 이는 마치 내가 감정을 통제하고 억누르고 이기는 것 같겠지만 아니다. 감정과 이성이 날 어떻게든 키우려고 서로 연합하여 자기 역할에 열심인 것이다.
여하튼 위기상황에서 나는 감정을 외면하고 심지어 감정을 배신까지 하지만
감정이 내게 원하는 것이 자기를 외면하고 배신하라는 것이니,
감정의 의도와 본질을 알아챈 나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보상은
현상이면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
해방된 느낌까지 가늠하는 눈,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눈,
‘릴렉스해야 해’, ‘힐링이 필요해’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연역하여 따라가보면 ‘네 몸에서 몸집을 키운 어떤 감정이 이제 압력이 너무 커졌어. 압력을 낮춰주든 제거하든 폭발시키든 그대로 두면 곤란해져. 이 녀석이 널 둘러싸고 일어나는 바깥의 어떤 일과 제대로 손을 맞잡으면 그 폭발은 널 구덩이에 쳐박을지 몰라.’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며 감정은 그 때부터 내게 ‘자각’이라는 이성적 기능을 훈련시키기 위해 내 안에서 아주 무서운 교관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결국,
감정은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안전과 성장을 추구하도록 몰아가는 자체의 역할을 지니고 내게 머문다.
이것이
감정의 진가다.
주>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1999, 문예출판사
[지담북살롱]